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4화 (24/67)

24

사각, 사각.

어두운 방 안에서는 작은 시계 소리와 글 쓰는 소리만이 들려왔다.

“하아….”

그리고 간간이 깊은 한숨 소리도.

타악.

몇 시간쯤 그렇게 머리를 쥐어뜯었을까?

더는 답답함을 참지 못한 나는 쥐고 있던 펜을 집어 던졌다.

“진짜 미치겠네?”

답답한 마음에 다시금 한숨을 뱉어냈다.

내 손에 쥐여진, 글씨가 빼곡히 들어찬 종이.

앞으로 2년 후 시작될 일들이 적혀있는 종이를 다시 한번 세세히 들여다보았다.

여자주인공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오며 소설은 시작된다.

무너진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제 가문에 투자해줄 이들을 찾아, 아르세르는 무작정 수도의 귀족들을 찾아간다.

그 과정에서 헤라르일라 공작저도 찾아오는데, 하필 여주가 그날 만난 이는 정원을 산책 중이던 패트리샤였다.

아르세르의 무엇이 패트리샤의 심기를 거슬렀는지는 알 수 없으나 패트리샤는 여주의 뺨을 후려치고, 그녀에게 모욕적인 언사도 서슴지 않았다.

그렇게 몹쓸 짓을 당하고 쫓겨난 아르세르는 마지막으로 게르하르트의 공작저까지 찾아간다.

패트리샤에게 뺨을 맞은 여자와 패트리샤의 스토킹으로 고생하는 남자는 서로 전우애를 느꼈다.

로렌스는 아르세르에게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패트리샤를 제게서 떨어뜨려 준다면 그녀의 가문에 투자해주겠다고.

그러자 아르세르는 계약 결혼을 제안한다.

패트리샤가 그에게서 완전히 떨어지고 제 가문이 입지를 다지면 그때 이혼하는 것을 조건으로.

그날부터 아르세르는 로렌스의 모든 일정에 함께했다.

둘은 서로 사랑에 빠진 척 연기했으며 곧바로 결혼을 약속했다.

“하아….”

그리고, 패트리샤의 불행이 시작되었다.

질투에 눈이 먼 패트리샤는 무도회에 로렌스의 목걸이를 하고 나갔다.

로렌스 어머니의 유품인 바로 그 목걸이 말이다.

정상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이라면 결코 할 수 없는 일이었겠지만, 패트리샤는 말 그대로 질투에 눈이 먼 상태였다.

솔직히 패트리샤가 애초에 정상적인 사고를 할 수 있는 사람이었는지도 의문이긴 하지만.

아무튼 패트리샤는 아르세르에게 제 목걸이를 자랑했다.

로렌스와 제가 이리 가까운 사이라는 걸 아르세르에게 보여주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결국 훔친 목걸이를 자랑하다 로렌스에게 들키고 말았다.

“하아, 내가 다 쪽팔리네.”

제 어머니의 유품.

그걸 훔쳐 간 도둑의 뻔뻔한 행동에 머리끝까지 화가 난 로렌스는 그 자리에서 패트리샤가 제 목걸이를 훔쳐 갔음을 공공연하게 알린다.

패트리샤는 한순간에 도둑으로 몰리고, 그녀의 평판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아름다운 얼굴과 공녀라는 이유로 한때 사교계의 꽃으로 불렸던 패트리샤는 그 상황을 견딜 수 없었다.

그녀는 제가 이리 된 게 모두 아르세르 때문이라 생각했고 결국 그녀를 죽이려 한다.

아르세르를 죽이는 데에 실패하고 도망자 신세가 된 패트리샤는 그렇게 카를로스 손에 죽임 당한다.

“하아….”

뭐, 로렌스와 아르세르는 당연하게도 해피엔딩이다.

처음 맺었던 계약은 끝이 났지만, 로렌스는 제가 아르세르를 이미 사랑하게 됐음을 깨닫는다.

그의 힘이 아르세르 곁에선 완전히 통제된다는 게 그 이유였다.

여기서 말하는 힘이란 게르하르트 가문만의 고유한 마력 같은 것이었다.

오직 게르하르트 가문 사람들에게만 전해 내려오는 힘.

그들이 그 힘을 얻게 된 이유는 초대 게르하르트가 블랙드래곤이었기 때문이라나, 뭐라나.

초대 게르하르트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며 더는 그 힘을 타고나는 사람이 없어졌다.

하지만 약 7세대 만에 다시금 그 힘이 로렌스에게 나타났다.

“하아….”

로렌스가 얼마나 강한지는 그리 궁금하지 않았다.

정말 궁금한 건.

“소설에선 이러지 않았잖아.”

소설 속에선 로렌스가 패트리샤에게 제 어머니의 사진을 찾아내라 말하지 않는다는 거였다.

“대체 뭐야….”

소설 속에선 목걸이에 사진이 들어있었던 걸까?

아니, 어떻게?

패트리샤의 온 방을 다 뒤져보았지만 사진 같은 건 구경해 보지도 못했다.

패트리샤가 다른 곳에 숨겨 놓은 걸까?

아니. 대체 왜? 뭘 위해서!

“…….”

아니면 로렌스가 그냥 포기한 건 아닐까?

패트리샤를 만나 사진을 내놓으라 말하는 것, 패트리샤를 그렇게 만나는 것조차 싫었던 게 아닐까?

그래서….

…그럴 리가 없지.

“하아….”

대체 그 사진을 어디서 찾으면 좋을지, 답답해 미칠 지경이었다.

우선 소설 속에서 로렌스에게 돌아간 그 목걸이 안에 사진이 들어있었을지부터가 난제였다.

