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
히이잉.
말의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의 속도가 천천히 느려졌다. 아무래도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도착한 듯싶었다.
마차가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자 공작이 허둥대며 문을 열었다.
잘게 흔들리는 눈동자와 서둘러 자리를 피하려는 모습에서 공작의 복잡한 심경을 엿볼 수 있었다.
“…….”
공작이 뭐 다른 생각을 하고 있는 건 아닐지 그의 뒤통수를 유심히 바라보다, 그와 눈이 마주쳤다.
순간 공작은 흠칫 몸을 떨더니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마차에서 내리는 걸 도와주려는 듯.
“혼자 내릴게요.”
나는 공작의 손을 바라보다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공작에게 바라는 건 이런 게 아니었다.
이미 늦을 대로 늦어 버린 관심도 두려움에서 비롯된 거짓 사랑도 내가 바라는 건 아니었다.
“그, 그럼. 그러겠니?”
공작이 어색하게 손을 거두며 자리를 내주었다.
“아, 참. 그래, 패트리샤. 피곤하겠구나.”
“네?”
“집이 아닌 곳에서 얼마나 불편했겠니? 네 방에서 쉬고 있으련?”
공작은 지금의 대화가 불편한 듯 나를 방으로 보내려 했다.
혼자서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걸까? 아니면 오라버니들을 불러들여 지금의 상황을 어떻게 헤쳐 나가는 게 좋을지 의논하려는 것일지도 몰랐다.
“아버지.”
어쩌면 아직도 날 의심하고 있는지도.
“응? 패트리샤, 뭐 할 말이 있는 게냐?”
“저희의 대화가 다 끝난 건 아니라고 생각하는데요? 그렇죠?”
그 물음에 공작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지는 마세요. 게르하르트 소공작에게 늦지 않게 가야 하니깐요.”
공작이 침음을 흘렸다.
“그럼 쉬고 있을 테니, 늦지 않게 불러 주세요.”
나는 공작을 뒤로하고 걸음을 옮겼다.
저벅저벅.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기심 어린 사용인들의 시선이 달라붙었다.
그들의 눈빛에서 의아함이 엿보이는 것으로 보아 내가 어떻게 당당히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건지 궁금한 듯했다.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귀에 들어왔다.
얼마나 패트리샤를 무시하면 대놓고 귓속말을 하는 것인지.
하기야 그들은 이제 패트리샤가 완전히 공작의 눈 밖으로 나 버렸다 생각할 테니.
대놓고 소곤거리는 그들에게선 더 이상 패트리샤를 향한 두려움도 찾아볼 수 없었다.
“…….”
마음 같아서는 톡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들리지 않는 체 걸음을 옮기던 그때.
다다다.
복도 저편에서 카를로스가 뛰어왔다.
내가 다시 돌아왔다는 얘기를 전해 듣자마자 달려오는 것인지 한 손에 걸레를 든 채였다.
카를로스는 빠르게 날 훑어보며 천천히 속도를 줄였다.
“…공녀님.”
한껏 걱정이 묻은 그 부름에 순간 울컥하는 마음이 올라왔다.
갈 곳 없는 제 딸을 거둬 준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협박하면서까지 이득을 취하려던 공작.
아버지란 작자는 자신의 이득에 따라 필요하다면 사랑하는 연기조차 마다치 않는 사람이었다.
공작의 그 모든 행동에서 패트리샤를 향한 걱정과 애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는데.
“…공녀님.”
차마 가까이 다가오지도 못한 채 나를 올려다보는 카를로스의 눈빛에선 내가 찾던 것들이 보였다.
내가 찾던 것들.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자 마음이 심란했다.
공작의 사랑을 바라는 건 결코 아니었는데. 왜 나를 향한 카를로스의 걱정을 보며 안심한 걸까?
“카를로스, 잘 있었어?”
“앗, 공녀님.”
일부러 장난스레 웃으며 카를로스를 끌어안자 품에 안긴 카를로스는 놀란 듯 몸을 비틀었다.
“저 청소하다 와서 더러워요.”
카를로스는 그제야 제가 한 손에 걸레를 들고 있다는 사실을 인지한 듯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상관없어.”
“정말 더러워요.”
그러나 정말 그런 것쯤은 아무런 문제도 되지 않았다.
카를로스라면 괜찮았다.
“괜찮다니까.”
아버지에게 끌려가던 그 순간도 나를 위해 나서려 했던 그였다.
키도 작고 가진 것도 없는 카를로스.
이 저택에서 쫓겨난다면 당장 갈 곳도 없는 카를로스였는데, 그럼에도 나를 위해 줬다.
이성적으로 생각해 보면 나와 엮이지 않는 게 더 나을 텐데도.
카를로스는 아무도 환영해 주지 않는 나를 보러 달려왔다.
그는 이 저택 사람들 중 유일한 내 편이었다.
그러니 카를로스라면 괜찮았다.
“내 방으로 가자. 할 말이 있어.”
