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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엠마.”
“네, 공녀님.”
“마차 좀 준비해줘.”
한참을 기다려도 대답이 들려오지 않아 고개를 들었더니 엠마가 입술을 깨물고 있었다.
“나가시려고요?”
“응.”
“어딜….”
다시 보니 엠마는 어딘지 불안해하고 있었다.
“안 그래도 지금 공작님께서 화나신 상태인데. 몇 주만 얌전히 지내시는 건 어떠실까요.”
내가 공작에게 불려가 혼난 그 날을 떠올린 듯 엠마가 눈살을 찌푸렸다.
“안 들키면 되잖아. 지금까지 들킨 적도 없고 말이야.”
“그건 그렇긴 하지만….”
“소공작님을 만나기 전까지 확인해야 할 게 있어서 그래. 마차 좀 준비해줘.”
내가 뜻을 바꾸려 하지 않자 그제야 엠마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공녀님. 그럼 마차를 준비하겠습니다.”
“그래, 고마워.”
탁.
엠마가 방을 나간 후 나는 옷을 갈아입었다.
레이스가 치렁치렁한 화려한 옷이 아닌, 무난한 린넨 원피스로 갈아입었다.
그렇게 모자까지 챙기니 엠마가 다시 돌아왔다.
“공녀님, 준비해 두었습니다. 바로 출발하셔야 합니다.”
“고마워, 다녀올게.”
* * *
“어디로 모실까요?”
“아스의 사진관으로 가주세요.”
마차에 타기 전 마부에게 말을 전했다.
아스의 사진관.
내가 알아본 바로는 수도에서 가장 유명한 사진관이라 들었다.
아마 로렌스의 어머니도 그곳에서 사진을 찍었으리라.
어쩌면 그곳에서 내가 찾는 걸 얻을 수 있을지도 몰랐다.
그래, 그 사진관이 사진의 복사본을 갖고 있을지도 몰랐다. 아니면 필름이라도.
이 세계의 사진 기술이 얼마나 발전했는지는 모르겠지만, 이제 믿을 건 사진관밖에 없었다.
“…….”
사실대로 말하자면 확신이 서지 않았다.
그곳에서 뭔가 얻을 수 있다는 확신이.
하지만 패트리샤의 방을 다 뒤져도 나오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니 아스의 사진관, 그곳이 마지막 희망이었다.
다그닥, 다그닥.
평민들이 타는 마차는 작은 돌부리에도 내부가 크게 흔들렸다.
게다가 마차의 나무 의자는 딱딱하기만 할 뿐, 조금의 쿠션감도 없었다.
그 예민한 패트리샤가 이 모든 악조건을 견디고 매일같이 로렌스를 찾아갔다니.
패트리샤가 로렌스를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 만했다.
“하아….”
어쨌거나 로렌스와의 관계는 최대한 빨리 정리해야 했다.
로렌스가 날 배려해준답시고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찾아와주는 건 고맙지만, 괜히 그 때문에 쓸데없는 관심을 받는 게 싫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헛된 꿈으로 날 들들 볶는 것에도 이제 화가 날 지경이었다.
내가 좀 더 품위 있게 말하고 우아하게 걸으며 더 아름다워지면 로렌스가 나와 결혼이라도 해줄 거라고 생각하며 그는 사사건건 잔소리를 시작했다.
걸을 때 보폭을 좀 더 좁히라든가, 음식은 아주 작게 잘라 입에 넣으라는 둥, 하다 하다 피부가 푸석해 보인다는 외모 지적까지.
로렌스가 무작정 찾아왔던 그 날도 헤라르일라 공작의 잔소리는 더욱 심해졌다.
그와 무슨 얘기를 나눈 것인지.
왜 그를 그리 빨리 보낸 것인지.
내가 보내긴 뭘 보낸단 말인가, 그저 로렌스가 제 할 말을 마치고 가버린 것을.
헤라르일라 공작은 내가 주어진 기회도 잡을 줄 모르는 바보라며 한참 악담을 퍼부었다.
로렌스가 한 번만 더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방문한다면 그날로 나는 자는 순간까지 헤라르일라 공작의 잔소리를 들어야겠지.
어쩌면 잘 때는 입을 꼭 다물고 정자세로 누워 자야 한다며 가르치려 들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 일을 상상하자 머리가 아파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다는 건 알지만, 내게 무도회 파트너 신청을 했다는 그의 거짓말에 괜히 일만 복잡해졌다.
“하아….”
그래도 내 그간 악행을 말하지 않고 파트너 신청했다는 거짓말을 한 게 더 나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 다 내 잘못이지.”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사이 마차가 점점 속도를 줄이기 시작했다.
히이잉.
말의 그 울음이 목적지에 도착했음을 알렸다.
“앞으론 정말 착하게 살 테니, 부디!”
사진관의 건물을 올려다보며 나는 간절히 두 손을 모았다.
* * *
“하아….”
돌아오는 마차 안, 아쉽게도 내 손 안에는 그 무엇도 들려있지 않았다.
“뭘 기대한 거야.”
아스는 공작부인의 사진은 은판사진이라 원본이 있어도 복제는 불가능하다고 말했다.
아니, 대체 은판사진이 뭔데.
살다 살다 사진의 발전과정을 몰라 억울할 일이 있을 줄은 몰랐는데, 날 바보 취급하던 아스를 떠올리자 사진의 역사를 공부하지 않았던 지난날이 후회되었다.
