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7
똑똑.
가볍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그 소리에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났다.
시녀일까?
그러나 아무리 기다려도 문을 두드린 이에게선 말이 없었다.
조금 전 식사를 가져다줄 때는 트레이를 문 바깥에 둘 테니 편히 드시라고 말하고 자리를 피해줬었는데. 왜인지 이번에는 아무리 기다려도 말이 없었다.
“들어오세요.”
문을 열어주려 손을 뻗었다, 다시 손을 내리고 말했다.
이윽고 문이 열렸고 그 바깥에는 로렌스가 서 있었다.
그의 손에는 옷이 담긴 바구니가 들려있었다.
“식사는?”
“…했어요.”
“오는 길에 시녀를 만나서.”
그가 내 시선을 의식했는지 설명을 덧붙였다.
“잠시 들어가도 되나?”
“아, 네.”
그 말에 나는 문 앞에서 몇 걸음 비켜섰다.
“말이 좀 길어질 것 같은데 앉지.”
로렌스가 바구니를 테이블에 올려놓고 소파에 앉았다.
“이건 약, 거기에 발라.”
소파에 앉자 그가 턱짓하며 말했다.
“아…. 감사해요.”
예상 못 한 세심한 배려에, 어색하게 부딪힌 이마를 가볍게 쓸었다.
“그래서 어쩌다 여기까지 오게 된 거야?”
“외출하다 걸려서요.”
“외출 금지라 했었지?”
그가 가볍게 내 옷차림을 훑었다.
“그래서 쫓겨난 거야?”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쫓겨났다길래 뭐 큰 잘못을 했나 했더니.”
“때리려고 하길래 제가 나왔어요.”
로렌스가 다시금 한숨을 뱉어냈다.
“그래, 잘했어.”
“…네?”
“잘 나왔다고. 잘못한 것도 없는데 뭘 또 맞고 있어.”
잘했다는 그 말에 왠지 눈물이 나올 것 같아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선 모두가 내 잘못이라 말했는데.
엉뚱한 이가 내게 잘했다 말해줬다.
“그래서 어딜 갔던 거야?”
“…사진관이요.”
“사진관?”
“그… 소공작님의 사진을 찾을 수 있을까 싶어서요.”
분명 로렌스는 날 싫어하는데.
첫날도 그다음 날 찾아왔던 날도, 또 그다음에도 매번 치를 떨며 증오했는데.
왜 이렇게 잘해주는 걸까.
로렌스가 날 싫어하는 것도 충분히 이해됐다.
어머니의 유품을 훔쳐 간 것도 모자라 사진까지 잃어버렸으니.
그런데도 로렌스는 내 사정을 봐주었다.
공작 몰래 이곳에서 빠져나가게 도와줬고, 직접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찾아와주기도 했다.
그리고 지금도 내가 머물 곳을 내어주었고.
“거기서?”
“필름을 갖고 있을까 봐, 아니면 복사본이라도.”
“필름?”
“근데 뭐라 했더라? 은판사진이라고 원본이 있어도 복사는 안 된대요.”
그래서 더 미안했다.
“당연하지, 어떻게 그걸 복사해.”
로렌스는 내 말에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흘렸다.
“…죄송해요.”
그래서 더 미안했다. 이젠 그 사진을 찾을 방도가 없었으니.
“제가 방도 다 뒤져보았는데 사진은 못 찾았어요. 아무래도 못 찾을 것 같아요.”
도움을 베푸는 그에게 고마워서였을까?
“사진관이 마지막 희망이었는데….”
혹시라도 사진을 기다리고 있을 그에게 더는 거짓말을 할 수 없었다.
찾아낼 테니 더 기다려 달라고 말할 수 없었다.
헛된 기대를 주는 것보다야 사실을 말하는 게 더 나을 듯했다.
말하자면 얄팍한 양심이었다.
“제가 진짜 열심히 방을 뒤졌었는데도 없었어요. 종이가 들어갈 만한 틈도 정말 다 찾아봤는데 못 찾았어요.”
그러나 얄팍한 양심은 화난 로렌스가 이곳에서 날 쫓아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금세 후회로 변했다.
“아마 이미 찢어졌거나, 종이가 너무 작아서 찾는다 해도 손상됐을 거예요.”
나는 애초에 사진을 찾는 게 불가능한 상황이었다는 걸 그가 조금만 이해해주길 바라며 말을 늘였다.
“종이?”
가만히 내 말을 듣고 있던 로렌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종이, 사진이요.”
로렌스는 무슨 소리 하는 거냐며 눈살을 찌푸렸다.
“…….”
꽤 긴 침묵이 이어졌다.
로렌스는 가만히 날 들여다보았다.
“사진이 종이라고?”
그리고는 이상한 질문을 했다.
“아니에요?”
로렌스가 눈을 깜빡였다.
“아니야.”
사진 인화지를 종이라고는 안 부르나?
그럼 도화지?
“…….”
아니, 애초에 인화지의 지가 종이 지(紙)잖아.
“…예?”
“기다려봐.”
로렌스는 그 말을 마치고 방을 나갔다.
한참이 지나 돌아온 그의 손에는 작은 함이 들려있었다.
“열어봐.”
그가 건넨 함을 열자, 뚜껑 내부가 벨벳으로 덮여 있는 게 보였다.
함 안에는 금테를 두른 은판이 보였고.
그리고 그 은판에는 온화한 미소를 띤 여인이 앉아 있었다.
흑백 사진….
“이게 사진이에요?”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종이가 아니네.”