“진짜 그걸 어디서 찾냐고.”

아무리 머리를 굴려봐도 그 사진을 찾는 건 불가능이었다.

“하아….”

이제 며칠 후 또 로렌스가 찾아올 테지. 그 사진의 행방을 물으러.

못 찾았다고 답하는 것도 한두 번이지. 이제 다른 답을 내야 할 때였다.

“…….”

그러나 다른 답을 내고 싶다고 낼 수 있을 리가.

“아악, 짜증 나!!”

애석게도 절규해봤자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 * *

똑똑.

“공녀님.”

방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나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에 거의 다다랐을 무렵 다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예요, 카를로스. 잠시여도 좋으니 문 좀 열어주세요.”

카를로스의 목소리에서 왠지 모를 간절함이 느껴졌다.

“카를로스?”

오랜만에 보는 카를로스는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얼굴이 하얘서인지 눈 밑에 자리한 그늘이 더욱 짙게 보였고 입술도 조금 터 있었다.

“얼굴이 왜 그래? 어디 아파?”

혹 모르간이나 바버가 카를로스에게 피해를 줄까 봐 며칠간 그를 만나지 않았다.

사흘 만에 만난 카를로스의 얼굴을 본 순간 눈살이 찌푸려졌다.

“아니. 괜찮아요.”

“혹 모르간이 널 찾아갔니?”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물었다.

그날 그렇게 내 방에서 빠져나간 후로 모르간은 더 이상 내게 시비를 걸지 않았다.

설령 복도에서 마주친다고 하더라도 그저 모른 채 무시하고 제 갈 길을 갈 뿐이었다.

설마 나 대신 카를로스를 괴롭힌 걸까?

“아니에요.”

걱정에 눈살이 찌푸려질 때쯤, 카를로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그럼 왜 이렇게 얼굴이 상한 거지?

“그저 요새 잠을 잘 못 자서.”

한참 만에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왜? 왜 잠을 못 자?”

잠을 못 잔다는 말에 안타까워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쓸어넘겨 주었다.

그러자 카를로스가 작게 움찔했다.

“고민 있니?”

“그게 아니라.”

카를로스는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냥, 얼마 전부터 그러긴 했는데 다리가 아파요.”

“다리가? 왜?”

“저도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걱정하실 필요 없어요.”

카를로스는 별일 아니라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댔다.

그리고는 바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녀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저 때문에 괜히, 맞을 뻔하고. 공작님께 불려가셨잖아요.”

“아니야. 잘 끝났어.”

걱정 어린 카를로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내저었다.

아무래도 카를로스는 이걸 물어보려 날 찾아온 듯했다.

그날 공작에게 불려가 두 시간이 넘도록 설교를 빙자한 분풀이를 들어야 했지만.

어쨌거나 잘 끝났다.

그래, 나도 욱하는 성격 좀 고쳐야 했다.

화를 낸다고 해결될 일은 아무것도 없었는데.

괜히 욱하는 걸 참지 못하고 일을 치러 난감해질 뻔하지 않았는가.

아쉽게도 난 아직 이곳을 나가서 자립할 만한 여건이 안됐다.

“며칠 동안이나 뵐 수 없어서 걱정 많이 했어요.”

“걱정시켜서 미안.”

“…저도 공녀님께 도움이 되고 싶었는데.”

카를로스는 무거운 한숨을 뱉어냈다.

“저는 해드릴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어요. 전 그저 어린 시종일 뿐이니까요.”

카를로스는 정말 슬픈 듯 제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의 모습은 어딘지 분한 듯도 보였다.

“공녀님께서 제게 그리해주시는 것처럼 저도 도움이 되고 싶은데….”

“카를로스, 넌 이미 충분….”

“저 멋진 사람이 되고 싶어요!”

갑자기 카를로스가 고개를 바로 들었다.

마주한 그의 눈동자는 다분히 진심인 듯했다.

결의에 가득 차 있지만, 그러면서도 제 소망이 짓밟힐까 무시당할까, 결국 창피당하게 될까 두려운 듯 잘게 떨리고 있었다.

“져 기사가 되고 싶어요!”

아이는 기어코 제 꿈을 입에 담았다.

여전히 그 눈은 창피당할까 두려운 듯 보였지만, 그럼에도 아이는 제 꿈을 당당히 입밖으로 꺼냈다.

그만큼 날 믿는 걸까?

그만큼 제 꿈에 진심인 걸까?

“응! 꼭 될 수 있을 거야.”

나는 그가 무안하지 않도록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정말 기사가 될 수 있을까요?”

“그럼!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거야.”

그제야 아이의 입가에 해맑은 미소가 드리웠다.

“저 정말 열심히 할 거예요.”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이 아이는 기사가 되겠다던 제 말보다 더 큰 꿈을 이뤄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것이다.

“그래.”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자 그가 기분 좋은 듯 내 손에 제 머리를 맡겼다.

“그보다, 다리가 아프다면 의원을 보내줄게. 진찰 좀 받아보자.”

한참 그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다 입을 열었다.

“그리고 네게 검술을 가르쳐 줄 만한 사람도 찾아봐 줄게.”

카를로스가 어떤 경로로 검술을 시작하게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모든 건 정해진 대로 움직이고 있었다.

카를로스는 소설에서 읽은 것처럼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겠지.

카를로스 또한 소설의 시작을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그의 결 좋은 머리칼이 손가락 새로 흘러나갔다.

내가 변했으니 죽음은 면할 수 있겠지, 생각하면서도 정해진 운명대로 움직이는 카를로스의 모습에 어째서인지 조금 마음이 조급해졌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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