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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29화 (2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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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꺄악!!”

“으악!!”

순식간에 호수가 비명으로 물들었다.

패트리샤는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놀란 듯 얼어붙었다.

그러나 이윽고 다시 호수 안으로 들어가려는 듯 뛰기 시작했다.

탁.

“뭐 하는 거죠?”

몇 걸음 가지 못해 다시 로렌스에게 붙잡혔지만.

“어떻게, 오빠들이 사람들이 빠졌잖아! 도와줘요!”

패트리샤는 로렌스에게 붙잡힌 상태에서도 제 오빠들이 걱정되는 듯 호수를 바라봤다.

“…도와준다고?”

“어떻게 해!”

“…그렇게 널 괴롭히는데 굳이 도와주겠다고?”

“흐윽, 가족이잖아요! 제발 도와줘요!”

패트리샤는 엉엉 울며 그렇게 외쳤다.

로렌스는 금방이라도 쓰러질 듯 헐떡이는 패트리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럼 공녀가 가서 어른들을 데려와.”

로렌스의 말에 패트리샤는 달리기 시작했다.

그 치렁치렁한 노란 드레스를 휘날리며 열심히도 달렸다.

* * *

그렇게 어른들이 호수로 몰려왔을 땐 이미 아이들은 모두 뭍으로 끌어 올려진 후였다.

“도련님! 이게….”

집사는 흠뻑 젖은 로렌스와 뭍에서 가쁜 숨을 몰아쉬는 아이들을 번갈아 바라보며 한탄을 흘렸다.

“호수의 얼음이 얇았나 봅니다. 무게를 감당하지 못하고 깨져버려서는.”

로렌스가 제 얼굴에서 흐르는 물기를 닦아내며 말했다.

“대체 이곳엔 왜 온 것입니까?”

“모르간 공자가 게르하르트의 정원을 소개해 달라길래 제가 가장 좋아하는 곳을 보여주었을 뿐입니다.”

귀족들은 모두 제 아이를 끌어안고 상태를 확인하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제 아이가 위험할뻔했다는 사실에 화가나 가장 멀쩡한 듯한 로렌스에게 따져 물었다.

로렌스는 작게 어깨를 으쓱일 뿐이었다.

“그보다 백작님. 따져 묻기 전에 댁의 아이를 물에서 끌어 올려 낸 제게 고마움을 표하는 게 먼저 아닙니까?”

“그건…. 죄송합니다.”

평소보다 로렌스의 말투가 사나웠다.

“감기에 걸릴지도 모르니 어서 돌아가는 게 좋겠습니다! 모두 의원을 보내드릴 테니 어서 움직이시죠!”

로렌스의 변화를 눈치챈 집사가 서둘러 화제를 돌려 사람들을 이끌고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다.

“큰일 날 뻔했잖니!”

“어휴, 호수에는 왜 들어가!”

그들은 제 아이를 안고 집사를 따라 다시 저택으로 돌아갔고 호수에 남은 이는 로렌스와 패트리샤뿐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따로 패트리샤를 챙기지 않았고, 사용인들도 그녀를 그냥 지나쳤다.

달려가다 넘어지기라도 했는지 패트리샤의 노란 드레스 곳곳에 흙이 묻어있었다.

패트리샤는 멀어지는 제 가족을 바라보다 자신을 바라보는 시선을 느꼈는지 로렌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패트리샤가 로렌스를 향해 걸어왔다.

“괜찮아요? 다 젖었는데….”

금세 눈이 퉁퉁 부은 패트리샤가 젖은 로렌스가 걱정되는지 제 겉옷을 벗었다.

그래봤자 손수건 크기밖에 안 되는 그 작은 걸 벗어서는 로렌스에게 내밀었다.

물기라도 닦으라는 걸까?

“…….”

내민 패트리샤의 손은 까지고 피가 흘렀다.

“공녀나 신경 쓰지?”

“…….”

“바보 같은 게.”

