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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18화 (1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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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

“엠마님은 공녀님이 소공작님과 연을 맺게 될지도 모른다고, 게르하르트 공작부인이 될지도 모른다고 하셨어요.”

“엠마가?”

이 어린아이한테까지 입을 털어댄 걸로 보아하니, 저택 안에서 무슨 소문이 퍼지고 있을지 훤했다.

“정말, 결혼하시는 거예요?”

“아니!”

차라리 엠마가 날 노려보던 그때가 좋았던 것 같았다.

그래, 차라리 지금이라도 엠마를 쫓아내는 게 나을까?

“전에 말했지. 난 친구가 없다고. 소공작님도 마찬가지야.”

“네?”

“친구 없는 이들끼리 함께 가는 거야. 하는 수 없이.”

카를로스는 어딘지 심란해 보였다.

“…….”

살짝 주름진 그의 미간은 아이답지 않게 고민이라도 있는 듯 보였다.

꽤 길었던 침묵을 끊고 카를로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제가 공녀님 친구라고 했잖아요.”

“음?”

“우린 서로가 서로의 유일한 친구죠? 그렇죠?”

“…어. 그렇지.”

카를로스는 그제야 기분 좋게 미소 지었다.

방긋하게 올라간 광대와 곱게 접힌 눈.

그의 긴 속눈썹이 새하얀 피부에 옅은 그림자를 만들었다.

정말 완벽한 미소였다.

한데 왜일까?

어딘가 찝찝했고 아주 조금 불길한 기분이 들었다.

“…카를로스?”

“네?”

그러나 아이의 순진무구한 그 눈동자를 마주한 순간 그저 고개를 저을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많이 먹어.”

* * *

똑똑.

“공녀님, 소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엠마가 한껏 들뜬 목소리로 소공작의 방문을 알려왔다.

“그럼 어서 들어와서 이것 좀 빼주겠니?”

아무래도 정말 그녀를 쫓아내는 편이 나을 듯했다.

“네, 공녀님. 빨리 도와드릴게요.”

엠마는 소파에 늘어져 있던 날 일으켜 세워 화장대 앞까지 옮겨주었다.

화장대 앞에 앉자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머, 공녀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엠마는 내 머리를 둘둘 말고 있던 이상한 미용기구를 하나하나 다 떼어내면서도 호들갑 떠는 걸 잊지 않았다.

“이러다 정말 공작부인이 되시는 건 아닐까 몰라요!”

엠마는 그 능숙한 손놀림으로 복슬복슬거리는 내 머리를 한껏 더 헝클어 놓았다.

덕분에 거울 속에는 웬 수사자 한 마리가 들어앉아 있었다.

“제가 또 이런 손재주가 좋아요.”

“…….”

엠마는 그렇게 말하며 컬을 넣은 머리칼 위로 핀을 집어 주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잘 보여야 한다며 어제저녁부터 한바탕 난리를 부린 결과가 이거라니.

장미 기름으로 장작 세 시간 동안 때 빼고 광낸 결과가 거울 속 사자라니.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아니, 엠마는 분명 내게 은혜를 갚겠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공녀님께선 이번 무도회 걱정은 하실 필요가 없으세요!”

“하아….”

그래.

정말 무서운 건 바로 이것이었다.

엠마는 정말 지금 이 모습을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래, 엠마.”

엠마는 정말 제 손재주가 뛰어나다고 믿고 있었고 은혜를 갚겠다던 엠마는 그녀 나름대로 내게 최선을 다한 것이었다.

“소공작님께서 기다리시겠다. 그만 내려가야겠어.”

“네, 공녀님. 잠시만요.”

웃는 얼굴에 침 못 뱉는다고 했던가?

그래. 옛말 틀린 것 하나 없다고, 저토록 신나 보이는 엠마를 자르지는 못할 듯했다.

엠마는 푸닥거리며 움직이더니 내 어깨에 숄을 걸쳐주었다.

이 여름에 말이지.

“이제 가도 되지?”

“네! 완벽해요!”

이보다 더 화려할 수 없었고 이보다 더 산만할 수 없었다.

나는 오늘 정말 놀라운 사실을 깨달았다.

이 얼굴을 이렇게 쓸 수도 있구나, 라는.

있던 정도 다 떨어질 판이었다.

한데 로렌스가 패트리샤에게 남은 정이 있을까?

과연 로렌스가 이 꼴을 보고도 파트너가 돼달라던 그 말을 바꾸지 않을지 의문이었다.

* * *

“푸흡!”

“오랜만에 뵙습니다. 소공작님.”

“아, 아….”

내가 응접실에 들어서자마자 로렌스는 눈이 평소보다 두 배는 커졌다.

마침 차를 마시고 있던 그는, 그만 그중 일부를 다시 내뱉고 말았다.

당황한 듯 서둘러 제 입가를 닦아낸 로렌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다시 날 훑어보았다.

“머리는….”

“…….”

“괜찮나?”

로렌스는 그제야 평상시의 제 목소리로 돌아왔다.

그러나 잘게 흔들리는 눈빛까지 어쩌지는 못했다.

그는 한껏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내 머리와 날 번갈아 바라보았다.

“소공작님이 오신다길래 꾸민 거예요.”

괜찮냐니.

한껏 경계하며 이상한 사람 취급하는 로렌스에 나는 그가 내 상태를 완전히 오해하기 전에 서둘러 사실을 정정했다.

“…그랬군.”

소공작은 조금 무안해졌는지 작게 헛기침을 하고는 시선을 돌렸다.

아무래도 제가 무례했다는 걸 뒤늦게 깨달은 듯했다.

“…….”

“…….”

