16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다 들었으니 숨길 생각은 말 거라.”
이해하지 못할 말들만 늘어놓는 공작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지금 공작은 무슨 말을 하는 걸까?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뭘 들었다는 걸까?
화가 나지 않은 걸로 보아하니 내가 외출했단 사실을 알게 된 건 아닌 듯했는데.
“그래서 어떻게 할 생각이냐?”
“…아버지 뜻대로 하겠습니다.”
“하하하하!”
그때 갑자기 공작이 큰 소리로 웃음을 터뜨렸다.
어쩐지 그는 매우 기분 좋아 보였다.
“그래, 내 뜻대로 하겠다니.”
그가 느릿하게 제 턱을 쓸었다.
“패트리샤, 네가 처음으로 내 맘에 드는 말을 내뱉는구나.”
그가 웃으며 내게 다가왔다.
마치 한번 안아주는 선심을 쓰겠다는 듯.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안겨야 한다니.
그보다 끔찍한 일이 또 있을까?
“그래서…”
나는 몇 걸음 뒷걸음질 치며 확실한 거절의 의사를 보였다.
“그래서 아버지는 어떻게 하고 싶으신가요?”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공작에게 뭔 말을 한지는 모르겠지만.
우선 로렌스의 계획을 따르기로 했다.
“좋다고 하거라.”
“….”
“그와 별빛 무도회에 파트너로 참석해.”
별빛 무도회 파트너.
“…….”
로렌스가 왜 이런 말을 한 건지는 몰라도 그가 날 위했음은 확실했다.
그러지 않고서야 증오하는 여자에게 파트너 신청을 했다 거짓말을 할 이유가 없었으니.
“네, 그렇게 할게요.”
로렌스.
그는 생각보다 더 괜찮은 사람인 듯했다.
“한데 기분이 좋아 보이시네요.”
로렌스의 파트너가 되는 건 되는 건데.
공작이 평소보다 심하게 기분 좋아 보였다.
그의 광대가 조금만 더 힘을 낸다면 곧 이마와 만날 수도 있을 듯했다.
그 모습이 신기하기는 했지만 비열한 웃음을 흘리는 공작의 모습에 기분이 언짢아졌다.
“로렌스가 널 마음에 들어 하는 것 같더구나.”
“…….”
“하긴 네가 날 닮아 얼굴이 빼어나긴 하지.”
순간 헛웃음을 뱉을 뻔했지만 애써 입술에 힘을 주고 굳게 다물었다.
패트리샤가 헤라르일라 공작을 닮았다니.
이보다 더 심한 모욕이 있을 리 없었다.
그저 농이라 해도 말이지.
그러나 자신감에 찬 공작의 눈빛을 보니 진심으로 뱉은 말인 듯했다.
“로렌스와는 몇 번 접점도 없었는데.”
“…….”
“그도 별거 없는 사내였군.”
헤라르일라 공작이 다시금 호탕한 웃음을 터뜨렸다.
“패트리샤, 너도 잘 알고 있겠지만 넌 곧 혼인을 올릴 나이다. 그래, 로렌스 게르하르트에 대해 어찌 생각하느냐.”
로렌스 게르하르트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냐니.
그에게 지은 죄가 너무 커 부디 한 번만 용서해주길 간절히 바라는 중이었다.
“로렌스. 그 정도면 제국 최고의 신랑감이다.”
로렌스의 화가 조금이나마 옅어져서 그저 한때 자신을 좋아했던 정신 나간 계집으로 연을 마무리 지을 수 있길 바랐다.
“잘해보아라.”
“…예?”
“그의 마음을 사로잡으란 소리다.”
헤라르일라 공작의 말에 절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로렌스가 복수한다고 설치지만 않아도 절을 할 판에 그와 잘해보라니.
“로렌스가 네게 청혼하게끔 유도하란 말이다.”
그제야 헤라르일라 공작이 왜 기분 좋아 보였는지 감이 잡혔다.