“젠장.”
깊은 한숨과 함께 막을 새도 없이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이제 마지막 희망마저 다 사라지고 말았다.
공작 부인의 사진이길래 복사본이라도 갖고 있을 줄 알았건마는.
히이이잉!
“으윽!”
순간 높은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좌우로 크게 요동쳤다.
“아야야….”
그 움직임에 그만 벽에 머리를 부딪치고 말았다.
“무슨, 일이야.”
부딪친 이마의 아픔을 잊어보려 다친 부위를 세게 문지르며 일어났다.
무슨 일인지 확인하기 위해 창밖을 살펴봤지만, 그저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후문의 풍경만이 보일 뿐이었다.
“……”
근데 왜 이리 불안한 거지?
차마 마차 문을 향해 고개를 돌릴 용기가 나지 않았다.
벌컥!
“당장 내려!!”
헤라르일라 공작의 고함이 천둥처럼 들려왔다.
나는 마음의 준비도 하지 못한 채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이런 미친 것!”
그 이후로는 내 의지와는 조금도 상관없이 끌려갔을 뿐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내 손목을 붙잡고 끌고 갔다.
얼핏 보니 엠마가 뚝뚝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죄송해요.”
그녀는 입 모양으로 내게 그리 말했다.
모르간과 바버도 그곳에 서 있었다.
꼴 좋다는 듯 웃는 모르간과 절레절레 고개를 저어대는 바버.
모르간의 웃음을 보아하니 일이 결코 쉽게 끝날 것 같지는 않았다.
“아! 아파요!”
씩씩거리며 팔을 당겨 끄는 공작에 반항하듯 힘을 줬지만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따라가고 싶지 않아 다리에 힘을 줘봐도 결국 공작이 이끄는 대로 끌려갈 수밖에 없었다.
싸우게 된다면 내가 이길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는데.
공작의 손을 뿌리치는 것조차 불가능했다.
순간 느껴지는 무력감과 이대로 끌려가면 무슨 꼴을 당할지 모른다는 걱정에 두려움이 물밀듯 밀려왔다.
턱 밑까지 밀려든 두려움에 잠식되기 전, 도움을 바라고 주변을 둘러보았다.
많은 사용인 중 한 명이라도, 한 명만이라도 날 도와주려 손 내밀어 주지 않을까 싶어서.
그러나 공작의 눈에 띄고 싶지 않아 모두 고개를 숙일 뿐이었다.
“아프다니까요!”
그들은 공작이 지나간 순간 눈을 들어, 날 바라봤다.
일이 어떻게 흘러가는지 궁금하다는 듯. 이게 무슨 상황인지 파악해보려는 듯.
그 누구도 날 위해 나서줄 생각은 없는 듯 보였다.
“공녀님!!”
그때, 카를로스가 보였다.
“으읍!”
카를로스는 뭔가 더 말하려는 듯 했지만, 그의 곁에 서 있던 집사의 손길에 그 입이 막혔다.
카를로스는 내게 뛰어오고 싶은 듯 몸에 힘을 줬지만, 그마저도 집사에게 잡혀 제지당할 뿐이었다.
그래, 그건 참 다행이었다.
괜히 어린 카를로스까지 이 일에 휘말리게 하고 싶지는 않았으니.
“…….”
나와 눈이 마주치자 집사는 고개를 숙여버렸다.
내리깔아진 그 눈에, 그도 날 도와주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았다.
“…….”
난 반항이 무의미하다는 걸 깨닫고 나서야 주변을 두리번거리던 고개를 내렸다.
* * *
쾅!
“옷까지 바꿔입고 어딜 갔다 온 게야!”
집무실의 문이 닫히고 그제야 공작이 힘줘 붙잡고 있던 내 팔목을 놓아주었다.
“당장 말하지 못해!”
욱신거리는 팔을 붙잡고 있을 때 다시 한번 그의 고함이 떨어졌다.
휙.
쨍그랑하는 소리와 함께 자기가 바닥으로 떨어져 산산이 깨졌다.
바로 귓가를 스쳐 가던 그 자기에 절로 다리에 힘이 풀렸다.
“광장에 다녀왔어요.”
“내가 분명 나돌아다니지 말라고 했을 텐데!”
공작이 씩씩거리며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광장의 어딜 갔는지 바로 말하거라. 만에 하나 나를 속일 생각은 말거라. 마부에게 물으면 거짓이 들통나는 건 금방일 테니.”
“사진관에, 아스 사진관에 다녀왔어요.”
“사진관?”
공작이 눈살을 찌푸렸다. 예상하지 못한 장소라는 듯.
“사진관에는 왜 간 거지?”
“…사진 좀 찍고 싶어서요.”
“거짓은 아니겠지?”
공작이 의심쩍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그렇다고 진실을 말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으로서는 이게 최선이었다.
“하아….”
공작은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드르륵.
“말로 좋게 하려 했더니, 역시 멍청한 건 매로 다스려야지.”
공작이 제 셔츠를 걷더니 책상 밑 서랍에서 긴 회초리를 꺼내 들었다.
“잠깐, 잠깐만요! 전 별로 맞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
“넌 벌써 내게 세 번이나 잘못을 들켰다. 그 정도로 은혜를 베풀어줘도 변하지 않는다면, 매로 다스릴 수밖에.”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