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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6화 (2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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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작은 회초리로 제 손바닥을 탁탁 가볍게 내리치며 다가왔다.

“그게 싫다면 당장 이 저택에서 나가거라.”

“…….”

“바깥으로 나가면 두 번 다시는 돌아올 수 없다는 거 하나는 알아두거라. 더는 내 보호를 받을 수 없다는 것도.”

내가 조금 고민하는 것 같아 보였는지 공작이 말을 덧붙였다.

분명 내가 나가지 못할 거란 걸 잘 알기에 하는 말일 테지.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었다.

난 돈도 없었고, 이 세계에 완전히 적응하지도 못했다.

이곳의 치안이 어떤지, 어떻게 하면 돈을 벌고 살아갈 수 있는지조차 알지 못했다.

그러나 정말 너무하지 않은가.

내가 나가지 못한다는 걸 약점 잡아 협박한다는 사실이.

“네까짓 게 이곳에서 나가면 살아남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얼굴 하나는 반반하게 생겼으니 몸이라도 팔면 살 수는 있겠지.”

공작이 한껏 빈정댔다.

탁탁.

내 대답은 이미 알겠다는 듯 그가 제 앞 바닥을 회초리로 탁탁 두들겼다.

그 순간, 두려운 감정이 사라지고 정신이 돌아왔다.

“나갈게요.”

“…뭐?”

“그냥 나가겠다고요.”

내 대답에 공작의 얼굴이 완전히 일그러졌다.

“바깥에서 굶어 죽는 한이 있어도 이곳보다는 행복할 것 같네요.”

세 번이나 봐줬다는 공작의 말에, 세 번이나 잘못한 거면 공작이 저리 화낼 만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내가 정말 잘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맞기 싫으면 나가 살라는 공작의 말에 차라리 맞는 게 나을 것 같다고까지 생각했다.

그의 말처럼 이곳에서 나가 살면 그대로 죽을 듯싶었기에.

적어도 이곳엔 푹신한 침대가 있었고 맛있는 음식이 있었고 추위나 더위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었으니.

게다가 드레스나 장신구를 살 수 있는 돈까지 넉넉하게 있지 않는가.

마음에 안 드는 부분도 있지만 그걸 조금만 참으면 후에 돈을 가지고 나갈 수 있으니 참기로 했다.

“하, 미쳤지. 이런 곳에서 버틸 생각을 한다니.”

그러나 조금 전 공작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이 자는 내 아버지도, 패트리샤의 아버지도 아니었다.

그래, 어쩌면 돈을 받고 노인에게 날 팔겠다고 말했던 그 날 이 집을 나갔어야 했던 걸지도 모른다.

이곳은 이상했다.

제 딸을 의도적으로 무시하며 소외시키는 것도.

모든 자존감을 다 뭉개버리는 말들을 스스럼없이 내뱉는 것도.

이유도 없이 바깥에 나가지 못하게 하는 것도.

이상했다.

“그런 막말을 견딜 바엔 혼자 살아보는 게 나을 것 같네요.”

어쩌면, 아무리 화가 난다 해도 이곳에 머무는 게 맞는 선택일 지도 몰랐다.

지금은 화가 나 이성적인 판단을 내리지 못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럼에도, 설령 후회하게 된다고 할지라도.

더는 이런 곳에 있고 싶지 않았다.

나까지 이상해질 지경이었으니.

내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는지 공작은 그저 어버버거릴 뿐 말을 뱉지 못했다.

“짧은 시간이지만 제게 당신은 결코 좋은 부모는 아니었어요.”

나는 얼빠진 공작에게 그 말을 남기고 그대로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탁!

집무실 바깥에서 얼쩡거리던 사용인들이 날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뭘 봐.

나는 그렇게 쏘아붙이고는 서둘러 계단을 내려갔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공작이 날 다시 붙잡겠다 난리를 칠까 두렵기도 했고. 다시 내 방으로 돌아가 봤자 돈 될 만한 물건이 없기 때문이었다.

