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2
탁.
마차 문이 닫히고 이내 그 좁은 공간은 헤라르일라 공작의 씩씩대는 숨소리로 가득 차 버렸다.
히이잉.
말 울음소리를 시작으로 마차가 움직였고 코너를 돌아 게르하르트 공작저가 보이지 않게 된 순간.
“패트리샤!!”
참고 있던 그의 고함이 터져버렸다.
“이 멍청하고 쓸모없는 것! 네가 무슨 일을 벌인 건지 알기는 하는 거냐?!”
시뻘겋다 못해 검게 변한 얼굴로 헤라르일라 공작은 쉬지 않고 소리쳤다.
눈을 찌를 듯 삿대질까지 해가며.
나는 공작에게 붙잡혀 얼얼한 팔목을 쓸어내렸다.
공작에게 소공작과 결혼하기 싫다고 말했다고 하는 순간 얼굴이 새빨갛게 변한 헤라르일라 공작이 내 손목을 잡고 공작저를 빠져나왔다
그리고 짐짝을 싣듯 마차 안으로 던져버렸다.
그 덕에 팔목과 다리를 조금 삔듯했다.
“아버지.”
“입 닥쳐! 아버지라 부르지도 말 거라! 이 모자란 것, 넌 어떻게 하나 쓸모가 없는지! 너 같은 게 내 피라는 사실이 한탄스러울 뿐이다!”
“하아, 저도 아버지만큼이나 한탄스럽답니다.”
나는 이마를 짚은 채 깊은 한숨을 쏟아냈다.
“뭐?”
“제가 모자란 것도 쓸모없는 것도 다 제가 공작부인이 아닌 정부의 자식이니 당연한 일이겠죠.”
그 순간 헤라르일라 공작이 기겁하며 내 입을 틀어막았다.
“닥치거라. 누가 들으면 어찌하려고.”
그러면서 누가 들을까 걱정된다는 듯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이 마차 안에 우리 둘 말고 누가 더 있다고.
낮말은 새가 듣고 밤말은 쥐가 듣는다던 말이 비유라는 걸 모르는 사람처럼 개미 한 마리라도 있을까 걱정되는 듯 열심히도 두리번거렸다.
“풉!”
입을 틀어막는 공작의 손길에서 배려라고는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의 두꺼운 손등에 상처를 내고 나서야 숨을 쉴 수 있었다.
“닥치거라. 그 얘기는 꺼내지도 말라고 했을 텐데.”
“하지만, 하지만요 아버지. 그런 제가 어찌 소공작님을 속이고 그와 결혼을 할 수 있겠어요. 만에 하나 그가 알게 된다면….”
“그러니 더욱 그에게 시집을 가야지. 네가 게르하르트 가의 사람이 되면 설령 그가 알게 된다 해도 제 얼굴에 먹칠할 짓은 하지 않을 테니 말이야.”
헤라르일라 공작이 빠르게 속삭였다.
어떻게든 제 약점을 숨겨내려 애쓰는 모습에 웃음이 나오려 했다.
이미 로렌스는 다 알고 있는데.
“하아, 전 이제 그만하고 싶어요.”
“뭐?”
“모두를 속이고 사교계를 드나드는 것도. 언제 들킬지 몰라 심장 졸이는 것도 다 그만두고 싶어요.”
“하? 그만두다니! 대체 어떻게 그만두겠다는 거냐?”
공작은 황당하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사실 전 결혼에 큰 뜻은 없어요. 결혼보다는 그저 수도를 떠나 혼자 살고 싶죠.”
“말도 안 되는 소리.”
“말이 안 되지는 않죠.”
“…….”
“정부의 자식이라는 이유로 가족들에게 미움받는 것도 더는 못 견디겠어요. 사실 따지고 보면 그건 제 잘못은 아니잖아요?”
공작의 표정이 점점 굳어갔다.
