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8
바스락.
“하아….”
깊은 한숨 소리와 함께 로렌스가 몸을 일으켰다.
“덥군.”
밤공기가 더웠는지 로렌스는 제 단추를 풀었다.
“후우….”
그러나 그것으로도 더위가 가시지 않았는지 그는 침대에서 내려와 테라스로 걸음을 옮겼다.
찌르르, 찌르르.
테라스의 난관에 몸을 기댄 로렌스는 멍하니 어둠을 바라보다 이윽고 눈을 감았다.
눈을 감으니 담담한 목소리로 자신의 상황을 말하던 패트리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마 안 찾을걸요? 궁금하지도 않을 거예요.’
순간 로렌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두 번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아무렇지도 않다는 얼굴로 패트리샤는 그리 말했다.
제가 본 패트리샤는 상처받은 것 같지는 않았다.
“…….”
그래서 더 기분이 더러웠다.
그녀가 모든 걸 포기한 듯 보였기에.
사랑받길 포기한 것처럼 보였고 기대하길 포기한 듯 보였다.
그렇게 모든 걸 포기하기까지 그간 혼자 얼마나 속상했을지, 얼마나 많은 낙담을 하고 눈물을 흘렸을지 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담담하던 패트리샤의 모습에 그녀가 더욱 안타까워 보였다.
“하아….”
그간 로렌스는 제 가족에게 사랑받고 싶어 개처럼 꼬리 흔드는 멍청한 패트리샤를, 자존심도 없는듯한 그녀를 증오했다.
돌아오지 않을 사랑을 갈구하는 어리석은 모습은 보는 이로 하여금 화를 불렀으니.
‘두 번 다신 돌아오지 말라고 했거든요.’
그러나 이젠 로렌스도 알 수 없었다.
대체 패트리샤가 어찌하길 원하는 것인지.
로렌스는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깊은숨을 들이켰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야.”
로렌스의 시선이 정원 연못에 닿았다.
호수 위로 떠 오른 밝은 달의 모습에 그날의 기억이 떠올랐는지 로렌스는 그렇게 한참 동안 연못을 바라봤다.
* * *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가 열 살이 되던 해.
그의 아버지 게르하르트 공작은 로렌스의 생일을 맞아 연회를 열었다.
그날은 로렌스가 처음으로 사교계에 얼굴을 보인 날이기도 했다.
소공작의 사교계 데뷔에 제국의 각종 인사가 모였다.
고위 귀족은 물론이고 황제까지 들러 로렌스의 생일을 축하해주었다.
로렌스가 그 많은 관심을 받은 이유는 단지 게르하르트의 외아들이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라졌다 믿었던 블랙드래곤의 이능력, 초대 게트라트르의 능력을 로렌스가 갖고 태어났기 때문이었다.
로렌스는 인간들보다 신체적으로 뛰어남은 물론이었고 마나 또한 질이 달랐다.
그러니 황제가 다섯 살밖에 되지 않은 아이의 생일을 축하하기 위해 게르하르트 공작령까지 먼 길을 온 것이었다.
“도련님, 후아테 후작님이십니다.”
“안녕하세요. 와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날 로렌스는 제 집사와 함께 제게 인사하러 온 이들을 맞았다.
“제 아들 테이드 후아테입니다.”
“안녕하세요.”
그러나 로렌스는 많은 이들의 축하와 저를 위한 연회의 성대함에도 기뻐 보이지 않았다.
무표정의 로렌스는 이 모든 것들이 귀찮아 보였다.
그럼에도 그는 열심히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제게 인사하러 온 이들을 맞았다.
“도련님, 헤라르일라 공작님입니다.”
“반갑습니다. 공작님.”
“공작님의 자제 모르간 헤라르일라. 바버 헤라르일라. 밀럼 헤라르일라. 그리고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입니다.”
집사의 설명을 따라 로렌스의 고개가 모르간에서 바버로 그리고 밀럼으로 천천히 움직였다.
