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2
그에게 고맙다 인사하려 입을 열었으나 집사는 내 말을 끊고 걸음을 옮겼다.
“아….”
그의 표정을 보아하니 조금 화가 난 것 같았다.
나는 카를로스에게 방으로 돌아가라며 작게 인사하고는 서둘러 집사를 따라 걸었다.
저벅저벅.
“…….”
저녁의 복도는 꽤 어두웠고 고요한 그 복도 위로 걸음 소리만 간간이 들려올 뿐이었다.
“저, 죄송해요.”
“……”
그 고요를 깨기가 꽤 어려웠지만 나는 애써 입을 열었다.
하지만 그 노력에도 집사는 답이 없었다.
그저 같은 속도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저 때문에 괜히 맞으시고 괜찮으세요?”
“…….”
“그냥 두셔도 됐을 텐데.”
순간 집사가 걸음을 멈춰 섰고 그의 뒤를 따라 걷던 나도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그냥.”
“네?”
“요즘 좀 바뀌신 듯합니다.”
집사는 여전히 내게 등을 보인 채 말을 이어나갔다.
“지난번 카를로스라는 그 아이 때도 그렇고. 그간 공녀님께 돈을 받았던 사용인들을 다 모으셨다고요.”
“……!”
집사가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집사가 알 수 없는 일까지 그는 고저 없는 목소리로 입에 담았다.
“오늘도 공작님과 도련님들에게 말대꾸하셨다고요.”
“그건….”
“그러지 마시죠.”
집사가 그제야 내게 제 얼굴을 보였다.
“그러지 마세요. 그저 전처럼 지내십시오.”
“무슨….”
“그게 아가씨에게 더 좋은 선택입니다.”
순간 당황해 눈살을 찌푸렸다.
집사가 왜 내게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그 의도를 알 수 없었다.
내게 좋은 선택이라니.
“그저 참고 견디십시오. 공작님께서 하시는 말에 순종하시고요. 그간 하시던 대로.”
“…….”
집사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이었다.
아니 평소보다 조금 기분이 안 좋은 듯 보였다.
날 안타깝게 보는 듯도 했고, 뭔가 답답해하는 듯도 했다.
“그만 가시죠. 공작님께서 기다리십니다.”
저벅저벅.
그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난 그를 따라 다시 걸을 수 없었다.
참아내라니. 그저 순종하라니.
내가 무슨 말을 들었는지 그는 알고 저런 말을 하는 것일까?
내가 왜 참아야 한다는 거지? 뭘 참아야 한다는 거지?
왜 집사는 내가 참는 게 당연하다는 듯 말하는 걸까?
내가 사용인들을 모았다는 걸 집사가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그 사실을, 공작에게까지 보고 했을까?
“…….”
집사가 재촉하듯 뒤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에게 왜 내가 참아야 하느냐고 따져 묻고 싶었으나 그저 입을 다물고 그를 따라 걸었다.
집사가 나 대신 모르간에게 맞았다는 사실에 미안해서였는지, 그가 알면 안 되는 사실까지 알고 있어 당황스럽기 때문인지, 내게 그 말을 하던 집사가 슬퍼 보였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
집사에게 내게 왜 그런 걸 요구하는지 따질 수 없었다.
어쩌면 참아냈던 눈물이 터져버릴까 두려워 입을 다문 것 같기도 했다.
* * *
똑똑.
“소공작님. 저 시몬입니다.”
“들어와.”
로렌스의 허락에 시몬이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원래라면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로렌스가 고개를 들 때까지 한참 기다렸어야 했을 텐데.
오늘은 웬일인지 문을 열자마자 그와 눈이 마주쳤다.
“패트리샤 공녀님에 대해 알아보았습니다.”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평소처럼 조금은 느린 동작이었다.
여유로운 그 동작에도 어딘지 시몬은 로렌스의 조급함을 느꼈다.
아무래도 그의 눈빛이 평소보다 날카로워 보였기 때문인 것 같았다.
무언의 그 압박에 시몬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사용인들의 말에 따르면 요새 패트리샤 영애가 더는 패악질을 부리지 않는다고 합니다. 또 이런저런 호의를 베푸신다고 합니다.”
“호의?”
“만난 사용인 중 세 명이나 공녀의 칭찬을 하더군요. 공녀님처럼 성품이 온화하신 분은 처음 본다면서 뭐 산책 도중 다리를 다친 새를 발견해 치료해 주셨다나? 또 구걸하러 온 노인에게 눈물을 글썽이며 돈을 쥐여주었다고도 했습니다.”
시몬이 사용인에게 들었던 말을 전하며 고개를 갸웃했다.
“왜 그러지?”
다친 새를 치료해 준다……. 어디 동화에나 나올 법한 얘기에 눈살을 찌푸리던 로렌스가 시몬의 의심 섞인 표정을 눈치채고 입을 열었다.
“뭔가 그 대답이 어색해서요.”
“어색하다니?”
“마치 그 자리에서 지어내는 말 같았습니다. 말을 더듬고 눈빛이 흔들리는 게 거짓말을 하는 것 같았습니다.”
“거짓말?”
로렌스가 제 턱을 쓸었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을 통해 패트리샤의 계략을 알아내는 게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고 그간 그들이 하는 말 중 거짓은 없었다.
그들은 그저 제 일상을 말할 뿐이었으니.
