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
“넌 네 최선을 다했어.”
패트리샤가 이토록 제 마음을 드러낸 적이 있었던가?
로렌스는 억지로 울음을 참으려 애쓰는 패트리샤가 안타까웠다.
“그러니 네 잘못이 아니야.”
그는 안타까움에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다시 한번 참아내었다.
하기야 괜찮다고 애써 웃으며 말했지만, 그게 진실일 리가 없었다.
두려웠음에도 그저 혼자 참아내려 웃어 보였던 것뿐일 테지.
로렌스는 그 어린 나이부터 사랑받고 싶어 아등대던 패트리샤를 기억했다.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제 아비에게 혼나던 패트리샤는 속이 상했을 만도 한데 금세 웃으며 다시 제 아비에게 매달렸다.
패트리샤는 매 순간 최선을 다했다.
“공작이 나쁜 거야. 비겁한 거고.”
패트리샤가 정부의 아이라 해도 패트리샤에겐 잘못이 없었다.
그녀가 택하고 싶어 그렇게 태어난 것도 아니었으니.
잘못을 따지자면 공작에게 있었다.
“그저 제 잘못을 인정하기 싫으니 괜히 널 미워하는 거야. 그러니 괜히 혼자 상처받지 마.”
“그게 무슨….”
“나도 알아. 네가 공작부인의 자식이 아닌 정부의 자식이라는 거.”
순간 패트리샤가 충격받은 듯 어깨를 흠칫거렸다.
그리고는 그만 놓아달라는 듯 로렌스의 가슴을 밀었다.
“공자님, 그게 무슨?”
“…처음부터 알고 있었어.”
로렌스는 잠시 패트리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너와 내가 처음 만난 그날. 그날 보다 훨씬 이전부터 알고 있었어.”
“…제가 정부의 자식이라는 걸요?”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당황한 듯 패트리샤의 눈이 잘게 떨렸다.
제 치부를 들켜 자존심이 상한 것 같았다.
“하지만….”
패트리샤가 무슨 말을 하려는 듯 입을 열었다 다시 닫아버렸다.
“그래서….”
패트리샤는 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가 어려운 듯 여러 번 말을 더듬었다.
그녀의 눈에 깊은 그늘이 드리웠다.
“패트리샤. 나도 아는 체하고 싶진 않았지만….”
“…….”
“하아, 원한다면 내가 도와줄게.”
“…혼자 있고 싶어요.”
패트리샤가 작게 한숨을 내쉬며 뒷걸음질 쳤다.
“내가 안다고 변하는 건 아무것도 없어.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을 거야. 맹세해.”
“…….”
“그간 네게 말하지 않은 건…. 미안. 미안해.”
다급하게 변명하던 로렌스가 사과를 뱉어냈다.
그녀에게 말하지 않은 것은 그 나름의 배려였지만, 어쨌거나 패트리샤 입장에선 기분 나쁠 일이었다.
원치 않음에도 제 치부를 남에게 들켰으니.
“…패트리샤, 네가 원한다면 내 비밀도 알려줄게.”
이리 당황하는 패트리샤를 보니 로렌스는 그제야 제가 실수했음을 느꼈다.
애초에 그 말을 꺼내는 게 아니었다.
“그럼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아는 거잖아. 응?”
“…죄송해요.”
그러나 패트리샤는 죄송하다는 말만을 남기고 뒤돌아섰다.
다다다다.
다급히 계단을 올라가는 소리가 고요한 복도에 울렸다.
탁.
그리고 그 소리의 끝에서 문이 굳게 닫혀버렸다.
더는 얘기하고 싶지 않다는 듯.
더는 얼굴도 보고 싶지 않다는 듯.
“젠장.”
로렌스의 입에서 거친 욕지거리가 튀어나왔다.
하지만 후회해봤자 돌이키기엔 이미 늦었을 뿐이었다.
혼란과 실망을 담은 패트리샤의 눈이 떠올라 로렌스는 제 주먹을 힘줘 쥐었다.
* * *
탁!
“…뭐야?”
심장이 빠르게 두근거렸다.
