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3화 (2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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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 뭐가 말입니까?”

“전 못 봤습니다.”

모르간이 답답하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혼자 있었습니까?”

“바버, 밀럼과 함께 있었지만, 그들도 뭐가 날아온 건지는 보지 못했습니다.”

“주변은 살펴봤습니까?”

뭔가 날라와 머리에 부딪혔다면 분명 바닥에 떨어졌을 테지.

그러나 모르간은 고개를 내저을 뿐이었다.

“딱히 이상할 건 없었습니다.”

“…….”

그 말에 로렌스가 눈살을 찌푸리자 모르간은 그가 절 걱정한다 여긴 모양이었다.

“너무 걱정은 마십시오. 아버지께선 검을 휘두르다 돌이 튀어 오른 듯하니 앞으로 조심하라 하시더군요. 저도 그렇게 생각하고요.”

“그럼 바버공자나 밀럼공자 둘 중?”

“아마 그런 듯한데 저들은 아니라고 하니.”

모르간이 어깨를 으쓱거렸다.

로렌스는 뭔가 이상했지만, 고개를 끄덕이었다.

대체 어떻게 검술 연습을 하길래 바닥에 있는 돌이 머리까지 튀어 오를 수 있는지 로렌스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지만, 그러려니 했다.

헤라르일라 공자들이 검에 소질이 없는 거야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었다.

“앞으로는 검술 연습은 조심하는 게 좋을듯하군요.”

로렌스의 그 말에 모르간이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저도 제 검술 실력이 형편없다는 건 아는 듯 민감히 반응했다.

“그 녀석들의 검술은 끔찍할 정도죠.”

모르간은 저와는 상관없다는 듯. 저는 다르다는 듯 태연히 말을 했다.

그러나 이미 새빨갛게 붉어진 얼굴과 흔들리는 눈빛은 그가 얼마나 이 순간을 창피하게 여기는지 확실히 보여주었다.

로렌스는 모르간을 더 건드릴까 하다 그만 고개를 끄덕였다.

“저 소공작님. 패트리샤가 늦을 듯한데 혹 함께 정원이라도 걸으시겠습니까?”

로렌스는 딱히 정원을 걷고 싶은 생각은 없었지만 잠시 고민을 하다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소공작님, 안녕하십니까.”

“아, 바버경.”

복도를 거닐던 중 바버 헤라르일라와 마주친 로렌스는 답지 않게 작게 말을 더듬었다.

로렌스의 시선이 바버의 얼굴에 닿는 순간 로렌스의 얼굴에 의문이 들었다.

“그럼, 편히 있다. 가십시오.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바버는 로렌스의 시선이 제 얼굴에 닿자 창피한 듯 말을 더듬더니 서둘러 자리를 떴다.

“모르간 경. 바버경은 왜….”

“아, 그게….”

모르간이 말을 더듬었다.

알고 있지만 답하기가 좀 어려운 듯 보였다.

“혹 바버경도 돌멩이에 맞은 건가요?”

로렌스는 그런 모르간의 반응에, 바버의 얼굴에 멍이 든 까닭을 알 수 있었다.

분명 모르간이 주먹을 휘둘렀을 테지.

“…네.”

그러나 모르간은 작은 목소리로 로렌스의 말에 동조했다.

차마 주먹을 휘둘러 동생의 얼굴에 멍을 들였다고는 말할 수 없는 모양이었다.

그게 창피한 행동이라는 건 아는 모양이었다.

“꼭 누구한테 맞은 것처럼 멍이 들었네요.”

검술 연습을 하다 저들끼리 치고받는 상황이라니.

그들의 얼빠진 모습이 떠올라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리가요.”

로렌스의 웃음에 모르간은 얼굴을 붉게 물들였다.

모르간은 혹 로렌스가가 저들의 치부를 눈치챘을까 걱정하면서도 그는 뻔뻔히 로렌스의 말을 부정했다.

“하!”

“소, 소공작님?”

