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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1화 (2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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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니야, 카를로스! 너무 예뻐! 마음에 들어!”

나는 뒤늦게 아차 싶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주 말라비틀어질 때까지 꽂아둘 거야!”

그제야 카를로스가 고개를 들었다.

“정말로!”

카를로스의 입가에 옅은 미소가 그려졌다.

적게 벌어진 그 입술 사이로 카를로스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어? 옷이….”

“아….”

카를로스의 웃음을 보고서야 그의 더러워진 옷이 눈에 들어왔다.

“옷이 더러워졌네.”

“아, 이건….”

카를로스가 멋쩍은 듯 제 셔츠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손은 또 왜 그래?”

아이의 하얀 손에 붉은 생채기가 꽤 많이 보였다.

“괜찮아요. 꽃을 꺾으려다 조금 긁힌 것뿐이에요.”

카를로스는 뒤늦게 제 손을 등 뒤로 숨겼으나 이미 다 본 후였다.

“조심하지.”

“…….”

“이리 들어와. 소독만 하자.”

나는 그가 들어올 수 있도록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그러자 방 밖에 서 있던 카를로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방 안으로 걸음을 옮기었다.

“이건 어디서 꺾은 거야?”

“…비밀이에요.”

비밀.

혹시나 카를로스가 다른 이의 정원에 들어가 꽃을 꺾어온 건 아닐까 잠시 걱정됐다.

하지만 비밀이라는 말에 구태여 캐묻지는 말기로 했다.

“제가 지금은 돈이 없어서 이런 것밖에 못 드리지만 조금만 기다려 주시면 더 좋은 것들로 드릴게요.”

카를로스를 앉혀놓고 약상자를 찾으려 서랍을 뒤적거릴 때 카를로스가 말했다.

한껏 진지해 보이는 아이의 얼굴이 귀여워 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혹시나 그의 기분이 상할까 애써 참아냈다.

“얼마나 기다리면 돼?”

“…오 년? 아니 삼 년?”

“그래? 근데 더 좋은 걸로 뭘 줄 건데?”

“원하시는 건 다요.”

“치, 나 욕심 많은 데 정말 괜찮겠어?”

그 물음에 카를로스는 잠시도 고민하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죠. 제가 돈 많이 벌게요.”

“그래. 기대할게.”

카를로스의 그 말에 어쩐지 웃음이 나왔다.

이번엔 애써 노력하지 않아도 자연스러운 웃음이 나왔다.

“근데 무슨 일 있으세요?”

“음? 왜?”

“표정이 안 좋으신 것 같아서요.”

걱정스러운 카를로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조금 힘들었는데 덕분에 괜찮아.”

카를로스가 가져다준 꽃을 턱짓하자 아이의 시선이 잠시 그곳으로 향했다.

“정말요?”

“정말.”

정말 혼자 있고 싶었다는 생각을 잊어버릴 만큼 괜찮아졌다.

웃어 보이는 것도 처음만큼 그리 어색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카를로스의 말이 진심인지는 알 수 없었다.

그러나 나를 관심 있게 지켜봐 준 카를로스에 그저 고마울 따름이었다.

“혹시 아프면 말해.”

“네.”

그래.

이곳에 온 지 이제 두 달째였다.

한데 벌써부터 날 이토록 걱정해 주고 신경 써 주는 이가 있지 않은가.

그러니 괜찮았다.

나는 카를로스의 작은 손을 붙잡고 성심껏 소독하고 약을 발라주었다.

“카를로스.”

“네?”

“네가 한 약속 꼭 지켜야 해. 난 벌써 기대 중이니까.”

게다가 내게 그 약속을 한 이가 다름 아닌 카를로스였다.

제국 최고의 검사가 될 카를로스가 약속해줬다.

원하는 건 다 주겠다고.

그래, 벌써 목숨은 건진 거나 마찬가지였다.

“네, 좋아요.”