로렌스는 짜증이 난 듯 인상을 찌푸렸다.

태어나 이토록 기분이 더러웠던 적이 있었나 싶을 정도로 짜증이 치밀었다.

대체 얼마나 멍청하면 이리 행동하는 건지,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었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았다.

“뭘 봐.”

로렌스가 으르렁거리자 패트리샤가 겁먹은 듯 뒷걸음질 쳤다.

저벅저벅.

로렌스는 그대로 패트리샤를 지나쳤다.

가족?

저와 비슷한 아이라 생각했는데.

전혀.

결코 저와 비슷하지 않았다.

자신은 저토록 무능력하지도 멍청하지도 않았다.

힘없는 이는 착한 게 아니라 그저 무능할 뿐이다. 그러니 당하는 것이고.

스스로를 지키지 못하는 것은 무능이었다.

아마 저 아이도 그런 것일 테지.

힘이 없으니 그저 당하고 참아내야 했겠지.

그게 너무 학습돼 복수할 생각조차 할 수 없게 된 걸까?

한참을 걷던 로렌스가 불현듯 걸음을 멈췄다.

“뭐해! 빨리 와!”

들리지 않는 패트리샤의 발걸음에 소리치자 그제야 뛰어오는 소리가 들려왔다.

달려온 패트리샤는 로렌스의 눈치를 살피더니 환히 웃었다.

코를 찡긋 찡그린 채.

이 분위기를 조금이나 무마해보고 싶은 것 같았다.

그러나 그조차도 로렌스에겐 짜증 날 뿐이었다.

“쯧, 귀찮게.”

의원이 이 아이한테까지 갈지는 모르는 일이었다.

로렌스가 손을 뻗자 패트리샤가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았다.

순간 맞잡은 손에서 옅은 빛이 흘렀다.

“괜히 기대했네.”

로렌스가 작게 혼잣말을 흘렸다.

저와 비슷한 아이가 멍청하길 바란 건 아니었는데.

로렌스는 작게 혀를 찼다.

* * *

한겨울 호숫물에 빠진 아이들은 모두 감기에 걸렸다.

게르하르트 공작은 제 영지에서 일어난 불미스러운 일을 사과하며 아이들의 감기가 나을 때까지 공작령에 머물 것을 권했다.

귀족들은 괜히 움직이다 아이의 감기가 더 심해질까 염려되어 공작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덕분에 사용인들만 바빠질 뿐이었지만.

어른들은 연회장에서 술을 먹었고, 아이들은 숙소에서 약을 먹고 누워있었다.

아이 중 패트리샤와 로렌스만 침상 생활을 면할 수 있었다.

다다다다.

“로렌스 공자님!”

로렌스는 제 이름을 부르며 달려오는 패트리샤에 눈살을 찌푸렸다.

“뭐죠?”

“이것 봐봐요!”

패트리샤가 로렌스의 얼굴 앞으로 제 손바닥을 들이밀었다.

“어제 다친 거 벌써 다 나았어요! 신기하죠?”

로렌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고는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어쩌면 패트리샤도 같이 빠뜨릴 것을 하고 조금 후회하고 있었는지도 모르겠다.

“왜 따라오십니까?”

한참 걷던 로렌스가 갑작스레 걸음을 멈추고 제 뒤를 따라오는 패트리샤에게 따져 물었다.

“…따라가는 거 아닌데요?”

“그럼?”

“저도 제 갈 길 가는 거예요.”

패트리샤가 눈동자를 도르륵 굴리더니 끝말을 흐렸다.

“네 갈길?”

그러나 로렌스는 패트리샤의 거짓말을 받아주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을 보고 있으면 화가 나려 했기에.

로렌스가 복도 저편에서 걸어오는 집사를 발견하고 손을 들었다.

그러자 집사가 걸음을 빨리 해 로렌스에게 다가왔다.

“집사. 공녀 좀 데려가요.”