“내가…. 아니, 패트리샤가 정부의 자식이었다고?”
소설에서는 나온 적 없던 내용이었다.
패트리샤가 정부의 자식이란 얘기는 읽어본 적 없었다.
“…….”
왜지?
왜 소설 속에서 서술도 되지 않은 설정이 있는 거지?
“그보다, 로렌스는 그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과연 로렌스의 말이 맞을까, 하고 잠시 고민했지만 나는 이내 무의미한 고민을 그만두었다.
소설 속 게르하르트 가문은 여러 암흑조직을 움직이고 있었다.
그중 정보 길드도 있었고.
아무리 가문 내 비밀정보라 해도 게르하르트 가문이 모르는 일은 없었다.
그러니 만약 패트리샤가 정부의 아이라면 로렌스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다른 가문의 큰 약점은 언젠가 유용하게 쓰일 정보일 테니.
“그럼 패트리샤도 알고 있었을까? 자신이 정부의 자식이라는 걸.”
‘나도 알아. 네가 정부의 아이인 거.’
로렌스가 하던 말로 미뤄보아 패트리샤도 알고 있던 듯했다.
“그래서 그랬구나.”
게다가 로렌스의 말을 믿을 수밖에 없는 또 하나의 이유가 있었다.
모르간, 바버, 밀럼의 외양.
그들은 도저히 같은 가족이라곤 할 수 없을 정도로 패트리샤와는 딴판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과 공작부인 사이에서 어떻게 패트리샤 같은 아이가 태어날 수 있었나 했더니.
그제야 모든 게 이해가 되었다.
그 집안에서 왜 패트리샤 혼자 따돌림을 당했었는지.
모르간, 바버, 밀럼이 왜 그토록 패트리샤를 미워하고 무시했었는지.
왜 저들끼리만 가족이라는 듯 굴었는지.
틈만 나면 내게 천박하다던 모르간의 말이 뭘 뜻하는 것인지.
드디어 이해됐다.
저와 함께 하는 것이 아니라면 패트리샤를 어느 곳에도 나가지 못하게 막았던 헤라르일라 공작.
공작이 그렇게 절박하게 패트리샤를 통제했던 이유가 제 치부가 들어날까였나보다.
“하? 그래서 그런 거라고?”
이건 너무 억울하지 않은가?
솔직히 잘못을 따지자면 온전한 헤라르일라 공작의 잘못이 아닌가.
그러게 왜 바람을 피우고 정부를 만나, 아이를 만든단 말인가.
게다가 제 치부를 숨기고 싶어 정부의 아이를 본처와의 자식인 것처럼 호적에 올리고.
그랬으면서도 공작은 패트리샤를 제 아이로 인정해 주지 않았다.
매일 구박하고 무시했다.
“대체 뭐 하는 사람이야?”
잘못했을 땐 그에 합당한 책임을 져야 했다.
근데 책임은 조금도 지기 싫어 그 조그만 제 딸에게 모든 잘못을 전가하고 그렇게 구박해 왔단 말인가?
나는 그동안 그들의 냉대가 패트리샤가 부린 난동의 대가인 줄 알았다.
근데 그게 아니라 패트리샤는 처음부터 이 가족들에게 골칫덩이였다.
그들에게 패트리샤가 단 한 순간이라도 가족이었던 적이 있을까?
너무한다고 생각은 하고 있었지만, 쓰레기일 줄이야.
똑똑.
“패트리샤, 문 좀 열어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을 그때 로렌스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얼굴 보고 얘기하자.”
어째서인지 재촉하는 로렌스에 서둘러 문을 열었다.
그새를 참지 못하고 문을 두드리려 했는지 로렌스의 주먹이 허공에서 멈춰있었다.
“…패트리샤.”
“아, 죄송해요. 잠시 놀라서요.”
로렌스가 날 걱정했는지 그의 표정이 조금 슬퍼 보였다.
하긴.
갑자기 혼자 있겠다며 자리를 떴으니 그도 당황스러웠겠지.
하지만 그 앞에서 말실수라도 한다면.
내가 패트리샤가 아니라는 걸 들켜버리기라도 한다면.
