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사락.
사락.
“흐음….”
별빛 무도회의 파트너라.
로렌스는 생각보다도 더 정이 많고 자비로운 사람인듯했다.
패트리샤를 위해 그런 거짓말까지 해주다니.
솔직히 생각해보면 로렌스는 지금껏 단 한 번도 패트리샤에게 직접적인 피해를 끼친 적은 없었다.
패트리샤가 그렇게나 그를 따라다니며 귀찮게 해도 그저 참을 뿐이었다.
사교계에 소문을 내지도.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패트리샤의 만행을 알리지도 않았다.
패트리샤를 떼어내고 싶었다면 그러는 편이 가장 좋은 방법이었을 텐데도 말이다.
게다가 오늘은 헤라르일라 공작 몰래 도망치는 걸 도와주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역시 남자주인공의 인성이다. 이건가?”
아무튼 내게 화를 내던 로렌스에 가끔 그를 저주했던 게 미안해질 지경이었다.
별빛 무도회.
가을 추수 이후 열리는 제국에서 가장 성대한 연회 중 하나였다.
후에 여주와 로렌스도 이곳에서 서로의 마음을 확인했지.
아직 무도회까지는 적어도 두 달이나 남았다.
하지만 영애들은 지금부터 무도회를 준비했다.
그날 가장 눈에 띄기 위해. 가장 아름다워 보이기 위해 지금부터 열심이었다.
사락.
영레이디 매거진을 훑어보아도 모두 다 그 얘기뿐이었다.
별빛 무도회와 관련된.
올해의 색상, 올해 가장 많은 영애가 선택한 드레스와 그 장신구.
하지만 내가 궁금한 건 올해 가장 유행하는 드레스가 아니었다.
“흐음….”
그나마 이게 좋겠네.
나는 매거진의 모퉁이를 접고는 다시금 페이지를 넘기었다.
* * *
똑똑.
“공녀님, 하이네님 오셨습니다.”
“응. 내려갈게.”
엠마가 디자이너의 방문을 알렸다.
방을 나서자 엠마가 자연스레 곁에 붙어 섰다.
그런 엠마에 나도 조금 자리를 내주었다.
“한데 유명한 디자이너를 다 놔두고 왜 하필 하이네로 고르신 거예요?”
엠마는 내가 유명 의상실의 디자이너를 고르지 않고, 그리 유명하지 않은 하이네에게 드레스를 맡긴다는 게 그리 마음에 들지 않는 모양이었다.
“마음에 들어서.”
하이네가 수도의 유명 디자이너는 아니었지만 나는 그녀가 마음에 들었다.
“대체 어떤 부분이요?”
“드레스가 마음에 들어.”
큼직한 보석들로 드레스에 포인트를 준 부분.
그게 참 마음에 들었다.
유명 디자이너의 옷은 그들의 이름값으로 비쌌다. 그래서 한번 사면, 한번 입으면 그 값이 훅 내려가고 말았다.
누구도 남이 한번 입었던 드레스를 원하지는 않았으니.
그러나 하이네가 만든 드레스는 조금 달랐다.
그 드레스에 박은 보석들은 충분히 되팔 만큼 크기가 컸다.
솔직히 말하자면 조금 돈 낭비긴 했다.
차라리 드레스를 살 돈으로 보석을 산다면 더 좋은 보석을 손에 넣을 수 있을 테니.
하지만 헤라르일라 공작은 드레스를 맞추는 조건으로 내게 금전적 지원을 해준다고 했으니 하이네에게 드레스를 맞추는 게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공녀님께서 그러시다면야.”
엠마가 하는 수 없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전 다과 좀 가져다드릴게요.”
엠마가 응접실의 문을 열어주며 그리 말했다.
그녀는 요 며칠 새 항상 이런 식이었다.
내가 문조차 스스로 열지 못하는 사람이라는 듯, 하나부터 열까지 다 챙겨 주려 했다.
쌀쌀맞던 그 엠마가 말이다.
과연 그녀의 감동이 얼마나 갈지는 몰라도 엠마는 요새 나를 꽤 챙겨주었다.
“디자이너 하이네, 헤라르일라 공녀님을 뵙습니다.”
“패트리샤예요.”
“만나게 돼 정말 영광입니다. 공녀님.”
하이네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별빛 무도회에 입고 가실 드레스를 맞추시겠다고요?”
“맞아요. 무도회를 맞아, 한 세 벌 정도 맞추려고요.”
“제가 공녀님의 드레스를 만들게 되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환히 웃는 하이네는 정말 기쁜 듯 보였다.
“생각하신 디자인이 있을까요? 아니면 이걸 보시면서 고르시겠어요?”
그녀는 제 디자인 북을 펼쳐 보이더니 하나하나 설명하기 시작했다.
“이 드레스는 허리를 좀 위에서 잡아주고 드레스 단을 풍성하게 내서….”
“하이네.”
“네, 공녀님. 편히 말씀하세요.”
“전 그날 제가 가장 화려했으면 좋겠어요.”
내가 손에 쥐고 있던 종잇조각을 펼쳐 보였다.
며칠 전 보았던 잡지에서 찢어두었던 거였다.
“가장 화려하게.”
보석들로 장식한 드레스가 있는 그 페이지를 펼쳐 보였다.
“값은 상관없으니 큰 보석을 많이 썼으면 좋겠어요. 해줄 수 있겠어요?”
“네! 당연하죠!”
하이네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날 공녀님이 주인공이 될 수 있게끔 열심히 하겠습니다!”
“고마워요.”
하이네는 제 안경을 한번 치켜올리더니 결심에 찬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드레스를 만들 때 필요한 값은 가문의 집사에게 청구하시면 됩니다.”