“공녀님 말씀이십니까?”

“그래, 얘.”

로렌스가 턱짓하자 패트리샤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집사는 난감한 듯 패트리샤와 로렌스를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도련님, 패트리샤 공녀님입니다. 예를 갖추셔야 합니다. 그리고 죄송하지만, 제겐 공녀님을 데려갈 권한이 없습니다.”

집사의 말에 로렌스는 그를 잠시 노려보다 휙 하고 등을 돌렸다.

저벅저벅.

순식간에 거리를 벌리는 로렌스에 패트리샤는 당황한 듯 집사에게 서둘러 인사하고는 그를 따라 걸었다.

다다다다.

노란 옷을 입고 종종걸음으로 로렌스를 따라가는 패트리샤의 뒷모습은 마치 갓 태어나 제 어미를 따라다니는 병아리 같았다.

로렌스가 흘긋 노려보자 잠시 걸음을 멈췄지만 패트리샤는 이내 다시 그의 뒤를 쫓았다.

그 가벼운 발소리에 로렌스는 다시 한번 한숨을 내쉬었다.

* * *

“하아….”

결국 로렌스는 한숨도 자지 못했다.

그가 거칠게 얼굴을 쓸어내리더니 방을 나섰다.

“아, 안녕하세요.”

문을 열자마자 패트리샤와 마주친 로렌스는 작게 고개만 끄덕였다.

어렸을 적엔 바보 같을 정도로 착했는데.

로렌스는 어느 순간부터 지독하게도 자신을 따라다니며 괴롭히던 패트리샤를 떠올리고 숨을 들이켰다.

그 기억만으로도 괴로운 듯.

“…….”

그렇게 끔찍했으면서도 로렌스가 패트리샤의 괴롭힘을 그저 혼자 참아낸 이유는 그녀가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잘 주무셨나요?”

패트리샤가 자신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로렌스가 불편하다는 듯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화제를 돌렸다.

로렌스는 고개를 끄덕이며 시선을 돌렸다.

“식사하러 가지.”

그렇게 걸음을 옮긴 로렌스의 뒤를 패트리샤가 따라 걸었다.

저벅, 저벅.

“하아….”

그렇게 계단을 내려와 다이닝룸으로 향하던 중 패트리샤가 한숨을 흘렸다.

작은 숨소리였지만 발소리를 제외한 소음이라곤 하나도 없었던 고요한 복도 위에 떨어진 그녀의 한숨 소리는 로렌스의 걸음을 멈춰 세우기에 충분했다.

“왜 그러지?”

“아, 그게….”

패트리샤가 당황한 듯 눈을 굴리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앞으로의 일이 조금 걱정돼서요.”

“…….”

“전 이제 돈도 없고 집도 없는데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 살아갈 수는 있을지.”

패트리샤가 흘긋 시선만 들어 로렌스를 살피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아는 사람도 하나 없는데.”

패트리샤는 곧 울 듯 목소리가 떨렸다.

“제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절 그렇게 못 잡아먹어 안달인지 모르겠어요.”

“…….”

“관계를 개선해보려 아무리 노력해봐도 미운털이 제대로 박혔는지 소용도 없어요.”

패트리샤가 기어코 제 눈을 손으로 가려버렸다.

“…패트리샤?”

“지난번엔 집사가 아니었다면 정말 두드…. 맞을 뻔했어요. 아버지도 매일같이 모욕적인 말들로 숨통을 조여오시고. 절 돈 많은 노인에게 팔아버리겠다고. 흑흑.”

기어코 그녀의 어깨가 작게 떨려왔다.

쯧.

로렌스는 작게 흐느끼는 패트리샤의 모습에 당황한 듯 인상을 찌푸렸지만 이내 한 발짝 가까이 다가가 그녀를 살며시 품에 안았다.

“자책하지 마. 네가 잘못한 건 없으니까.”

로렌스는 손을 움직여 그녀의 어깨를 도닥여주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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