“사진이 뭔지도 모르고 뭘….”
금속판 위에 인화된 사진을 멍하니 보고 있자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
“…됐다.”
탁.
로렌스는 내가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함의 뚜껑을 덮었다.
“진짜였나 보네?”
“네?”
“사진은 본 적도 없다던 네 말 말이야.”
“…….”
“알겠어.”
“……뭐를?”
“어머니의 사진이 없어진 건 네 잘못이 아닌 것 같네. 물론 남의 물건을 주워가 그 긴 시간 숨겼다는 것에는 아직도 화가 나지만.”
로렌스가 뭐라 말을 하는 듯했지만 나는 그의 손에 들린 함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여전히 그 충격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레이저로 새긴 걸까?
아니, 이곳 과학이 어디까지 발전한 거지?
마법인가?
“…….”
“사진 찾는 건 그만해.”
“…네?”
“네 잘못이 아니니 책임질 필요 없다고.”
“정말요? 저 진짜 그만 찾아도 돼요?”
그러나 원하던 말이 로렌스의 입에서 흘러나온 순간, 그제야 그의 말이 귀에 제대로 들어왔다.
얼마나 고대하던 말이었는지. 나는 그만 두 손까지 모으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순간 정적이 돌고 나서야, 나는 이게 그리 기뻐할 일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입꼬리를 끌어내렸다.
그 후 어정쩡하게 다리를 굽혀 다시 착석했다.
물론 내게 더없이 기쁜 일임은 분명하였지만.
로렌스 입장에서는 제 어머니의 사진을 포기한 것이었다.
사진을 찾을 수 있다는 희망을 단념하는 일이었다.
“…죄송해요.”
나는 한껏 조용하고 엄숙한 표정으로 유감을 표했다.
너무 놀라운 일이 연속으로 일어나 그만 분위기 파악에 실패했다.
“하아….”
로렌스가 깊은 한숨을 내쉬자, 나는 고개를 더욱 깊이 숙여 보였다.
“그보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네가 이곳에 있는 걸 모르나?”
로렌스가 화제를 돌렸다.
이리 고마울 수가.
나는 서둘러 고개를 들고 끄덕였다.
“사람을 보내 알릴까?”
“아니요, 아마 안 찾을걸요? 궁금해 하지도 않을 거예요.”
그래도 딸인데 걱정하고 있으려나?
“두 번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
“아, 그렇다고 제가 이곳에서 평생 신세를 질 생각은 아니에요. 금방 나갈게요. 금방.”
로렌스의 입매가 조금 굳었다.
굳게 닫혀있던 그의 입은 꽤 시간이 지나 다시 열렸다.
“시간이 늦었으니 그만 쉬어. 약 바르고.”
어째서인지 그의 눈빛에서 동정이 보였다.
집에서 쫓겨난 게 불쌍해 보였나?
아니면 이대로 길바닥에 나앉게 될까 봐?
탁.
문이 닫히고 방에 홀로 남은 나는 이유 모를 로렌스의 눈빛에 왠지 더 불안해졌다.
* * *
“하아….”
어두운 새벽.
찌르르, 찌르르.
열어 놓은 창을 통해 풀벌레들의 소리와 새소리가 간간이 들어왔다.
여름밤 특유의 더위가 느껴졌지만, 잠 못 들 정도는 아니었다.
내가 이 늦은 새벽까지 잠 못 든 이유가 더위 때문은 아니었다.
“하아….”
나는 다시 한번 몸을 뒤척이며 자세를 바꿨다.
“진짜 뭐지?”
로렌스가 왜 그런 눈으로 날 바라본 걸까?
불쌍하다는 듯, 안타깝다는 듯.
혹시 나 진짜 망한 걸까?
로렌스가 보기에 가족들에게 버림받고 쫓겨난 내 앞길이 막막해 보인 걸까?
노숙자가 돼 평생 구걸하며 살아야 할까 봐? 아니면 어느 가문의 하녀가 돼 평생을 일만 해야 할 것 같아서?
“후, 뭘 그렇게까지 불쌍하게 보냔 말이야.”
다시 한번 그냥 나오지 말걸, 그냥 몇 대 맞고 끝낼 걸, 하는 후회가 밀려왔다.
“아니, 그보다 맞춘 드레스만이라도 갖고 나오고 싶은데….”
역시 될 리가 없었다.
젠장.
당장 집을 살 돈은커녕 한 달 월세도 없었다.
로렌스에게 딱 한 달 월세만큼만 빌려볼까?
갚겠다고 약속하면, 어쩌면 빌려줄지도 몰랐다.
“…….”
아니지.
오늘만 해도 쫓아내지 않고 받아줬는데, 그에게 뭘 더 바란단 말인가.
“…….”
그래, 이왕 신세 지는 김에 좀 더 지자.
어차피 그에게 돈을 빌리지 못하면 정말 이대로 땅바닥에 나앉아야 할 판이었다.
내가 지금 고민해야 하는 건 어떻게 하면 로렌스에게 돈을 받을 수 있을지였다.
이곳에 오래 머무는 것보다야, 돈을 빌려 빨리 나가는 편이 로렌스에게도 더 좋겠지.
“괜히 시간 끌지 말고 내일 바로 얘기해 보자.”
찌르르, 찌르르.
아직도 창문 밖에선 풀벌레 소리가 들려왔다.
왠지 바쁜 내일이 될 듯해 그만 잠들고 싶었지만, 아무리 눈을 감아도 그 풀벌레 소리는 여전히 선명했다.
왜인지 잠이 오지 않는 여름밤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