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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19화 (19/67)

19

“누가 왔어.”

그 말이 끝나기 전에 시녀가 응접실 문을 똑똑 두드렸다.

문이 열리고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들어왔다.

“소공작님 아버지께서 잠시 만나자고 하십니다. …혹 가시려고 일어나신 겁니까?”

“아닙니다. 공작님을 뵙고 가지요.”

순간 모르간. 그의 시선이 내게 닿았다.

그와 동시에 그가 되는 대로 얼굴을 찡그렸다.

“너…. 너….”

그의 얼굴 위로 경악이 드리웠다. 그는 내게 손가락질까지 해 가며 말을 더듬었다.

제 앞에 로렌스가 있다는 것조차 까먹을 정도로 놀란 듯 보였다.

모르간을 바라보고 있던 로렌스도 모르간의 손끝을 따라 시선을 돌렸다. 이내 로렌스의 시선이 다시 내 머리 위로 고정되었다.

“머리가… 왜 그래?”

나는 마땅히 해줄 말을 찾지 못하고 신경 쓰지 말라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사실 네 알 바 아니지 않냐는 의도가 더 맞았지만.

그러자 모르간은 특유의 사람 무시하는 그 표정을 짓고는 작게 고개를 내저어댔다.

“우스우니까 당장 그 머리 좀 어떻게 해.”

모르간이 나지막이 경고했다.

모르간이 목소리를 낮춘 이유는 도통 모르겠으나 그는 한껏 소리를 낮추고 말했다.

제가 목소리를 낮추면 로렌스가 못 들을 거라 생각한 건가?

“그럼 이만 공작실로 모시겠습니다.”

모르간은 다시금 로렌스에게로 시선을 돌리며 말했다.

로렌스는 힐끔 날 바라보더니 작게 눈인사만을 남기고 그대로 응접실을 나가버렸다.

문이 닫히고 혼자가 되자마자 모르간을 향해 혀를 내밀었다.

“하, 지가 뭔 상관이람.”

로렌스만 없었더라면 한바탕 따져주는 건데.

* * *

“하아….”

응접실을 나온 모르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무슨 생각인 건지.”

그는 혼잣말인 듯 작게 중얼거렸다.

그러나 바로 곁에서 걷는 로렌스에게도 충분히 들릴듯한 소리였다.

“죄송합니다. 얘가 좀 멍청해서요.”

모르간이 헛웃음을 흘리며 로렌스에게 작게 사과했다.

로렌스는 모르간이 왜 패트리샤의 머리를 가지고 제게 사과를 하는지 이해하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쯧, 대체 무슨 생각으로 제 머리를 저렇게 만든 건지.”

“…….”

“그나마 볼만한 게 그 낯짝뿐인데.”

순간 로렌스의 눈빛이 조금 차게 변했다.

“멍청한 것.”

모르간은 그런 로렌스의 눈빛을 보지 못한 채, 마저 흉을 보았다.

“제겐 괜찮아 보였습니다.”

“네?”

“그저 하고 싶은 머리를 하는 거에 가타부타하고 싶진 않지만, 제겐 괜찮아 보였습니다.”

“아….”

모르간은 로렌스가 이리 나올지 예상하지 못한 듯 어색하게 말끝을 흐렸다.

“멍청하다라… 대체 뭐 때문에 그녀에게 그리 말하는지는 모르겠지만.”

로렌스는 천천히 모르간이 패트리샤를 욕보인 말을 입에 담았다.

“타인 앞에서 제 가족을 욕하는 이만큼 우습고 멍청한 것 같지는 않군요.”

순간 모르간의 얼굴이 새빨갛게 변했다.

제 잘못을 깨닫고 창피해서라기보다 절 멍청하다 욕보인 로렌스에 분해서였다.

하지만 아무리 분하다 해도 로렌스에게 모르간이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같은 지위를 가진 공작의 자식이라 해도 로렌스와 제 사회적 위치가 다름을 모르간도 알았다.

