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31화 (31/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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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흠!”

타앗.

“꺄악!”

순간 들려오는 인기척에 로렌스가 거칠게 날 떼어냈다.

덕분에 까치발을 들고 그를 안고 있던 나는 우스꽝스럽게 넘어질 뻔했다.

물론 엉덩이가 바닥에 닿기 전에 로렌스가 잡아주었지만.

“시몬, 무슨 일이지.”

로렌스는 이 상황이 당황스러운 듯 내가 균형을 잡자 서둘러 제 손을 떼어내며 내게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는 그답지 않게 말까지 더듬었다.

“저, 방해해서 죄송하지만, 헤라르일라 공작님께서 오셨습니다.”

“헤라르일라?”

시몬과 로렌스의 시선이 동시에 내게 꽂혔다.

시몬은 날 원망하는 듯 보였고, 로렌스는 내가 걱정되는 듯 보였다.

“내가 가보지.”

“…소공작님께서요?”

로렌스의 말에 시몬이 마음에 들지 않는 것처럼 되물었다.

“헤라르일라 공작님께선 패트리샤 공녀님과 만나길 원하시는 것 같습니다.”

로렌스의 매서운 눈빛에도 시몬은 끝까지 제 할 말을 뱉었다.

아무래도 제 가문에, 로렌스에게 피해가 갈까 걱정하는 눈치였고 그러니 내게 직접 내려가라는 말이었다.

“시몬.”

로렌스가 작게 시몬을 불렀다.

그제야 시몬이 이 이상 로렌스의 말을 거역할 수 없다는 걸 깨달은 듯 입을 닫고 물러섰다.

“소공작님, 아니에요.”

나는 금방이라도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가버릴 듯한 로렌스를 불러세웠다.

“저도 이 이상 폐 끼치고 싶지는 않아요.”

“하지만….”

“아까도 말씀드렸다시피 이미 많이 도움을 받았는걸요. 아버지는 제가 직접 뵈러 갈게요.”

흘긋 바라본 시몬은 이리 나와주는 내가 무척 고마운 듯 보였다.

“그렇지만 방금도.”

로렌스는 뭔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열었으나 시몬을 의식하고 말끝을 흐렸다.

“쯧, 그럼 나도 같이 가. 그건 돼지?”

로렌스는 생각보다도 날 더 많이 걱정하고 있는 듯했다.

귀찮을 텐데.

하지만 어쨌거나 헤라르일라 공작저엔 나 혼자 가게 될 일이었다.

공작에게 할 말은 그때 가서 해도 될 일이었다.

“네.”

* * *

똑똑.

응접실 문 앞에 서 있던 시종이 가볍게 문을 두드렸고 잠시 후 그가 문을 열어주었다.

로렌스는 아무래도 내가 신경 쓰이는지 힐긋 날 바라봤다.

어떤 말도 하지 않았지만 괜찮겠냐고 묻는 듯했다.

“괜찮아요.”

나는 작게 웃어 보이며 속삭였다.

“패트리샤!”

문이 열리고 앉은 자리에서 황급히 일어서는 헤라르일라 공작이 보였다.

“이게 무슨!”

내게 호통치면서도 헤라르일라 공작의 시선은 단 한 순간도 날 향하고 있지 않았다.

오직 로렌스.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의 시선을 따라 나도 로렌스를 올려다보았다.

왜 때문인지 로렌스는 제 신코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뭔가 생각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러다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들고 헤라르일라 공작을 바라봤다.

그제야 공작도 서둘러 로렌스에게서 시선을 떼고 날 바라봤다.

“외간 남자와 밤을 같이 보내다니! 소문이라도 난다면 어떻게 책임지려고!”

“…….”

헤라르일라 공작은 소리를 지르며 나를 책망했지만, 어째서인지 그의 입꼬리는 즐거운 듯 올라가 있었다.

“아무리 네가 어리석다 해도 이토록 아둔할 줄이야! 사교계에 염문이라도 돈다면, 너뿐 아니라 소공작에게도 피해가 간다는 걸 몰랐단 말이냐?”

공작의 콧구멍이 작게 벌렁거렸다.

웃음이라도 참는 사람처럼.

왜 저래?

“만에 하나 소공작과 네가 혼인하지 않는다면, 소공작은 공녀를 갖고 놀았다며 소문이 날 테고….”

헤라르일라 공작이 거기까지 말한 순간.

그제야 난 공작의 콧구멍이 벌렁거렸던 이유를 얼핏 깨달았다.

소공작의 약점을 잡아 그와 날 혼인시키려는 생각인 듯했다.

그래.

돈만 많은 늙은이보다야 돈도 많고 가문의 명성과 권력도 있는 소공작이 좋겠지.

“아니….”

아니, 아무리 그래도 갈 곳 없던 제 딸에게 은혜를 베푼 이에게 고마워하지는 못할망정 그 도움을 약점 삼으려 한다고?

“걱정….”

“걱정하지 마세요.”

너만 아니면 소문 날일 없다고 말하려던 순간.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나와 같은 말을 뱉은 로렌스에 그를 올려다봤다.

혹 그도 나와 같은 생각을 한 걸까?

한껏 진지한 표정의 로렌스를 보니 화가 난 것 같기도 했다.

하긴.

나 같아도 어이없지.

갈 데 없는 불쌍한 이를 도와줬는데 이게 무슨 봉변이란 말인가.

물에서 건져주니 보따리 내놓으라던 그 속담이 딱 지금 아닌가.

그래, 그가 한번 시원하게 화를 내주는 것도 좋을 듯싶었다.

그래야 저 욕심 많고 비열한 헤라르일라 공작이 사람 무서운 줄을 알지.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네?!”

순간 빽 하고 소리를 질렀다.