엠마와 카를로스는….

우선 엠마는 그렇게 난처한 상황은 아닌 듯했다.

울고 있긴 했지만, 엠마는 동료 시녀들과 함께였다.

결박된 상태도 아니었고 엠마 주변에서 그녀를 감시하는 이도 아무도 없었던 거로 보아하니 엠마에게까지 불똥이 튀지는 않을 듯했다.

카를로스는….

바깥에서 자리를 좀 잡게 되면, 그때 다시 데리러 와야겠다.

물론 그가 나와 함께 하길 원할지는 자신할 수 없었지만.

“…….”

아니, 근데 그보다.

나는 어디로 가야 하지?

계단에 떨어져 있던 모자를 주워들었다.

공작에게 이끌려 가던 도중 내가 떨군 모양이었다.

“치이, 치워주지도 않냐?”

갈 곳이 없자 왠지 쫓겨난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아니지, 난 내 발로 내가 걸어 나가는 거야. 쫓겨난 건 아니지.”

나는 모자를 푹 눌러쓰고 앞만 보고 걸었다.

조금도 아쉽지 않다는 듯.

아무것도 두렵지 않다는 듯.

이곳을 떠나도 나 혼자 잘 먹고 잘살 자신 있다는 듯.

한숨이 흘러나올 것 같았지만, 입술을 꼭 깨문 채. 그렇게 나는 대문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후우….”

깊은 한숨을 내쉰 나는 이제는 꽤 익숙해진 방을 둘러보았다.

화려한 샹들리에와 카펫, 소파와 테이블 위에 올려진 도자기까지 모든 게 처음과 같았다.

나는 내 앞에 놓인 차를 가만히 들여다보다 모자를 더 깊이 눌러썼다.

“하아….”

미친 거지.

내가 미친 거지.

어쩌자고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찾아온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러나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나오고 하릴없이 광장을 헤매다 보니 어느새 게르하르트 공작저 앞에 도착해 있었다.

사실 이 세계에서 헤라르일라 공작저 사람들을 제외하면 내가 유일하게 연이 있는 사람이 바로 로렌스였다.

물론 그 연이 좋지 않다는 게 문제지만.

벌컥.

순간 문이 열리고 한 사람이 저벅저벅 걸어왔다.

넓은 챙에 가려 얼굴까지는 보이지 않았지만 분명 로렌스일 테지.

“무슨 일이지?”

“…….”

“패트리샤.”

그가 창 쪽으로 잠시 고개를 돌렸다.

창밖엔 이미 어둠이 짙게 깔려있었다.

이 늦은 시각에 찾아온 게 의외라는 듯 로렌스의 시선이 다시 내게 돌아왔고, 나는 깊이 고개를 숙였다.

“…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나?”

끄덕끄덕.

나는 최대한 불쌍한 척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로렌스는 게르하르트 소공작이었다.

로렌스라면 내가 얼마간 머물 곳쯤은 구해줄 능력도 있었다.

로렌스에게는 쉬운 일이겠지. 물론 그가 원할 때의 일이겠지만.

분명 필요하면 도와주겠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근데 그쪽, 소공작님 말고는 아는 사람이 없어서.”

내가 도움을 청할 수 있는 이는 그밖에 없었다.

“…….”

“갈 데가 없는데.”

침묵이 길어졌다.

로렌스가 당장 나가라고 말할까 나는 다시 입을 열었다.

“그때 분명 도와주….”

“그래, 앉아.”

담담한 로렌스의 목소리에 나는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여전히 모자챙 때문에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쯧, 괜찮나?”

“…네.”

“의원은 필요 없어?”

“네.”

“원하는 만큼 있어도 좋아.”

“어….”

예상치 못한 로렌스의 말에 나는 어색하게 말을 늘였다.

“감사해요.”

“감사는. 됐으니 그만 일어나. 머물 방에 데려다줄게.”