로렌스는 모르간을 잠시 더 바라보다 그대로 고개를 돌려버렸다.

분한 듯 얼굴을 붉힌 모르간의 모습에도 제 말을 번복하거나 그의 기분을 풀어주려 하지 않았다.

“…….”

그렇게 로렌스는 혀를 차주고 싶은 걸 참아냈다.

제 앞에서도 패트리샤에게 이리 무례하게 구는데 저들끼리만 있을 땐 그 정도가 얼마나 심할지 눈에 훤했다.

그 생각을 하자 기분이 더러웠지만 그렇다고 제가 뭘 어쩌겠는가. 각자의 삶인 것을.

로렌스는 그저 아쉬운 것 없다는 듯 모르간에게서 고개를 돌릴 뿐이었다.

저벅저벅.

짧았던 두 사람의 대화가 끝나고 공작저의 복도에는 작은 발걸음 소리만이 울릴 뿐이었다.

‘이래 보여도 새벽부터 준비한 머리예요.’

새벽부터 준비했다던 그녀의 말이 다시금 떠올랐다.

저 때문에 새벽 일찍 일어나 머리를 말았을 패트리샤의 모습이 상상됐다.

그래, 그렇게 이상하진 않았다.

지푸라기에 파묻힌 것 같기는 했지만, 나름 그녀에게 잘 어울리는 듯했다.

* * *

해진 저녁.

“하아….”

“소공작님, 왜 그러십니까?”

로렌스의 깊은 한숨에 보좌관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벌써 세 번째 깊은 한숨이었다.

로렌스는 패트리샤를 만나러 다녀온 후부터 종종 한숨을 내쉬곤 했다.

그래놓고 왜 그러냐 물으면 별일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는 말만 반복할 뿐이었다.

아니, 그러면 한숨을 쉬지 말던가.

“두 달, 아니 석 달 동안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 오도록 해, 공녀가 진료받았던 기록도 알아 와.”

“네. 알겠습니다.”

로렌스의 명이 급작스럽긴 했지만, 시몬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명을 받았다.

“한데 그건 왜 알아보려 하십니까?”

아마 그가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던 이유와 연관이 있겠지.

“패트리샤가 변했어.”

한참 만에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변했다니. 그게 무슨 말씀이십니까?”

시몬도 패트리샤가 변했다는 말은 조금 동의했다.

요새 그녀는 별로 공작저를 찾지 않았다.

원래라면 매일같이 방문했어야 할 그녀가 말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패트리샤가 로렌스를 향한 마음을 접은 건 아닌 듯 보였는데.

저번만 해도 그 뙤약볕에서 몇 시간 동안 로렌스를 기다리지 않았는가.

만약 마음이 떴다면 패트리샤 그녀가 뭣 때문에 그 고생을 했겠는가.

혹 오늘 무슨 일이 있었나?

시몬이 이래저래 패트리샤가 변했다는 로렌스의 말뜻을 파악하기 위해 머리를 굴리고 있을 때 로렌스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몰라.”

“네? 뭘 모르시겠다는 겁니까?”

분명 변했다고 말했으면서 모르겠다니.

시몬은 도통 로렌스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 진단기록은 왜 알아보려 하시는 겁니까?”

“하아….”

로렌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네가 한 말이 걸려서.”

“제가 한 말이요?”

“혹시 패트리샤가 아파서 못 오던 건 아니냐던 그 말.”

그제야 시몬은 제가 했던 말을 떠올렸다.

얼마 전에, 약 한 달 동안 패트리샤가 찾아오지 않아 로렌스에게 했던 말이었다.

그녀가 이토록 안 오는 걸 보면 어디가 크게 불편한 거 아니겠냐고.

“전에 봤을 땐 크게 불편해 보이진 않았는데요?”

안색도 나빠 보이지 않았고 걷는 모습도 크게 불편한 곳은 없는 듯 보였다.

“그저 소공작님을 향한 관심이 조금 식은 것 아닐까요? 매일 오기는 귀찮을 정도로?”

