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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0화 (2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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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의 목청에 절로 인상을 찌푸려졌다.

그런 내 반응에 헤라르일라 공작이 어이가 없다는 듯 작은 헛웃음을 터뜨리더니 상을 '쾅' 하고 내리쳤다.

“내 말을 듣고 있긴 한 게야?!”

“당연하죠.”

아니,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서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데 안 듣고 싶어도 들을 수밖에 없었다.

맘 편히 식사도 못 하게.

식탁에서 이게 무슨 행패란 말인가.

“하…. 또 건성으로….”

헤라르일라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아무래도 내 대답이 맘에 들지 않은 것 같았다.

“그래, 그렇게 소공작을 놓치고 늙은이에게 팔려 가고 싶기라도 한 거냐? 네가 원하는 게 뭐 그거라면 말리지는 않겠다만.”

그는 화가 난 듯 한껏 비아냥거렸다.

다시 한번 도를 넘은 그 말에 순간 미간에 주름이 절로 만들어졌다.

‘참는 것도 한 번이지.’

공작이 처음으로 날 늙은이에게 팔아넘기겠다고 말했을 때, 당황스러워 별 말하지 못했다.

어쩌면 실수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화가 나서 저지른 실수일지도 모른다고. 그러나 이로서 실수가 아닌 것이 확실해졌다.

탁!

그대로 들고 있던 식기를 던져버리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았지만, 최대한 이성을 부여잡고 식기를 내려놓았다.

“하, 지금. 뭐 협박이라도 하시는 건가요?”

“패트리샤!”

지금껏 공작의 말에 이죽거림으로 동조하던 모르간과 바버가 이제야 입을 열었다.

“아버지께 그게 무슨 말버릇이야!”

“하여튼 못 배워 먹은 티는 혼자 다 내지?”

그들은 화를 내며 공작을 향한 내 말투를 지적했다.

“아버지. 지금이라도 그냥 내쫓아요! 아버지께 이게 무슨 무례랍니까?”

“먹여주고 재워주고 지금껏 키워준 은혜를 이렇게 갚다니!”

“뭘 잘했다고 눈을 부라리는 거야?”

모르간과 바버는 금방이라도 자리에서 일어날 것처럼 자세를 취했다.

내가 고작 그 한마디 했다고 물어뜯을 것처럼 날 노려봤다.

아주 충직한 개가 따로 없었다.

“후우….”

참아야 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지금 공작에게 따진다면 모르간의 말처럼 쫓겨나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그러니 지금이라도 죄송하다고 사과하는 편이 맞았다.

지금 난 돈도 없었고, 이 거지 같은 곳에서 쫓겨나면 머물 장소도 없었으니.

그러니 참는 게 답이었다.

“돈 받고 딸을 팔아넘기는 게 자랑인가?”

참는 게 답이었는데.

“나 같으면. 설령 그렇게 한다고 하더라도 쪽팔려서 입 다물고 있겠네.”

“패트리샤!”

“대체 뭘 얼마나 배워야 쪽팔림도 모르고 그토록 당당할 수 있는 거죠?”

콰당!!

모르간이 자리에서 얼마나 급하게 일어났는지 그가 앉아 있던 의자가 그만 뒤로 넘어가고 말았다.

“너 당장 입 다물어!”

제 아버지를 욕보인단 사실에 모르간이 화가 난 듯 내게 손가락질하기 시작했다.

그의 입에서 침이 방울방울 튀어나왔다.

“야, 침 튀잖아. 너나 입 다물어.”

드르륵.

“더럽게 진짜.”

모르간의 침을 피해 의자를 빼냈다.

“넌 말할 때 침 튀기지 않게 조심하는 게 기본적인 예라는 것도 모르니? 그간 말 안 했는데 너 침 엄청 튀어.”

“이게 어디서 반말이야!”

쨍그랑!

모르간이 제 앞접시를 '탁' 쳐냈고 바닥에 부딪힌 접시는 순식간에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그가 씩씩거리며 한 대칠 것처럼 내게 다가왔다.

“야 너 이리 와 봐!”

순식간에 다이닝룸은 아수라장이 됐다.

“저런 무식한 계집은 두들겨 맞아야 정신을 차리지! 이리 와봐!”

“뭐 오라면 못 갈 것 같냐? 내가 여자여도 넌 이겨!”

모르간이 씩씩거리며 손을 올렸고.

쾅!!

“그만!!”

그 순간 헤라르일라 공작이 상을 내리치며 고함을 질렀다.

“이게 무슨 짓이냐!”

“하지만, 아버지! 이 계집이….”

“그만. 멍청한 계집 하나 상대하겠다고 같이 멍청해질 순 없는 노릇이다.”

“하?”

또 이런 식이다.

모든 잘못은 나 때문이라는 듯, 패트리샤 자체를 부정하곤 했다.

“패트리샤, 지금 당장 길바닥에 나앉고 싶지 않다면 그만하는 게 좋을 거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눈을 부릅뜬 채 날 노려보았다.

“네가 이 집을 나가서도 지금처럼 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기분이 나빴음에도 공작의 말에 반박할 수는 없었다.

그의 말대로 내가 할 수 있는 건 없었으니.

이곳에서 쫓겨난다면 정말 길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이제야 네 위치를 깨달은 모양이구나.”

“하? 멍청한 것.”

모르간이 차게 웃었다.

“하긴 힘이 없으면 기기라도 해야지. 안 그래?”

비아냥거리는 그 말에 저들끼리 한바탕 웃음을 터뜨렸다.

“패트리샤, 행패를 부렸으면 사과를 해야지.”

“…….”

모든 것을 내 탓으로 돌리며 그들은 사과를 요구했다.