당연히 알고 있어야 할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걸 들킨다면.
그렇게 로렌스의 의심을 사기라도 한다면 아주 골치 아파질 것이다.
작에 나와 있지 않던 패트리샤의 비밀을 알게 된 순간, 로렌스의 곁을 벗어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의 앞에서 입을 여는 순간, 바로 실수할 것 같았다.
“아냐. 내가 미안해.”
그래서 혼자 있을 수 있는 방으로 돌아온 것뿐인데.
“…네?”
“숨기고 싶었을 사실이라는 거 잘 알아. 미안.”
어째서인지 로렌스가 사과했다.
“그간 모른 체하고 있었던 건. 널 속이거나 기만하려던 게 아니고….”
얘가 왜 이래?
나는 이게 무슨 상황인지 이해하지 못하고 바보같이 눈만 껌뻑이었다.
“하아, 미안해.”
갑자기 뭐가 미안하다는 거지?
아니, 로렌스가 갑자기 왜 내게 사과하냐는 말이었다.
“내가 어떻게 하면….”
“….”
“화가 풀릴 것 같아?”
로렌스는 어딘지 조급해 보였다.
화났다고 말하면 무릎이라도 꿇을 것처럼 보이는 로렌스에 머리가 복잡해졌다.
이유는 모르겠으나 슬퍼 보이는 로렌스의 모습에 죄책감이 들었다.
“저는….”
바로 조금 전까지만 해도 불쌍한 척 그를 속여 돈을 빌리려 했는데.
만약 우리 둘 중 사과해야 할 사람이 있다면 그건 분명 나일 텐데.
로렌스가 왜 내게 사과를 하는 걸까?
애써 무시하고 있던 양심이 콕콕 찔려왔다.
“전 화 안 났는데요?”
“거짓말.”
로렌스가 다시 한숨을 쉬었다.
“우리 가문은 비밀길드를 운영하고 있어. 그중 정보 길드도 있고.”
비밀이라면서.
그걸 왜 나한테 말해?
“그래서 알게 된 거야. 그렇지만 난 네 얘기로 아무 짓도 안 했어. 널 협박할 생각도 네 가문을 협박할 생각도 결코 없었어.”
“협박?”
“맹세해. 그냥 네가 너무 힘들어 보이길래 위로해 주려다가….”
로렌스는 이 말을 내게 한 것을 지독히 후회하고 있는 듯했다.
“저 소공작님.”
내 부름에 로렌스가 시선을 들어 날 바라봤다.
“만약 제가, 이 비밀이 새어 나가게 된다면 어떻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실대로 말씀해주세요.”
“…외도자체가 범법행위니, 공작은 죗값을 치러야 할 테고. 가문의 명성이 흔들리겠지. 사교계에 더는 참여하지 못할 테고. 너는 귀족 사회에서 매장되겠지.”
“죗값이라는 건 재판이 열리는 건가요?”
“맞아.”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어딘지 조금 풀이 죽어있었다.
“소공작님!”
나는 시선을 내리깐 로렌스를 와락 안았다.
“전 정말 아무렇지도 않으니 신경 쓰지 마세요.”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그에게 웃는 모습을 들킬 것만 같았으니.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웃음이 올라오려 했지만, 입술을 있는 힘껏 깨물며 참아냈다.
“전 정말 괜찮아요.”
조금 전 그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의 등을 도닥이었다.
부디 그가 내 목소리에 묻어있는 웃음기를 알아채지 못했길 바라며.
열심히 그의 등을 도닥이었다.
“되려 고맙게 생각하고 있어요.”
정말 고맙지 않을 수 없었다.
그 덕에 빛이 보이는 듯했으니.
“쫓겨난 절 아무런 조건 없이 받아주셨잖아요. 불청객이었음에도 시녀까지 배정해주시고, 약까지 챙겨주시고.”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누가 뭐래도 소설 속 남자주인공이었다.
모든 독자에게 사랑받는 남자주인공.
“소공작님은 정말 좋으신 분이에요.”
로렌스가 이토록 사랑스러웠던 적은 맹세코 처음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