로렌스의 바람 빠지는 듯한 웃음소리에 모르간은 당황스러운 듯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로렌스는 입꼬리를 삐뚜름하게 올린 채, 내렸던 시선을 올려 모르간을 흘긋 바라보았다.

그런 로렌스에 모르간의 표정은 점점 굳어갔다.

“하긴.”

한참 만에 로렌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주먹과 힘으로 모든 걸 다 해결하려는, 이만큼 우스운 이도 없고요.”

“…그렇지요.”

“순간이지만 공자가 주먹을 휘둘렀다고 생각했습니다.”

“…….”

“공자가 품위 없이 그런 행동을 할 리가 없지요.”

로렌스가 흘긋 모르간을 살펴보았다.

한껏 붉어진 그의 얼굴을 바라보던 로렌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 그렇지요! 품위 없이 주먹을 휘두르다니.”

모르간은 고개를 저어댔다.

“저잣거리의 못 배운 것들이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지요. 애초에 전 그런 자들과 근본 자체가 다릅니다. 한데 폭력이라니.”

모르간의 말이 조금 빨라졌다.

“전 지금껏, 단 한 번도 주먹을 휘둘러본 적이 없습니다. 소공작님.”

그 말에 로렌스가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입을 열었다.

“공녀가 왔으니 산책은 이쯤 하는 게 좋을 듯하군요.”

“아….”

그제야 모르간이 제 뒤에 서 있는 패트리샤를 발견했다.

패트리샤의 보랏빛 눈동자와 모르간의 눈이 마주치는 순간.

모르간의 얼굴선을 따라 땀이 방울져 떨어졌다.

“패, 패트리샤, 와 있었구나.”

“…….”

“…그,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모르간은 소매로 연신 땀을 훔치며 서둘러 정원을 빠져나갔다.

무표정하던 패트리샤의 입 모양을 읽어낸 모르간은 서둘러 자리를 뜰 수밖에 없었다.

‘정말? 단 한 번도?’

그곳에 더 있다간 창피를 면치 못할 듯했기에.

* * *

“소공작님, 여긴 어쩐 일로 오셨나요?”

나는 허둥거리며 도망간 모르간의 뒷모습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분명 아직 일주일도 채 지나지 않았는데.

엊그제도 분명 공작저에 방문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이틀 만에 또 무슨 볼일이 있다고 이렇게 찾아왔냐는 말이었다.

할 말이 있었으면 전에 왔을 때 다 하고 갈 것이지. 사람 귀찮게….

“……”

순간 로렌스의 얼굴이 조금 굳었다.

“바쁘시니 편지를 주셔도 됐을 텐데. 이렇게 찾아와주시다니, 몸 둘 바를 모르겠군요.”

“…….”

“혹 오래 기다리셨나요?”

혹 내 말이 따지듯 들려 그의 기분을 상하게 한 건 아닐까 걱정됐다.

다시 입을 열어 설명을 덧붙였다.

로렌스의 방문이 전혀 귀찮지 않다는 듯. 이렇게 방문해 줘 고맙다는 듯.

“…아니.”

“다행이네요! 전 소공작님이 혹여나 오래 기다리셨을까 봐 걱정했답니다.”

불순한 생각 따위는 해 본 적도 없다는 듯, 한껏 갸륵한 표정을 지어 보이며 나는 두 손을 맞잡았다.

“…….”

할 말이 있으면 어서 말할 것이지.

로렌스는 가만히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너, 바뀌었어.”

“…네?”

“바뀌었다고.”

저벅.

한 발자국. 그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의 붉은 눈동자는 어느새 깊이 가라앉았다.

마치 진실을 엿보려는 듯.

로렌스는 그렇게 한참 날 내려다보았다.

“무슨, 소리를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내겐 말해 줄 생각이 없구나.”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했다.

아마 동공도 흔들리고 있을 테지.

당황한 시선을 들킬 바에야 차라리 눈을 내리까는 게 나을 듯싶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그리고 그 순간.

텁.

그의 두 손이 내 고개를 부여잡았다.

“…네?”

그 낯선 손길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올렸다.

아니, 뭐 하는 거야?