로렌스의 표정이 너무 진지했고 낮게 깔린 그의 목소리도 더 없이 진심을 담고 있었기에.

그래, 이 상황이 너무 진지해 순간 착각하고 말았다.

로렌스가 말하는 책임이. 그러니까 결혼으로 책임지겠다는 소린 줄 알고 한껏 눈을 치켜뜨고 혼자 오두방정을 떨고 말았다.

순간 로렌스가 와락 인상을 찌푸린 채 날 바라봤다.

기묘한 것을 마주했을 때의 그 얼굴이었다.

응접실에 흐르는 무거운 정적에 서둘러 표정을 가다듬었다.

“…죄송해요. 마저 말씀하세요.”

하긴 로렌스가 나와 결혼하겠다고 말할 리가 없지.

뭐, 소문이 돌지 않게 책임지겠단 얘기일 듯했다.

“패트리샤와 혼인하겠습니다.”

“미쳤나 봐!”

퍽!

순간 더는 참지 못하고 바로 내 옆에 서 있던 로렌스의 팔뚝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순식간에 로렌스가 내게서 반 발자국 멀어지며 눈살을 찌푸렸다.

“패트리샤! 가만있거라! 네가 감히 어디라고 끼어들어!”

헤라르일라 공작이 로렌스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제가 원하던 답을 놓치고 싶지 않은 듯 필사적으로 보였다.

“소공작. 우선 앉아서 마저 얘기하죠!”

헤라르일라 공작이 로렌스의 허리에 손을 올리며 그를 소파로 이끌었다.

“안돼!”

다급해진 나는 덥석 그의 옷깃을 부여잡았다.

“가지 마!”

“스읍!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공작이 눈을 부라리며 협박했지만 나는 더욱 그의 옷깃을 쥔 손에 힘을 주었다.

로렌스는 격한 내 반응에 놀란 듯했으나 이내 생각을 마쳤는지 내가 쥐고 있던 제 팔을 몸쪽으로 끌어당겼다.

내 손을 떨어뜨리려는 행동이었다.

덥석.

“나랑 잠시만 얘기해요. 잠시면 되니까….”

“…….”

“스읍!”

헤라르일라 공작은 다시 한번 이상한 소리를 내며 협박했고 로렌스의 허리를 힘줘 당겼다.

“헤라르일라 공작님.”

그러나 결국은 로렌스의 힘에 의해 헤라르일라 공작의 손은 허공으로 떨어지고 말았다.

“잠시 패트리샤와 대화 좀 해보겠습니다.”

그가 날 택했다는 사실에 기분이 좋아 공작에게 보란 듯 웃어주고 싶었지만, 로렌스에 이끌려 순식간에 응접실 밖으로 나와버렸다.

탁.

문이 닫히고 로렌스는 할 말이 뭐냐는 듯 빤히 날 바라봤다.

“결혼이라니? 갑자기 무슨 소리예요?”

“공작이 원하는 게 그거잖아. 너와 나의 결혼.”

“그래서요? 근데 그걸 왜 소공자님께서 신경 쓰시는 건데요?”

“뭐?”

“제가 원하지 않아요.”

순간 로렌스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소공작님도 원하지 않으시고요. 절 싫어하시잖아요.”

“…….”

날 싫어하긴 하는지 로렌스는 입을 다문 채 말을 아꼈다.

소설 속 그는 패트리샤를 떼어놓기 위해 여자주인공과 결혼을 약속했다.

그 정도로 나를 증오한다는 거겠지. 한데 그런 나와 결혼이라니.

“나와 결혼하면 더는 공작도 네게 함부로 하지 못할 거야. 네 형제도 마찬가지고.”

“…그것 때문에 나와 결혼해 주겠다고요? 소공작님과 결혼하면 내가 더는 괴롭지 않을 테니?”

로렌스가 고개를 끄덕였다.

“…….”

미친 거지?

미쳐버린 거야.

이렇게 진지한 얼굴로, 날 걱정해 주면 흔들리잖아.

그와 지독하게 엮여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단 생각이 순간 머릿속을 스쳐 갔다.

“그럼 소공작님은요?”

“무슨 뜻이지?”

“사랑하지도 않는 나와 평생을 살 수 있겠어요? 평생?”

“…상관없어. 어차피 결혼을 사랑으로 하는 사람은 없으니까.”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전 싫어요. 전 절 사랑하지 않는 사람과 평생 살 자신 없어요.”

“…….”

“그리고 저도 다 방법이 있어요. 그러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돼요.”

“방법, 방법이 뭔데?”

“아무튼 그런 게 있으니까! 소공작님은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세요. 괜히 저 때문에 희생할 생각 마시고요.”

어째서인지 로렌스의 표정이 복잡해 보였다.

“전 정말 소공자님께 피해 끼칠 생각 없어요. 앞으로는 귀찮게 하지 않겠다고 약속까지 한 마당에 이런 일에 말리게 해서 미안하지만. 진심으로요.”

“정말 괜찮겠어? 정말 방법이 있는 거야?”

나는 걱정하지 말라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아버지께는 제가 잘 말해 볼 테니 소공자님은 그만 가보세요.”

“내가 가도 정말 괜찮겠어? 정말 네가 내게 원하는 게 그거야?”

“네. 저는 들어가 아버지께 소공자님께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다 전할 거에요.”

“하아. 그래. 말 번복하는 거 싫어하지만, 생각 바뀌면 다시 찾아와.”

로렌스는 여전히 내가 미덥지 않은 듯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네, 감사해요.”

“…….”

“소공자님. 걱정하지 말고 가세요. 나머지는 제가 알아서 할게요.”

나는 다시 한번 웃으며 단호하게 생각보다 마음이 여린 남자의 등을 밀어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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