잠시 놀란 듯 동그래졌던 카를로스의 눈이 찰나의 순간 곱게 접혔다.

아이의 웃음소리에, 조금 마음이 편해지는 듯했다.

* * *

게르하르트 공작저.

똑똑.

로렌스의 명을 알아보러 나갔던 시몬이 돌아왔다.

“소공작님.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주치의에게 진료기록을 알아봤지만, 근간 패트리샤 공녀께서 진찰을 받은 기록은 크게 없었습니다.”

“크게 없었다고?”

“네. 한 달 전쯤 계단에서 구르신 일로 진찰을 받긴 하셨지만 가벼운 타박상이었다고 합니다.”

“한 달 전?”

로렌스가 눈살을 찌푸리더니 달력을 뒤적거렸다.

“혹 그날이 7월 10일인가?”

시몬이 제 수첩을 펼치더니 그 제 글씨를 살폈다.

“어? 맞습니다.”

시몬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그건 대체 어떻게 아셨습니까?”

“하아…. 그날부터군.”

“네? 뭐가….”

“패트리샤가 찾아오지 않던 날의 시작 말이야.”

“아….”

시몬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혹시 그걸 다 기록해 두셨습니까?”

“시몬.”

로렌스가 작게 경고하자 시몬이 재빨리 입을 다물었다.

“기록해 둔 게 아니라, 이날 다른 일이 있어서 그냥 기억하는 것뿐이야.”

“네, 그랬군요.”

시몬은 로렌스의 말을 믿지 않는 눈치였으나 로렌스도 시몬도 구태여 그 사실을 집어내지는 않았다.

“혹 그 주치의가 사실을 숨기는 건 아니고?”

“으음…. 아닌 것 같았는데.”

“계단에서 굴렀다고?”

“네.”

“그 사고로 뇌를 다치거나 그런 건 아니고?”

“그런 말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시몬의 보고에도 로렌스는 의심의 눈초리를 치우지 않았다.

“다시 헤라르일라가의 사용인들에게 알아 와봐. 뭐 달라진 게 있는지, 그날 이후로 이상한 게 있는지.”

“어째 패트리샤 공녀가 다쳤길 바라는 것 같으신데…. 제 착각이죠.”

“그만 나가.”

로렌스가 더는 시몬과 같이 있고 싶지 않은 듯 문을 가리키며 명했다.

“넵.”

시몬은 그 명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며 서둘러 응접실을 빠져나갈 뿐이었다.

탁.

방문이 닫히고 홀로 남은 로렌스는 작게 혀를 굴렸다.

“계단 사고라.”

그 사고 이후 패트리샤는 한 달 동안이나 절 찾아오지 않았다. 그리고 한 달 만에 찾아와서는 더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며 목걸이를 돌려주었다.

그후, 제가 오라고 말한 날이 아니면 정말 먼저 찾아오지 않았다.

그 사고 이후 패트리샤가 변했다.

과연 우연일까?

타박상. 그렇게 작은 상처는 패트리샤가 한 달 동안이나 절 찾아오지 않을 이유가 되지 못했다.

적어도 뼈가 부러졌다거나….

그 정도는 돼야 패트리샤가 찾아오지 못한 까닭을 납득할 만했다.

아니면 그 사고 전후에 심경의 변화라도 겪을만한 일이 있었던 건 아닐까?

“하아….”

이유 모를 패트리샤의 변화가 여간 신경 쓰이는 게 아니었다.

* * *

쾅!!

얼마나 문을 세게 열었는지 활짝 젖혀지던 문이 벽과 부딪혀 굉음을 만들어냈다.

“악!”

예상치 못한 소음에 깜짝 놀라 어깨가 절로 떨렸다.

“하?”

사람을 놀라게 했으면서. 조금의 예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불청객은 한없이 당당하기만 했다.

모르간과 그의 뒤에 서 있는 바버였다.

“감히 우리 식구를 그렇게 무시하고 혼자 평온한 시간을 보내?”