그는 힐끔거리며 날 바라봤다.

그의 얼굴로 미루어 보아 내가 혹여나 기분이 상했을까 신경 쓰이는 듯했다.

“머리가 참… 예, 독특하군.”

로렌스는 차마 예쁘다거나 잘 어울린다는 말은 하지 못하고 모호한 평을 남겼다.

아마 그 딴에는 그것이 최선의 노력이었던 듯하다.

“이래 보여도 새벽부터 준비한 머리예요.”

나는 고맙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소파로 다가가 앉았다.

“아버지께 소공작님이 제게 파트너 요청을 하셨다고 말씀하셨다는 것을 들었어요. 감사해요.”

“뭐가?”

“절 도와주시려고 일부러 그렇게 말씀하신 거 알고 있어요.”

어째서인지 오늘은 그가 그리 화나 보이지 않았다.

그리고 그의 호의를 받아 봐서인지, 그가 생각보다 더 좋은 사람이라는 걸 알게 돼서인지.

그가 전만큼 그렇게 무섭게 느껴지지는 않았다.

“주셨던 도움은 기회가 된다면 저도 갚을게요.”

“…….”

“정말로요. 제게 원하시는 게 있다면 언제든 꼭 말씀해 주세요.”

그가 미워 보이지 않은 이유는 알 수 없지만 하나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는 건 내가 은혜를 모르진 않았다.

받은 건 꼭 돌려주려고 노력하는 성격으로서 정말 진심이었다.

“됐으니 내 사진이나 찾아내.”

“아…. 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니, 사람이 너무 정확하게 계산하면 그것도 정 없어 보였다.

가끔은 받으면서 살기도 하는 거지.

“그 사진은 저도 정말 열심히 찾고 있는데. 아직, 못 찾았어요.”

아무리 생각해도 로렌스의 사진을 찾아내는 건 불가능했다.

하지만 로렌스에게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내 잘못으로 잃어버려놓고 사진을 찾는 건 불가능하니 포기하라고 어찌 그에게 말 할 수 있겠는가.

그저 그가 시키는 대로 열심히 찾아보는 수밖에.

‘그러다 그가 사진 찾기를 포기하면 좋을 텐데.’

로렌스가 포기할 때까지 그의 화가 조금이나마 풀릴 수 있도록.

열심히 그의 말을 따르는 것 외에 내가 해줄 수 있는 건 없었다.

그게 패트리샤 때문에 어머니의 사진을 잃어버린 로렌스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유일한 일이었다.

“…….”

나는 한껏 반성한다는 듯 고개를 깊이 숙이고 눈을 내리떴다.

“쯧. 다음 주엔 공작저로 올 필요 없어.”

“네?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오지 말라고요?”

“그래.”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어?’

내 생각보다 그의 단념이 너무 빨라 멍하니 눈을 깜빡이며 그를 바라봤다.

“그럼, 사진은….”

“뭔 소리야? 찾아내야지.”

다시 한번 내가 이해한 게 맞는지 확실히 하려 입을 뗐지만 단호한 로렌스의 말에 서둘러 입을 다물었다.

“외출 금지라며.”

“아, 네.”

“앞으로는 내가 올게.”

“네?”

“한 주에 한 번씩 내가 이리로 오겠다고.”

로렌스는 사진을 포기했다기 보단 내 상황을 배려해주려는 듯했다.

고맙긴 했는데….

“감사해요.”

“…….”

“…….”

그 감사 인사를 끝으로 응접실엔 어색한 침묵이 맴돌았다.

더 이상 서로 할 얘기가 없었다.

로렌스도 나를 찾아왔던 목적은 다 이룬 모양이었다.

“…”

시계를 흘끗거리며 언제쯤 로렌스가 일어날지 가늠해보았다.

그러나 여유롭게 차를 마시는 로렌스를 보아하니 저 차를 다 마시고 나서야 일어날 듯했다.

“…….”

“다시 한번 정말 감사드려요. 저 때문에 괜히 무도회에 함께 가주셔서.”

계속되는 침묵에 어색한 마음이 들어, 무도회 이야기를 다시 꺼내고 말았다.

사실 무도회 를 파트너와 꼭 함께해야 하는 것은 아니었다.

물론 혼자 한다면 조금 불편한 상황이 있기도 하겠지만 꼭 함께할 필요는 없었다.

서로 조금의 호감도 없다면 파트너로서 함께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로렌스가 공작에게 그렇게 말한 까닭은 나와 그의 만남이 무도회 파트너라는 변명을 제외하면 아무런 접점이 없었기 때문일 테지.

내 만행을 공작에게 알리지 않으면서도 그가 공작가로 찾아왔을 만한 적당한 이유를 대기엔 파트너 신청이 가장 적절하긴 했다.

“소공작님이 절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 아는데, 그래서 더 죄송하고 감사해요.”

“…패트리샤.”

“네?”

순간 바라본 로렌스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아니, 내가 뭐 실수했나?

그의 미간이 조금 좁아졌다.

로렌스의 적안을 마주하며 말을 기다렸지만, 그는 날 빤히 바라보기만 할 뿐 입을 열지는 않았다.

“소공작님? 하실 말씀이라도….”

“아냐, 됐어.”

그가 고개를 젓더니 들고 있던 찻잔을 내려놓았다.

“오늘은 그만 가도록 할게.”

“아, 네.”

로렌스의 말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렌스는 응접실의 문을 열기 전 다시 한번 미간을 좁힌 채 나를 바라봤다.

그러나 또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

로렌스는 문고리에 손을 올리려는 듯 팔을 뻗었지만 잡지 않고 그대로 팔을 내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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