게르하르트 공작가와 연을 맺을 수 있게 될까 봐 들떠서였군.
어쩐지 평소보다 부드럽다 했다.
패트리샤에게 얻어낼 게 있을까 싶어 그랬던 거구나.
“네, 알겠어요.”
“그래, 그래.”
고분고분 대답하자 헤라르일라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열심을 내보거라.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고.”
“….”
“너도 변방의 늙은이와 결혼하는 것보다야 잘생기고 어린 로렌스가 좋지 않겠니.”
“하?”
“?!”
순간 참지 못한 헛웃음이 튀어나왔다.
‘미친 건가?’
로렌스와의 결혼을 성사시키지 못하면 늙은이에게 팔아넘기겠단 소리잖는가.
딸을 팔아넘기는 게 뭐 떳떳한 일이라고 당당하게 협박까지 한단 말인가.
제 딸을 팔아넘기겠단 말을 저토록 뻔뻔하게.
“당연하죠.”
“…….”
“늙은이와 로렌스 소공작을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로 소공작님이 좋죠.”
마음 같아선 당장 따지고 싶었지만, 여기서 공작에게 반기를 들어봤자 얻을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한데 무도회에 하고 갈 마땅한 장신구가….”
“그런 건 집사에게 말해 알아서 준비하도록 하거라.”
그래, 이왕 이렇게 된 거 돈이나 뜯어야지.
“그리고 새 드레스도 맞춰야 하는데, 요새 사교계에서 유행하는 드레스로 맞춰도 될까요?”
“그것도 집사에게 말해 알아서 하거라.”
나는 알아들었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혹 모를 일을 대비해 세 벌 정도 맞출게요.”
“쯧, 알아서 하라니까.”
헤라르일라 공작은 귀찮다는 듯 작게 혀를 찼다.
“다음 주에 소공작이 오면 최대한 함께 시간을 보내거라. 그의 마음을 완전히 사로잡아야 해.”
아무래도 로렌스가 다음 주에 답을 들으러 온다고 말한 모양이었다.
“사내들은 다 똑같아. 너무 한 번에 맘을 주지 말 거라. 안달 나게끔 잡히면 안 돼.”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이런 얘기를 듣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에 점점 기분이 불쾌해졌다.
제게 이득이 안 될 땐 쳐다보지도 않고 그렇게 무시하더니, 제게 좀 득이 될 듯싶으니 선심 쓰는 척이라니.
최악이었다.
“그럼 이만 나가볼게요.”
“절대 멍청하게 일을 그르치지 말 거라.”
탁.
문을 닫는 그 순간까지 헤라르일라 공작의 입에서 나오는 그 소리는 참을 수 없이 역겨웠다.
제 딸을 그저 도구 취급이라니.
이렇게 된 이상 나도 최선을 다해야 할듯했다.
* * *
똑똑.
“…공녀님, 엠마입니다.”
“들어와.”
이내 문이 열리고 엠마가 머뭇거리더니 방 안으로 들어왔다.
“저….”
그녀는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천천히 말을 끌었다.
분명 일이 어떻게 진행된 건지 확인하고 싶어 들어온 것일 테지.
“걱정하지 마.”
“네?”
“네가 걱정하는 일은 안 일어났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걸 확인하고 싶어 들어온 거잖아.”
그 말에 엠마가 어색하게 제 손을 조몰락거렸다.
“뭐 네가 내 걱정에 들어왔을 리는 없고. 이만 확인 끝냈으면 나가봐.”
“…공녀님, 죄송합니다.”
그만 나가보라며 작게 턱짓하자 엠마가 고개를 푹 숙였다.
그리고는 이내 사과를 뱉어냈다.
“정말 죄송합니다.”
“…….”
그녀의 사과는 정말 의외의 것이었다.
“그간 제가 공녀님께 정말 무례했습니다. 헌데도 제 잘못을 감춰주시다니.”
엠마는 그 짧은 말을 몇 번씩이나 끊어가며 힘겹게 뱉어냈다.