로렌스는 한껏 진지한 얼굴로 내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그렇다고 로맨스에서 볼 법한 부드러운 쓰담쓰담은 결코 아니었고.

염원을 담아 돌하르방의 코를 쓰다듬는 사람들처럼, 그 엇비슷한 표정으로 조금 힘을 준 채 정말 꼼꼼히 내 머리통을 쓰다듬었다.

한껏 진지한 그 얼굴은 이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로렌스가 얼마나 진심인지를 절실히 보여주었다.

한참을 그리하다, 드디어 그가 내게서 손을 떼어냈다.

“뭐, 뭐 하신 거예요?”

“…머리에 뭐가 묻어서.”

아니. 변명도 뭐 이리 성의 없이 해?

차라리 손에 난 땀을 내 머리에 닦아냈다고 말하는 편이 더 신빙성 있을 듯했다.

“…제 머리에 뭐가 묻었었다고요?”

“응.”

로렌스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었다.

의심스럽다는 눈초리로 그를 바라봤으나 그는 별 신경도 쓰지 않는 눈치였다.

무심히 내 얼굴에 머물던 로렌스의 시선이 차츰 밑으로 내려갔다.

“……!”

설마.

순간적으로 얼굴이 찌푸려졌다.

나는 본능적으로 몸을 가린 채 몇 발자국 뒷걸음질 쳤다.

혹 그가 내게 다시 손을 뻗기라도 할까 봐.

“크흠! 아냐.”

로렌스의 얼굴이 순간 붉어졌다. 그러나 이내 그는 내게서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혹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말해.”

내게서 고개를 돌린 채 로렌스가 그리 말했다.

“…무슨?”

“너 하나 정도는 도울 수 있으니까 말하라고.”

“…….”

“그리고 무도회 의복은 블루 계열로 맞추자.”

어째서인지 로렌스의 눈빛에서 안타까움이 보였다.

나를 향한 감정일까?

평소보다 조금 더 찌푸려진 미간에, 옅은 한숨을 내뱉는 행동.

평소와 다른 듯한 모습에 쉬이 입을 열지 못하고 그를 바라봤다.

도통 이 대화의 흐름을 따라갈 수 없었다.

내가 변했다며 추궁하더니. 갑자기 남의 머리통을 쓰다듬고. 도움이 필요하면 제게 말하라며 정을 베풀다 이제 무도회 드레스를 블루 계열로 맞추라니.

아니, 그래서 여긴 또 왜 온 건데?

“도와주겠다는 말, 빈말은 아니니 맘 바뀌면 연락해.”

그리고 또.

또다시 도와주겠단다.

로렌스는 그 말을 마치고 등을 돌렸다.

갑자기 뭘 도와주겠다는 건지, 그에게 무슨 도움을 청해야 좋을지조차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도움.

그의 도움을 받을 수 있다면, 그가 내게 정을 베푼다면 딱 한 가지 부탁하고 싶은 게 있었다.

제발 사진을 잃어버린 그 일을 자비롭게 용서해 주길.

그에게 요청할 것은 딱 그거 하나였다.

한데 아무리 생각해도 그가 베풀려는 류의 도움이 이건 아닌 듯했다.

“하아….”

나는 멍하니 로렌스가 떠난 그 자리를 바라보다, 참지 못하고 한숨을 뱉어냈다.

로렌스는 이제 첫 만남 때처럼 날 싫어하거나 화를 내진 않았다.

그건 참 좋은 일이었다.

근데 갑자기 내게 왜 이런 관심을 둔단 말인가?

뜻 모를 소리를 해 불안하게 만들기나 하고.

그래, 변하긴 했지.

이제 더 이상 그를 쫓아다니며 귀찮게 하지도 않고, 그에게 같잖은 수작을 부리지도 않으니 말이지.

하지만 그건 그에게 좋은 일 아니던가.

“…….”

내가 그에게 바라는 또 다른 한 가지가 있다면, 이대로 내게 관심을 꺼주는 것이다.

그 사진 관련된 일만 끝나면.