그렇게 점점 내려가던 로렌스의 고개가 패트리샤의 얼굴 위에서 멈췄다.
저보다도 작은 여자아이.
부드럽고 따뜻할 것만 같은 백금발을 하나로 땋아 올린 새하얀 피부의 여자아이는 그 영롱한 보랏빛 눈을 빛내며 로렌스를 바라봤다.
패트리샤의 살짝 벌어진 붉은 입술, 그 사이로 작은 감탄이 흘러나왔다.
그리고 순식간에 아이의 두 뺨이 붉게 물들었다.
로렌스는 패트리샤의 그 시선에 살짝 눈살을 찌푸렸지만, 고개를 돌리지는 않았다.
저와 같은 아이.
저처럼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약점인 아이.
아버지에게 저 아이에 대해 들었던 그 날부터 로렌스는 궁금했었다.
그 호기심이 로렌스의 눈길을 멈춰 세웠다.
과연 이 아이는 어떻게 행동할까?
저만큼 불행할지 저보다 불행할지 궁금했다.
순간 집사가 로렌스의 어깨를 작게 두드렸고 그제야 로렌스는 패트리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그 순간 패트리샤의 옆에 서 있던 밀럼이 그녀의 손등을 세게 꼬집었다.
“아아!”
패트리샤는 갑작스러운 통증에 신음을 흘렸지만, 그걸로 끝이었다.
울거나 칭얼거리지 않았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작게 인상을 찡그리며 노려보자 그저 아직 아픈 듯 제 손등을 쓰다듬으며 입을 작게 삐죽일 뿐이었다.
“생일 축하합니다.”
“감사합니다. 헤라르일라 공작님.”
로렌스는 그렇게 인사하며 제게서 등을 돌린 패트리샤를 바라봤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어른들의 모임을 향해 걸어갔고 패트리샤는 종종걸음으로 제 오빠들을 따라 아이들을 위해 따로 준비된 연회장으로 향했다.
노란 드레스를 입은 패트리샤가 뒤를 돌아본 순간 다시 한번 눈이 마주쳤다.
* * *
“도련님, 그만 돌아가 쉬시겠습니까?”
“아니.”
긴 인사가 끝나고 집사와 함께 연회장을 빠져나오는 로렌스는 고개를 저었다.
“나 혼자 갈 데가 있으니 그만 가보세요. 집사.”
“어디를….”
집사의 물음에도 로렌스는 더 이상 대답이 없었다.
그러나 제2 연회장 쪽으로 향하는 로렌스의 모습에 집사는 그만 입을 다물었다.
아무리 어른스러워 보여도 로렌스는 아직 열 살이었다.
그 역시 또래와 어울리고 싶어 하는 아이일 뿐이었다.
집사는 로렌스를 잠시 바라보다 걸음을 옮겼다.
* * *
“패트리샤 공녀.”
헤라르일라 공작의 정부의 자식.
일부일처제인 제국에서 바람이란 큰 흠이었다.
그러니 혼외자식이 인정받지 못하고 비난받는 것은 당연한 절차였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제 치부를 숨기고 싶었는지 패트리샤를 공작부인과 제 사이의 아이로 호적에 올렸다.
그리고 패트리샤가 그 집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공작부인은 시름시름 앓다 죽었다.
아마 화병이겠지.
제 남편의 외도를 알고서도 가문의 명성이 실추될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으니.
저벅저벅.
로렌스는 충동적으로 어린 자재들이 모여 있는 연회장 안으로 들어섰다.
“응?”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하는 아이.
제2 연회장 안 아이들은 저마다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
패트리샤만 빼고.
패트리샤는 제 오빠들 주위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지만, 그들은 귀찮다는 듯 패트리샤를 밀칠 뿐이었다.
“공녀는 왜 혼자 있습니까?”
게르하르트는 혼자 있는 패트리샤에게 다가가 물었다.
“아, 그게….”