로렌스는 한숨을 쉬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뭔가 귀찮아하는 듯도 했고 답답해하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로렌스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재빨리 자리에서 일어나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소공작님….”

응접실을 나오자 로렌스의 보좌관 시몬이 로렌스를 불렀다.

아무래도 늦은 시간에 찾아온 내가 그리 반갑지는 않은 눈치였다.

“방을 내주기로 했어.”

“네? 하지만, 그건….”

“이미 결정 났으니 거기까지 해.”

로렌스가 이만 가보라는 듯 제 보좌관에게 작게 손짓했다.

“하아, 제가 공녀님을 모셔다드리겠습니다.”

시몬은 단호한 로렌스의 행동에 작게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건 내가 할 테니 넌 사용인들 입단속이나 시켜.”

날 흘긋 확인한 로렌스는 어딘지 화가 난 듯 보였다.

말이 길어지는 게 짜증 났던 걸까?

“네, 그리하겠습니다.”

시몬도 지금 제 주인의 기분이 언짢다는 걸 깨달았는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가지.”

시몬이 복도를 지나가고 나서야 로렌스가 다시 걸음을 옮겼다.

저벅, 저벅저벅.

계단을 오르고 복도를 거니는 동안 아주 작고 일정한 발소리만 들려왔다.

이상한 일이었다.

막무가내로 찾아왔는데도 전혀 화내지 않는 로렌스는 이상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보지도 않고 그저 방을 내주겠다는 그의 태도도 이상했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다 안다는 듯, 괜찮냐 물어보는 것도 이상했다.

달칵.

로렌스가 걸음을 멈추고 문손잡이를 돌렸다.

사용하지 않는 방인 건지, 불을 켜지 않아 어두웠다. 로렌스는 잠시 어딘가에 들어가 램프를 가지고 돌아왔다.

“들어가 쉬어.”

나는 로렌스가 내미는 램프를 받아들었다.

“시녀를 배정해 줄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시녀에게 편히 말하고.”

로렌스가 어서 들어가라는 듯 방을 턱짓했다.

“근데….”

로렌스가 하라는 대로 초롱을 들고 방으로 들어가면 될 일인데.

“왜 아무것도 안 물어보세요?”

이상하게 그럴 수 없었다.

“절 도와주시다 괜한 소문이라도 나면 골치 아파질 텐데, 왜 도와주세요?”

로렌스와 나에게는 아무런 접점이 없었다.

그와 나는 혈연으로 엮인 것도 아니었고 가문끼리 그리 친한 것도 아니었다.

만에 하나 패트리샤가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생활한다는 소문이 난다면 그에겐 득보다 실이 더 클 거였다.

게다가 그때 변명할 마땅한 이유도 존재하지 않았고.

한데 왜 도와주는 걸까?

“우리 가문 사람들은 입이 무거워. 소문날 일 없어.”

“제가 왜 쫓겨났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로렌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고 손을 뻗어 내 뒤통수를 쓸어내렸다.

모자의 챙이 높이 올라갔고 고개가 들렸다.

드디어 그의 붉은 눈이 보였다.

“말하고 싶어?”

나를 샅샅이 살피는 듯하던 그가 살짝 미간을 찌푸렸다.

“도움받는 입장이니 원하신다면요?”

내가 작게 어깨를 으쓱거리자 그가 작게 한쪽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혹시, 맞았나?”

그의 시선이 내 이마에 닿았다.

“맞진 않았어요. 이건, 마차에서 부딪쳐서 다친 거….”

어색하게 말을 흐리자 로렌스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는 방으로 보내줄게. 이제 진짜 들어가 쉬어. 다른 건 나중에 다시 물어볼 테니.”

“……네.”

어쩐지 어두운 방으로 혼자 들어가야 한다는 사실이 싫었다.

그러나 더는 로렌스를 귀찮게 할 수 없어 그만 등을 돌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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