그 일이 언젠가 끝난다면. 우린 그대로 멀어지면 될 사이였다.

“……”

대체 쟤 왜 저래?

나는 애써 불안감을 떨쳐 내보려 그의 온기가 남은 듯한 머리칼을 탈탈 털어냈다.

* * *

쾅!

“패트리샤!”

오늘도 모르간은 어김없이 내 방문을 벌컥벌컥 열어댔다.

뭐 그가 왜 온 것인지 대충 감은 왔다.

로렌스가 내게 뭐라 말한 건지 궁금하겠지.

“소공작과는 무슨 대화를 나눴지?”

“…….”

나는 애써 한숨을 참아냈다.

대체 내가 그걸 저에게 왜 말해야 한단 말인가?

아주 당당하게 요구하는 그의 모습에 어이가 없었다.

“드레스는 블루로 맞추재.”

하지만 그걸 따져봤자 모르간은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할 게 분명했다.

그는 말이 통하지 않는 사람이니.

그래서 대충 말해도 될 만한 정보를 넘겨주었다.

“다른 말은? 다른 말은 안 했어?”

그러나 저 멍청이는 도통 만족하는 법이 없었다.

나는 말없이 어깨만 으쓱이었다.

“뭐야? 그 동작은?”

“우리 싸우지 않았나? 설령 그러지 않았다 해도 너와는 대화를 나누고 싶지 않아. 지금처럼 한 공간에서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토가 나올 것 같아.”

“뭐! 이 계집이!”

모르간은 열 받은 듯 씩씩거렸다.

“저잣거리의 못 배운 것들이나 힘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드는 것이지요. 애초에 전 그런 자들과 근본 자체가 다릅니다. 한데 폭력이라니.”

“…….”

한껏 몸을 부풀린 채 위협이라도 하려는 듯 다가오던 모르간의 발걸음이 그대로 멈췄다.

“전 지금껏 단 한 번도 주먹을 휘둘러 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비아냥댄다는 걸 눈치챘는지 모르간의 얼굴이 더욱 붉어졌다.

“그럼 저번에 집사에게 행한 건 폭력이 아니었나 보네?”

“그땐!”

“못 배워서 폭력이 뭔지 구분을 못 하는 거야? 아니면 소공작님께 거짓말한 건가?”

모르간의 눈동자가 불안하게 흔들렸다.

내가 그곳에 있는 줄은 저도 몰랐었겠지.

“아니면 소공작님께 물어볼까? 그날 네가 집사에게 행한 게 폭력인지 아닌지 말이야.”

모르간은 분한 듯 덜덜 떨면서도 착실히 고개를 저었다.

솔직히 말해 이렇게까지 고분고분하게 나올 줄 몰랐다.

그저 골려주기 위해 꺼낸 말이었는데, 모르간은 약점이라도 잡혔다는 듯 저자세로 나왔다.

‘왜 저래?’라는 생각은 들었지만, 그와 시간을 더 보내며 그 이유를 알아내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저 그와 있는 지금 이 시간을 서둘러 끝내고 싶을 뿐이었으니.

“그래, 뭐 그렇게 해줄게.”

“…….”

나는 선심 쓰듯 그리 말했다.

어차피 로렌스에게 속 시원히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고.

로렌스에게 그런 걸 물을 정도로 친하지도 않았으니.

내가 그만 나가보라는 듯 턱짓하자, 모르간은 내 말에 순순히 걸음을 옮겼다.

“근데 모르간, 모르는 듯해 말해주는 데 다른 사람 방에 들어올 땐 노크를 하는 게 예의야. 가장 기본적인.”

“…….”

모르간의 주먹 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그는 소리라도 지를 기세로 날 노려봤지만, 이내 방문을 열고 나가버렸다.

쾅.

생각보다 쉽게 모르간을 쫓아낸 나는 지금의 승리에 기뻐하면서도 그의 태도에 대한 의아한 마음을 완전히 지워내지 못했다.

모르간은 로렌스를 꽤 어려워하는 듯했다.

왜 저렇게까지 어려워하는 걸까?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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