“시몬.”

“네?”

“이럴 시간에 말한 거나 알아 와.”

로렌스는 시몬의 질문에 짜증이 난 듯 한숨을 내쉬며 작게 경고했다.

“넵! 그럼 저는 잠시 나갔다 오겠습니다.”

시몬도 로렌스의 기분을 파악하고는 서둘러 제 가방을 챙겨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탁.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로렌스는 의자 깊이 몸을 기댔다.

“후우….”

로렌스가 답답한 듯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패트리샤는 아직 자신을 좋아했다.

그녀가 그녀 입으로 그러지 않았던가.

새벽 일찍부터 준비했다고.

만약 그녀가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뭐 때문에 그런 번거로운 일을 했겠는가.

하지만 패트리샤의 마음이 변하지 않았다는 걸 시몬에게 알려주기 위해 시몬에게 그 상황을 일일이 설명하기도 우스운 일이었다.

유치하지 않은가.

로렌스는 알지도 못하면서 함부로 떠드는 시몬에게 작게 짜증이 났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구태여 설명하지는 않았다.

‘전에 봤을 땐 크게 불편해 보이진 않았는데요?’

그래, 제가 보기에도 패트리샤는 그리 크게 아파 보이지는 않았다.

몸의 움직임도 어색하거나 불편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혹 만에 하나라는 게 있는 법이지 않은가.

패트리샤는 정말 변했다.

목걸이를 먼저 돌려주며 이제 제게 그만 귀찮게 군다고 말한 일이 떠올랐다.

‘소공작님이 절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잘아요.’

로렌스는 오늘 패트리샤가 제게 했던 말이 생각나 다시금 한숨을 내뱉었다.

그간 패트리샤는 단 한 번도 저런 말을 제 입에 담은 적 없었다.

‘절 얼마나 싫어하시는지 알아요.’

그 말을 하는 패트리샤는 어딘지 슬퍼 보여, 어째서인지 패트리샤에게 조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꼭 나쁜 놈이 된 것만 같아서 기분이 그리 좋지는 않았다.

“젠장. 그딴 말은 왜 해 가지고.”

한껏 풀죽은 듯 고개 숙이던 패트리샤의 얼굴이, 눈도 마주치지 못하던 그녀의 모습이 떠올라 기분이 나빠졌다.

사람은 죽기 전까지 변하지 않는다고 했던가?

사실인지 확인되지도 않은 옛말 때문에 불안해 미칠 지경이었다.

그 말대로라면 패트리샤는 진작 죽어도 이상할 게 전혀 없는 상황이었으니 말이지.

“쯧.”

차라리 매일 찾아오던 게 덜 신경 쓰일 것 같았다.

패트리샤, 그녀 때문에 뭐 하는 짓인지.

“…….”

로렌스는 자리에서 일어나 창밖을 바라보았다.

불과 몇 분 전에 나간 시몬을. 그가 가져올 소식을 벌써 기다리고 있었다.

* * *

그날 저녁 식사 시간.

혀를 차며 다이닝룸으로 들어온 공작은 털썩 의자에 앉았다.

“…….”

공작은 뭔가 못마땅한 듯 눈을 부라렸다.

그런 공작의 모습에 다이닝룸은 순식간에 살얼음 장 같은 분위기가 되었다.

“쯧쯧. 멍청한 것.”

언제나처럼 공작의 비난은 나를 향했고 그에 입으로 향하던 포크를 조심히 내렸다.

“어째 너는 기회가 눈앞에 놓여도 잡지 못하는 것이냐! 만에 하나 너 때문에 우리 가문에 피해라도 온다면 어쩌려고!”

“네?”

헤라르일라 공작이 언짢은 듯 목소리를 높였다.

“소공작이 이곳까지 찾아왔으면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노력을 해야지! 그대로 돌려보내?”

“…….”

“너는 대체 생각이란 게 있긴 한 것이냐!!”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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