툭, 투둑 떨어지는 그녀의 눈물에 나는 난감함을 느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공녀님을 오해하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닐걸?”
“공녀님께서 절 얼마나 생각해주시는지 이번에 정말 확실히 알았어요!”
아무래도 엠마는 뭔가 단단히 오해한 듯했다.
“흑, 흐윽. 공녀님께서 말은 조금 쌀쌀맞게 하시지만 그 마음만은 아니라는 것, 이제 정말 확실히 알았어요!”
그녀는 정말 서글프게도 울었는데, 아마 그간 참회의 눈물인 듯싶었다.
“공녀님께서 제 잘못을 용서해주신다면, 염치없지만 앞으로는 정말 최선을 다해 모시겠습니다!”
어디에서 뭐 때문인지는 몰라도 엠마는 내게 감동한 듯했다.
“엠마.”
“흑, 흑. 네.”
“다 용서해 줄 테니, 그만 울어.”
이런 유의 오해는 난감하기 짝이 없는 그것이었다.
차라리 나쁜 사람으로 오해받는 게 맘은 더 편할 것 같았다.
엠마를 향한 선의가 아예 없었던 건 아니었지만, 이렇게 울고불고 용서해달라 난리를 칠 정도는 맹세코 아니었다.
아니, 결과만 보면 고맙다는 말을 들을 만도 했다. 내가 그녀의 잘못을 덮어준 것이니.
그러나 그 엠마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는데.
예상치 못한 엠마의 태도에 난감해, 절로 불편해졌다.
“흐윽! 정말 감사합니다, 공녀님!”
그러나 용서해 준다는 내 말에 엠마는 더욱 감동 받은 듯 닭똥 같은 눈물을 뚝뚝 떨궜다,
“아니, 감사할 필요 없다니까?”
“아니요. 공녀님이 아니었다면 전 공작님께 정말 죽었을 거예요. 지금쯤 실컷 두들겨 맞고 지하 감옥에 갇힐 신세였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제가 그간 공녀님께 얼마나 무례하게 굴었는데. 그랬는데도 저를 위해! 흐앙!”
내가 어떤 말을 해도 엠마의 감동을 막을 길은 없는 듯했다.
“하, 알겠으니 눈물이나 닦아.”
나는 하는 수 없이 작게 한숨을 내쉬며 그녀에게 손수건을 내밀었다.
제발 울음이라도 그치길 바라며.
울음이라도 그치면 조금이나마 덜 신경이 쓰일 것 같아 일부로 손수건을 건넸다.
“흡!”
그러나 엠마는 그 손수건을 붙잡더니 아예 더 신나라 울어대기 시작했다.
“저요, 저 정말로 공녀님께 이 은혜를 갚을 거예요!”
그리고 마침내 꺽꺽거리며 제 다짐을 선포했다.
“하아….”
대체 일이 어떻게 흘러가려는 건지 이제 나도 모르겠다.
로렌스를 찾아갔다가 예상치 못한 그의 도움을 받아 무사히 집까지 돌아왔는데.
공작은 이제 로렌스의 마음을 얻어보라고 협박하고, 엠마는 이제 내게 충성을 다하겠단다.
“그래.”
오늘 하루만 해도 너무 많은 일이 있었다.
“그렇게 해.”
나는 바닥에 엎어져 눈물을 흘리는 엠마의 주위에 퍼질러 앉아 그녀의 어깨를 두드렸다.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흐앙!”
오늘은 꽤 많은 일이 있었고 충분히 힘든 시간을 보냈다.
솔직히 누군가 엠마를 끌어내 주었으면 싶었다.
그렇게라도 고요를 되찾고 싶었지만, 그저 그녀를 달래 좋게 내보내기로 했다.
토닥토닥.
나는 다시금 한숨을 참아내며 엠마의 어깨를 일정한 박자로 두드렸다.
부디 조금이라도 빨리 그녀의 눈물이 멈추길 바라며.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