물론 사용인들에게 패트리샤가 호의를 부린다는 말이 믿기지 않는 건 저도 마찬가지였었지만, 믿기지 않는다고 그들이 거짓말을 한다고 단정 지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세 명이나 같은 말을 했다고 하지 않았는가.
그들이 뭘 위해 그런 거짓말을 했겠는가.
“처음엔 밑도 끝도 없이 패트리샤 영애의 칭찬을 늘어놓았습니다. 인품이 좋으시고 자비로우시며 항상 온유하다고 얘기하더군요.”
시몬이 그 상황을 떠올리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패트리샤 공녀가 착해졌다니. 믿을 수 없어 공녀가 자비를 베푼 사례를 알려달라 하니 심하게 말을 더듬더군요. 만약 실제로 목격한 상황이었다면 어려움 없이 말할 수 있었을 텐데 말이죠.”
“흐음.”
시몬의 말에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그들이 거짓을 말할 이유가 없지 않은가. 패트리샤를 싫어하는 그들이 그리 말할 정도면 정말 패트리샤의 행동에 감동했다는 거 아닌가?”
“그렇긴 한데….”
로렌스의 말에 시몬이 말끝을 흐렸다.
공작가의 사용인들이 패트리샤를 얼마나 싫어하고 무시하는지는 시몬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 그런 그들이 패트리샤를 위해 그녀에게 득이 될 거짓말을 지어낼 이유가 없었다.
그럼 왜 그리 수상하게 행동한 걸까?
마치 그 자리에서 말을 지어내던 사람처럼.
“…….”
“그래서 사고 이후 좀 착해졌다, 그게 끝인가?”
“네. 그걸 제외하면 평소와 달라진 점은 없다고 했습니다.”
시몬의 말에 로렌스의 눈빛이 깊어졌다.
뭔가 생각해보듯.
“…….”
“저 근데 한 가지 더 전할 게 있습니다.”
시몬이 잠시 머뭇거리다 침묵을 깨고 다시 입을 열었다.
“어제 헤라르일라 사이에 작은 다툼이 있었다고 했습니다.”
로렌스가 어서 말해보라는 듯 눈짓하자 시몬이 다시 입을 열었다.
“패트리샤 공녀가 공작의 말에 토를 달고 시비를 걸어 공작과 공자들이 화가 났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공작이 공녀를 다이닝룸에서 쫓아냈다고 들었습니다.”
“공작이 무슨 말을 한 건지는 모르는 건가?”
“예. 거리가 있어 대화의 내용을 자세히 듣지는 못했지만, 공작의 말을 끊고 공녀가 입을 연 순간 모르간 공자가 화를 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고 했습니다.”
그 말에 로렌스의 미간이 눈에 띄게 좁혀졌다.
“그래서 일이 그렇게 끝났나?”
“공자들이 후에 공녀를 찾아갔다고 했습니다. 공작도 따로 공녀를 불렀다고 했고요.”
“혹 맞거나….”
로렌스가 말끝을 흐렸다.
“그건 아닌 듯합니다.”
그제야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래. 알겠어.”
로렌스가 옅은 숨을 뱉어내더니 시계를 흘긋 바라봤다.
오후 여섯 시.
다른 가문에 방문하기엔 꽤 늦은 시각이었다.
“그만 나가봐.”
로렌스의 말에 시몬이 작게 고개를 숙이고는 집무실을 빠져나갔다.
“하아….”
그저 패트리샤가 바뀐 이유를 알고 싶었던 것일 뿐이었다.
그녀가 새로운 꿍꿍이를 품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로 마음이 바뀐 것인지, 혹은 아픈 건 아닌지 알고 싶었을 뿐이었다.
쓸데없이 그녀를 걱정하는 것도 고민하는 것도 그만하고 싶었기에.
“하아….”
그러나 시몬의 말에 전보다 그녀가 더 신경 쓰일 뿐이었다.
* * *
“소공작님. 요새 자주 뵙는군요.”
“공녀에게 미처 묻지 못한 게 있어서요.”
로렌스가 조금의 웃음기도 없는 무표정한 그 얼굴로 모르간을 빤히 바라보며 말했다.
“…….”
그의 눈빛에 어쩐지 적의가 가득했다.
모르간이 그의 시선을 견디지 못하고 슬며시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로렌스는 그의 얼굴에서 시선을 떼지 않았다.
모르간은 어색한 듯 제 뒤통수로 손을 가져갔다.
“아야야.”
그리고 그 순간 그가 한껏 얼굴을 찌푸리며 신음을 흘렸다.
모르간이 서둘러 제 뒤통수에서 손을 떼어냈다.
“모르간 공자, 왜 그러십니까?”
로렌스는 여전히 무표정한 얼굴로 모르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모르간은 여전히 작게 신음을 흘렸지만 애써 고개를 저었다.
“다치기라도 하신 겁니까?”
그러나 로렌스는 꼭 답을 듣겠다고 마음먹었는지 다시 한번 물었다.
“…예.”
“어쩌다?”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모르간의 답에 로렌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아니. 저런 바보 같은 대답이 어디 있단 말인가.
손이 살짝 닿은 것만으로도 아파하면서 어쩌다 다친 지 모르겠다니.
“자다가 떨어지기라도 한 겁니까?”
“아니, 아닙니다!”
로렌스의 얼굴에서 한심하단 표정을 읽었는지 모르간이 얼굴을 붉혔다.
그의 목소리가 조금 더 높아졌다.
“정원 구석에서 검술을 연습하고 있었는데 뭔가 날아와 머리를 때렸습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