“요새는 종종 그런 생각을 해요. 차라리 다 터뜨리고 이곳을 떠나면, 그편이 더 마음 편하지 않을까? 이곳에선 집 밖을 나가는 것조차 제 맘대로 할 수 없잖아요.”
“…….”
“평생을 눈치 보며 마음 졸이며 살았잖아요. 근데 소공작님과 결혼해서 또 남은 평생 그를 속이며 살아야 한다니.”
나는 질린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사실 제가 지금껏 아버지의 명을 따른 건 순전히 아버지를 위해서였어요. 제가 사생아라는 게 알려지면 아무 미련 없는 저보다야 아버지와 오빠들에게 피해가 크잖아요?”
“패트…”
“그런데 제게 돌아온 게 결국 뭐였나요? 아버지와 오라버니들의 무시와 경멸, 그뿐이었죠.”
“그만, 그만하거라.”
헤라르일라 공작이 머리가 아픈 듯 눈살을 찌푸리며 손을 휘저었다.
“사실 복수, 제가 당했던 만큼 돌려주는 것도 재미있을 것 같아요.”
“말도 안 되는 소리.”
헤라르일라 공작이 우습다는 듯 입을 비죽였다.
“네가 우리 가족의 흠을 떠벌리겠다고? 그게 네 얼굴에 먹칠하는 일이라는 건 모르는 거냐?”
“말했잖아요, 상관없다고.”
“미쳤군. 완전히 돌았어.”
공작이 경멸하듯 날 바라봤다.
“네 방에 갇혀 있다 보면 제정신으로 돌아오겠지.”
“평생을 갇혀 지냈는데, 새삼스러울 건 없죠.”
“밥도 물도 없이 있다 보면 생각이 바뀔 거다.”
“절 가둬두면 제가 말하지 못할 것 같으세요?”
“하, 네 방에 갇혀 누구에게 말할 생각이냐. 저택의 사용인들? 그도 아니면 네 방의 인형을 붙들고 얘기할 생각이냐?”
헤라르일라 공작이 우습다는 듯 비아냥거렸다.
“제가 소공작과 무슨 얘기를 나눴다고 생각하세요? 굳이 응접실을 나가서.”
“…뭐?”
그제야 한없이 여유롭기만 하던 헤라르일라 공작의 얼굴에 금이 갔다.
“뭐, 그에게, 다 말하기라도 했느냐?”
그는 여유로운 척하고 싶은 것 같았지만 이미 말을 버벅대기 시작했다.
“편지를 쥐여줬습니다. 제가 이틀 이내로 다시 게르하르트 공작저를 방문하지 않는다면 뜯어서 읽어보라고 했습니다.”
순간 공작의 입이 살짝 벌어졌다.
“그 편지에 뭐라고 썼을지는 아버지도 잘 아실 테죠.”
“하? 네가 괜한 허세를 부리는 거지. 방에 갇히기 싫으니, 괜히 말도 안 되는 얘기를 지어내 날 협박하려는 거지. 그럼! 말도 안 되지. 그럼 그 편지는 대체 언제부터 작성했던 거고 언제부터 지니고 다녔다는 말이냐?”
공작은 잠시 뭔가를 생각하는 듯하더니 내 말이 우습다는 듯 따져 물었다.
사실 그의 말이 맞았다.
편지는 있지도 않았고 로렌스에게는 어떤 부탁도 하지 않았다. 그에게는 이 일과 관련해 아무런 언질도 주지 않았으니.
헤라르일라 공작의 말이 맞았다.
그가 날 방에 가두고 며칠간 내게 아무런 음식을 주지 않는다고 해도 로렌스가 알 길은 없었고 그를 통해 내가 사생아라는 사실이 밝혀질 일도 없었다.
“뭐 맘대로 생각하세요.”
하지만 이 상황에서 아쉬운 건 공작이지 내가 아니었다.
“전 상관없으니.”
내가 본 공작은 모든 것에 완벽하고 싶어 했다.