결심에 찬 그녀의 눈을 보고 있자니 벌써 완성된 드레스의 모습이 눈앞에서 아른거리는 것 같았다.
* * *
짹짹.
열어놓은 창을 통해 새소리가 흘러들어왔다.
풀 내음과 눈 부신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얼마만의 여유인지.
물론 불청객도 있긴 했지만, 나는 애써 신경 쓰지 않는 척 찻잔을 들어 올렸다.
“……”
분명, 이 티타임에 초대한 이는 카를로스뿐인 듯했는데.
“공녀님, 그래서 소공작님께서 내일 오신다는 거죠?”
어째서인지 이 방에는 엠마도 함께였다.
차를 부탁한 기억까지는 있었는데.
엠마가 눈물을 흘리며 제 잘못을 참회한 지도 이제 오 일째.
시간이 꽤 지났음에도 그녀는 아직까지 내게 충성을 보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뻔뻔해지기로 한 것인지 은근슬쩍 의자에 앉아서는 능청스레 말을 걸어왔다.
그런 엠마를 보며 카를로스는 조용히 쿠키만 입에 물고 있을 뿐이었다.
“맞아. 내일 오신대.”
잠시 엠마는 그대로 둔 채로 카를로스에게 집중했다.
“근데 소공작님이 파트너 신청은 어떻게 하셨어요?”
“…….”
“크흠, 공녀. 제 파트너가 되어주시겠습니까? 이렇게?”
“…….”
“아니면 공녀. 무도회에 갈 파트너는 있습니까? 없다면 저라도 함께 해….”
“엠마.”
어째서인지 엠마는 매우 들떠 보였다.
“그 정도만 하자. 시끄러워.”
“…네.”
나는 엠마가 이토록 수다스러운 줄 정말 몰랐다.
매번 도끼눈을 하고 째려보기만 하는 줄 알았더니.
덕분에 심심할 틈이 없었지만, 엠마에게 그다지 고맙지는 않았다.
“공녀님이 매번 저택을 빠져나가시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군요. 전 공녀님의 짝사랑인 줄 알았는데.”
역시나 엠마는 조용히 하겠다 답한 지 몇 분이 채 지나지 않았음에도 다시금 신이 나 입을 열었다.
“그럼 저택을 나가시면 소공작님과는 어디서 만나세요? 매번 게르하르트 저택에서요?”
“…….”
“그보다 요즘엔 왜 외출이 뜸해지신 거예요?”
“…….”
“설마 싸우신 건 아니시죠?”
엠마가 걱정된다는 듯 한껏 목소리를 낮추며 물어왔다.
“엠마.”
“네?”
“그만 나가.”
“…하지만.”
“당장.”
“네, 공녀님.”
엠마가 한껏 어깨를 축 내려뜨리고 방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녀는 내가 잡아주길 바라는 것처럼 흘긋 다시 날 뒤돌아봤다.
그 시선에서 서운함이 읽혔다.
“……”
카를로스는 내버려 두고 저만 쫓아내는 내게 서운한 듯 보였다.
그러나 난 더 이상 그녀에게 당하고 싶지 않았다.
내가 문을 턱짓하자 엠마는 그제야 문고리를 잡았다.
“필요한 게 있으면 불러주세요. 공녀님.”
그녀는 그렇게 언제고 부르면 돌아오겠다는 말을 남기고는 문을 닫았다.
탁.
“하아….”
문이 닫힘과 동시에 한숨이 절로 흘러나왔다.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돌아온 그 날부터 패트리샤의 일상이 조금씩 변했다.
우선 공작은 가끔 날 보며 기분 나쁜 웃음을 흘려댔다.
또 심심할 때마다 찾아와 무도회 준비가 잘 진행되는지 확인하며 잔소리를 늘어놓기도 했다.
소공작이 찾아오면 어떤 식으로 말을 해야 하는지 충고를 하기도 했고.
정말 불편하고 짜증 나는 인내의 시간이었다.
그러나 나를 향한 공작의 관심이 당황스러운 건 비단 나 뿐은 아니었다.
첫째 모르간과 둘째 바버, 셋째 밀럼까지 공작이 나에게 쏟는 관심에 놀라 얼떨떨해 했다.
그들은 나를 향한 갑작스러운 공작의 관심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평소보다 날 더 신경 쓰기 시작했다.
물론 좋은 방향은 결코 아니었다.
모른 척 발을 걸기도 했고 그 넓은 복도를 거닐면서 구태여 어깨를 치고 간다거나 다 들리도록 앞 담을 하기도 했다.
전처럼 무시하는 게 나은 것 같았다.
안 그래도 정신 사나운 상황에 엠마까지 그 위에 수다를 얹었다.
전엔 심심해서 미칠 지경이었다면 요즘엔 제발 혼자 좀 있고 싶었다.
“하아….”
어떻게 된 게 이 집구석은 '적당히'를 몰랐다.
'적당히'를.
“공녀님, 왜 그러세요?”
“아, 아무것도 아니야. 카를로스.”
깊은 한숨에 처음부터 내 방에 함께 있었던 카를로스가 걱정된다는 듯 날 바라봤고 난 괜찮다며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랬음에도 카를로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힐끗거리며 날 쳐다봤다.
“소공작님이….”
“응?”
“게르하르트 소공작님과 많이 친하세요?”
“…아니?”
로렌스와 친했더라면 얼마나 인생이 편했을까.
그러나 안타깝게도 패트리샤는 그러지 못했고 그 결과 내가 열심히 아득바득 인생을 헤쳐나가는 중이었다.
“그럼 소공작님을 좋아하세요?”
“아니.”
그제야 카를로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근데 무도회의 파트너가 되면 앞으론 어떻게 되는 건가요?”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