“게르하르트 공자. 부끄럽지만 저 아이는 말을 능숙하게 하지 못합니다.”
뒤늦게 로렌스의 방문을 알아챈 모르간이 빠르게 말을 가로챘다.
“풉!”
“킥킥.”
모르간의 말에 바버를 시작으로 주위에 있던 이들이 웃음을 터뜨렸다.
이제 보니 왜 패트리샤만 혼자 떨어져 있었는지 알만했다.
그녀의 오라비들이 패트리샤가 사람들과 어울리지 못하게 이런 식으로 말을 해둔 모양이었다.
패트리샤는 창피한 듯 입술을 꼭 깨물다 기어코 눈물을 방울방울 흘렸다.
“이 바보가, 울지마.”
그러자 바버가 패트리샤의 어깨를 세차게 밀었다.
“괜히 헤라르일라 명성에 먹칠할 생각 말고 그만 숙소로 돌아가.”
“미안해.”
밀럼이 패트리샤의 어깨를 꽉 움켜쥐고 강압적으로 말하자, 패트리샤는 그대로 걸음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로렌스 공자. 이곳은 좀 심심해져서 그러는데 공작저의 정원을 구경시켜주시겠습니까?”
그렇게 패트리샤를 쫓아낸 모르간이 로렌스에게 말을 걸었다.
로렌스와 그의 무리는 한껏 기대하는 눈빛으로 로렌스를 바라봤다.
“…….”
로렌스는 잠시 말없이 모르간을 바라보다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그렇게 하죠.”
그리고는 패트리샤가 나간 문을 바라보았다.
“많이 갈수록 재미있을 듯한데, 패트리샤 공녀도 함께 가도록 하죠.”
“네? 하지만 그 아이는….”
그러나 로렌스는 다시 한번 웃으며 제 의견을 종용했고 모르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얼마 지나 패트리샤의 팔을 잡고 모르간이 그녀를 끌고 왔다.
패트리샤는 모르간의 손길이 불편한 듯 팔을 어색하게 움직이면서도 함께 정원을 보러 간다는 사실이 기쁜 듯 웃고 있었다.
“공녀, 함께 가겠습니까?”
로렌스의 물음에 패트리샤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 * *
“이 호수가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입니다.”
한 겨울날.
로렌스를 따라 게르하르트 공작저의 호수에 도착한 이들은 로렌스를 중심으로 그 호수 곁에 빙 둘러 서 있었다.
로렌스는 꽤 큰 돌을 집어 호수 위로 던졌다.
탕, 탕탕.
돌은 꽁꽁 언 호수의 얼음에 몇 번 튕겨 나가다 움직임을 멈췄다.
꽁꽁 언 호수 위로 달의 모양이 거칠게 비췄다.
로렌스는 망설임 없이 언 호수 위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자 로렌스만을 바라보던 많은 이들이 그를 따라 호수 위로 올라왔다.
균형잡기가 어려운 듯 몇 번 휘청이던 이들은 저마다 요령을 익힌 듯 빙판 위를 걸어 다녔다.
“아앗!”
호수에 오는 동안 로렌스의 곁에서 걷던 패트리샤는 빙판 위에서도 로렌스만을 따라다녔다.
넘어질 듯 휘청이다 로렌스의 옷깃을 움켜잡았다.
아차 싶었는지 재빨리 손을 놨지만 로렌스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입을 열었다.
“공녀, 잡아도 돼요.”
패트리샤는 잠시 머뭇거리다 이내 그의 옷자락을 손에 쥐었다.
“그만 올라가죠.”
로렌스는 이내 흥미가 떨어진 듯 호수 밖으로 걸음을 옮겼다.
쩌저적.
로렌스의 옷자락을 잡고 있던 패트리샤도 그를 따라 호수 바깥으로 나왔고 그와 동시에 호수의 얼음이 깨져버렸다.
빙판 위에 서 있던 아이들이 호수 안으로 빠져버리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