가문의 명성을 중요시했고 제 평판을 무엇보다 신경 쓰는 이였다.
제 치부를 숨기기 위해 발버둥 치는 이였다.
그러니 아무리 이성적으로 생각하고 싶어도 그럴 수 없을 테고 결국은 꼬리를 내릴 것이었다.
나는 부러 태평스러운 표정을 지어 보였다.
조급하지 않다는 듯.
사실 조급하지 않은 건 정말 사실이었다.
결국 헤라르일라 공작은 내가 원하는 대로 움직일 테니.
“…원하는 게 대체 뭐냐.”
오 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무렵, 안절부절못하던 헤라르일라 공작이 입을 열었다.
“내가 뭘 어찌하면 네가 마음을 바꿀지 말해 보거라.”
윽박지르던 모습은 어디 가고 공작은 한껏 부드러운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 모습에 웃음이 터질 뻔했다.
사람이 이렇게 한순간에 태도를 바꾸다니.
“그래, 더는 널 무시하지 않으면 마음이 풀어지겠니?”
무시.
난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어차피 이젠 무시하고 싶어도 그러지 못할 테니.
“그럼 이 아비가 널 더 사랑해주면 되겠니? 물론 그간 널 사랑하지 않았다는 말은 결코 아니란다. 난 내 자식 중 널 가장 사랑했단다. 표현, 표현을 못 해서 그렇지 내 말은 진실이란다.”
사랑.
절로 눈살이 찌푸려졌다.
내가 뭣 하러 헤라르일라 공작의 사랑을 바란단 말인가.
게다가 그가 제 자식 중 날 가장 사랑했다니.
그의 사랑을 두 번 받았다가는 우울증으로 미쳐버릴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럼….”
헤라르일라가 내가 무엇을 원할지 알아내려는 듯 서둘러 머리를 굴렸다.
아니, 진짜 바본가?
조금 전에도 말하지 않았던가.
이곳을 떠나고 싶다고.
뭐, 내 말은 귀담아듣지도 않았다는 거지.
“사랑하는 딸아, 네가 말해 보아라. 이 아비가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들어줄 테니.”
헤라르일라 공작이 내 손을 덥석 붙잡았다.
조금 전처럼 힘을 줘 세게 붙잡은 건 아니었지만 답답한 건 매한가지였다.
내가 싫다는 듯 살짝 손을 몸쪽으로 당기자 헤라르일라 공작이 서둘러 손을 놔주었다.
“뭐든 말해 보아라.”
“독립하고 싶어요.”
“뭐?”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나가 혼자 살고 싶다고요.”
헤라르일라 공작은 내가 하는 말을 이해하지 못한 듯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제가 살 집을 구해주세요. 돈도 좀 주시고요.”
“…독립.”
공작이 잠시 고민했다.
아마 날 정말 믿을 수 있을지 머리를 굴리는 듯했다.
“그렇게 해주면 더는 딴생각하지 않을 것이나?”
“아마? 그리고 전 원치 않는 결혼은 딱 질색이니 괜히 당황스러울 상황은 만들지 않으셨으면 좋겠네요.”
“그래, 결혼이 싫다는 거지. 네가 싫다면 나도 억지로 시키지 않겠다.”
말을 마친 공작이 꿀꺽 침을 삼켰다.
“그럼 독립시켜주고 네 마음대로 결혼을 택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가 다시 한번 꿀꺽 침을 삼켰다.
“네 화가 풀리겠니?”
공작이 이토록 내게 친절했던 적이 있었을까?
간절히 애원하는 공자의 모습을 보는 건 조금 유쾌한 일이었다.
나는 그에게 더 요구할 게 있을지 잠시 고민해보았다.
“딸아, 혹 더 바라는 게 있다면 편히 말하거라.”
“흐음….”
“그럼, 그럼 이걸로 된 거니?”
“일단은요.”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끄덕였고 그제야 공작은 크게 숨을 들이마시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