그저 이대로 나가버리고 싶었지만뒷일을 생각하여 사과를 건넸다.

“하아, 죄송합니다.”

“하아? 그게 죄송한 태도냐?”

다시 한번 모르간이 비아냥거렸지만, 그에게 따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따져봤자 결국 사과하는 건 또 나일 테니까.

괜히 자존심만 상할 뿐이었다.

“그럼 이만 나갈게요.”

“쯧.”

등 돌린 내 뒤로 모르간이 혀를 찼다.

“소공작이나 똑바로 잡아. 괜히 놓치고 늙은이 품 안에서 울고불고 후회하지 말고.”

“…….”

“뭐 다 너 좋으라고, 너 잘되라고 하는 말이야! 새겨들어!”

탁.

닫힌 문틈 새로 모르간의 분한 듯한 목소리가 조금 흘러나왔다.

“후우….”

내뱉는 숨이 잘게 떨려왔다.

저들은 대체 왜 패트리샤를 이렇게나 싫어하는 걸까?

패트리샤가 뭘 그리 잘못했길래.

그저 패트리샤가 저들보다 멍청하여서. 단지 그뿐일까?

“후우….”

지금껏 꽤 잘 버텨왔다고 생각했다.

은근한 무시와 경멸도. 그들의 증오도 꽤 잘 버텨왔다.

어차피 난 패트리샤가 아니었고, 그들의 비난과 조롱이 그리 슬프지도 아프지도 않았는데.

오늘은 평소보다 더 화가 났다.

그간의 감정이 조금씩 쌓여서일까?

그래. 정말 솔직히 말하자면 속상했다.

가족이라면서 왜 난 저들 사이에 낄 수 없는 것인지.

왜 내가 조롱거리로서 찰나의 웃음거리가 되어야 하는지.

내가 어떻게 되든 저들은 아무런 상관없다는 듯 굴었다.

내가 늙은이에게 팔려 갈 상황을 들먹이며 협박을 하지 않나, 절박하고 불안해할 내 모습이 재밌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

불안했다.

혹여나 정말 그들의 말대로 그렇게 되기라도 할까 봐.

이 세상엔 내가 의지할 이라곤 단 한 명도 없었다.

가족이라는 이들까지 저 모양이니.

가족.

사실 매일같이 되뇌었다.

저들은 내 가족이 아니라고.

난 패트리샤가 아니라고.

그러니 상처받을 것 없고 그들이 무슨 말을 지껄이든 난 괜찮다고.

하지만 아니었다.

나를 조롱하는 그들에 화가 났고, 패트리샤와 가족이라는 이름으로 묶인 그들의 비난에 속이 상했다.

잘못한 게 하나도 없는데, 견뎌내야 하는 건 너무 무겁기만 했다.

가족에게조차 인정받지 못하고 사랑받지 못하는 패트리샤.

마치 내 존재 자체를 부정당하는 기분이었다.

“짜증 나.”

돈만 모아서 나가겠다고 그렇게 다짐했는데.

지금은 그것도 잘 모르겠다.

아무것도 모르겠다.

정말 돈을 모을 수 있을지. 나갈 수 있을지.

이들과 연을 끊을 수 있을지.

모르겠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했던 말로 미루어 보면 날 팔아넘기고 금전을 받으려는 것처럼 보였다.

그런 그가 날 순순히 놓아주긴 할까?

억지로 팔아버리는 건 아닐까?

만에 하나 이 집에서 나가게 된다면 평생을 도망자로서 살아야 하는 건 아닐까?

탁.

“하아….”

방문을 닫음과 동시에 다리에 힘이 풀렸다.

바보같이 그 수모를 겪고도 그들에게 사과를 받진 못할망정 내가 먼저 고개 숙이고 사과했다.

현실이 두려워서.

쫓겨난다면 하는 두려움과 막막한 앞길에 고개 숙였다.

미친 듯 자존심이 상했다.

“…….”

그래도 어둡지 않은 방에 조금은 마음이 놓였다.

만약 방이 깜깜했다면 그대로 울어버렸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래, 울지만 않으면 됐어.

그들 때문에 눈물 흘린다면 그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혼자 울어야 하는 게, 아무도 위로해 줄 이 없다는 게 너무 불쌍하지 않은가.

똑똑.

“공녀님, 저예요.”

별 이상한 논리로 스스로를 다독일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저예요, 카를로스.”

“아….”

나는 혼자 있고 싶단 생각을 하면서도 별 고민 없이 문을 열어버렸다.

“어쩐 일이야?”

“이거.”

카를로스가 꽃다발을 불쑥 내밀었다.

“이게 뭐야?”

“꽃을 좋아하신다길래.”

“내가?”

카를로스에게 그런 말을 한 기억은 없었다.

또 그렇게 꽃을 좋아하는 성격도 아니었고.

내가 고개를 갸웃하자 카를로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엠마 시녀님이 그러셨는데. 항상 꽃을 사와 병에 꽂아두셨다고.”

카를로스가 나를 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요즘은 바쁘셔서 못하시는 것 같다길래….”

“아…. 맞아.”

왠지 실망한 듯한 카를로스의 모습에 나는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게서 꽃을 받아들었다.

“으음….”

장미와 해바라기의 어색한 조화에도 나는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평소라면 더 자연스럽게 연기할 수 있었을 텐데, 지금은 그게 좀 어려웠다.

“마음에, 안 드세요?”

“아냐. 너무 예쁜걸?”

그러나 카를로스를 속이기엔 역부족이었던 듯했다.

“죄송해요. 마음에 안 드시면 버리셔도 돼요.”

아이가 상심한 듯 고개를 푹 숙였다.

언뜻 보이는 카를로스의 얼굴이 점차 붉게 변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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