조금 전 다이닝룸에서 있었던 일을 따지러 온 모양이었다.

모르간의 시선이 카를로스에게 닿았다.

“그 새끼는 뭐야?”

“괜한 시비 말고 할 말이나 하고 가.”

“싸가지 없는 계집. 또 명령 질이지?”

모르간은 화가 잔뜩 난 듯 저벅저벅 걸어왔다.

그리고는 순식간에 카를로스의 목덜미를 잡아챘다.

“하, 뭐 둘이 소꿉놀이라도 하나 보지?”

모르간이 카를로스의 얼굴과 테이블에 늘어져 있는 약품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알만하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체구가 작은 카를로스는 손쉽게 모르간의 손에 들렸다.

“뭐 하는 거야? 아이나 나 줘.”

“얼굴은 반반하게 생겼는데….”

내 말에도 모르간은 못 들은 체, 카를로스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우리 가문의 하인인가?”

그의 입꼬리가 비열하게 씩 올라갔다.

“크큭. 너랑 잘 어울리네. 패트리샤.”

모르간이 킥킥거리더니 보란 듯이 카를로스를 흔들어댔다.

카를로스는 목이 조이는 듯 힘겹게 켁켁 거릴 뿐이었다.

“이 미친!”

퍽!

모르간의 어깨를 밀치자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난 카를로스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나한테 볼일 있었던 거 아냐? 나한테 얘기해.”

얼핏 본 카를로스의 눈에 눈물이 고인 듯했다.

“괜히 약한 애 건들지 말고.”

“하? 이게 또 명령이네. 그래. 네가 원하는 대로 해줄게.”

모르간이 씩씩거리며 내 멱살을 부여잡았다.

마음 같아서는 나도 그의 부스스한 머리칼을 부여잡고 싶었지만 그러면 괜히 일만 더 커질 뿐이었다.

이곳에 내 편은 없었기에 가만히 있을 수밖에 없었다.

“공녀님!!”

만에 하나 소동을 부리다 카를로스에게까지 피해가 갈까 싶어 가만히 있었다.

퍽!

모르간이 주먹을 휘둘렀고 누군가 끼어들었다.

동시에 난 바닥으로 내팽개쳐졌다.

“뭣들 하시는 겁니까!”

“공녀님!”

모르간의 다리를 붙잡고 있던 카를로스가 넘어진 내게 다가왔다.

“이게 뭐 하시는 겁니까? 주먹질이라니요!”

“뭐야? 집사, 왜 끼어들어!”

모르간의 주먹에 맞기 전 집사가 끼어들었고 덕분에 맞지는 않았다.

“도련님. 여기까지 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하! 저 계집 편을 드는 건가? 내가 교육할 게 남았으니 괜한 참견 말고 나가!”

모르간은 날 때리지 못한 게 못내 분한 듯 씩씩거렸다.

그러나 집사도 물러날 생각은 없는지 모르간의 어깨에 손을 올린 채 가만히 서 있을 뿐이었다.

“…….”

“공작님께서 아가씨를 부르셨습니다.”

“젠장.”

그제야 모르간이 작게 혀를 차며 고개를 돌렸다.

“넌 다음에 보자.”

그리고는 씩씩거리며 방을 나섰다.

“하아….”

집사는 작게 한숨을 흘리더니 제 왼쪽 어깨를 손으로 집었다.

모르간을 막느라고 그의 주먹에 나 대신 맞은 곳이었다.

“…괜찮으세요?”

카를로스는 정작 맞은 집사는 신경도 쓰지 않은 채, 내게 다가와 한껏 겁먹은 듯 울먹이면서도 내게 그리 물었다.

나는 그를 안심시키려 고개를 끄덕이었다.

“공녀님, 그만 일어나십시오.”

“아, 네.”

집사의 말에 나는 서둘러 바닥에서 일어났다.

“저….”

“공작님께서 부르셨습니다. 가시죠.”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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