나는 카를로스에게 손을 내밀었다.
카를로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제 옷자락에 손을 문질러 닦고는 조심스레 내 손을 잡았다.
* * *
“공녀님, 어제는 어디서 주무신 거예요? 아무것도 챙기지 않고 나가셨잖아요.”
방문을 닫자마자 카를로스의 물음이 떨어졌다.
“공작님께 많이 혼나신 거예요? 지금은 괜찮으신 거죠? 이제 안 나가시는 거죠? 집사님께 들었을 때는….”
조용한 아이가 답지않게 말이 많았다. 얼마나 급한지 말까지 뒤엉키기 시작했다.
“카를로스, 천천히 물어봐. 하나씩.”
손을 들어 카를로스의 말을 끊자 아이도 알았다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니까 제가 제일 묻고 싶은 건요.”
“응, 뭔데?”
“공녀님은 괜찮으신 거예요?”
나를 바라보는 아이의 눈빛은 지나치게 올곧았다.
바람 하나 불지 않는 커다란 호수처럼 잠잠한 아이의 눈동자에 내가 가득 담겼다.
“응, 난 괜찮아.”
환히 웃으며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더 이상 카를로스에게 걱정을 끼치고 싶지 않았기에.
“더는 쫓겨날 일도 없어. 아, 그리고 아버지가 미안하다 사과하셨어. 다 잘 해결될 것 같아.”
“다행이에요. 정말.”
“응, 그렇지.”
“…도움이 되지 못해서 정말 죄송해요.”
카를로스가 미안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렸다.
그런 카를로스에 나는 환히 웃어 보였다.
“아냐. 뭐, 아무 일도 없었는걸. 그냥 잠시 놀다 온 거야. 미안해할 거 없어.”
그제야 카를로스가 나를 따라 눈을 접었다.
미안하리만치 따듯한 카를로스에 마음이 무거웠다.
카를로스.
그간 그를 향한 마음이 전부 계산적이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카를로스에게 접근한 이유는 분명 계산적이었다.
살기 위해서. 내게 득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
내가 카를로스의 다정함을 받을 자격이 있을까?
“…저, 카를로스.”
나도 그에게 도움이 되어 주고 싶었다.
그가 날 생각해 주는 것처럼 나도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어, 근데 묻고 싶은 게 있는데.”
“뭔데요?”
물론 어느 곳에 있든 카를로스는 결국 제국 최고의 검이 되겠지만.
“얼마 후면 나는 이 저택에서 나갈 거야.”
내가 이 집에서 나가는 날 카를로스도 함께하면 어떨까?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가 되기 전까지 내가 그를 챙겨 주고 싶었다.
이 집에서 하인으로 지내는 것보다야 나와 함께 있는 게 낫지 않을까?
“내가 이 집에서 나가게 되면 너도 같이….”
여건이 된다면 글도 검도 전문적인 선생을 붙여 주고 싶었다.
물론 카를로스가 원해야겠지만.
“같이 갈래? 나랑 같이.”
“네! 공녀님께서 원하신다면요!”
혹여나 거절이 떨어질까 두려워했던 게 무색할 정도로 카를로스는 망설임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벌컥.
고맙다는 말을 하려 입을 연 순간, 누군가 벌컥 문을 열었다.
“하! 또 이 자식이랑 있네?”
여느 때처럼 조금의 배려도 없이 문을 열어젖힌 모르간이 방안에 있는 카를로스를 바라보며 한껏 미간을 찌푸렸다.
“이거 완전 정신 나간 계집이네. 남자가 그렇게 좋냐? 너 로렌스 게르하르트랑 밤을 같이 보낸 지 얼마나 됐다고 이번엔 하인이랑 시시덕거리는 거냐?”
모르간이 삐딱하게 벽에 기대어 섰다.
대체 뭐가 그리 마음에 안 드는 것인지 다시금 그가 볼멘소리를 시작했다.
“아버지께 혼나지 않는 걸 보니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책임져 준다고 말했냐? 하! 뭐, 너한테는 인생에 더 없는 이득이겠지만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대체 무슨 죄냐? 어디 창부가 하는 짓을 해?”
모르간의 끝도 없는 원색적인 비난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아무래도 모르간은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언질을 듣지 못한 듯했다.
아마 내가 저택으로 다시 돌아올 수 있었던 이유가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공작의 뜻대로 움직여 줬기 때문이라 생각하는 듯.
“너라는 계집은 정말이지 하나부터 열까지 모든 게 가문의 수치야.”
아니, 근데 내가 계획했나? 저들이 바라고 몰아간 상황 아니야?
결국 언제나 욕먹는 건 패트리샤의 몫인 듯했다.
“…야.”
솔직히 할 말이 없는 건 결코 아니었다.
그러나 대화를 통해 해결될 상황이 아니었고, 결국 감정 소모일 뿐일 테니.
“아버지가 너 찾으시던데. 이러고 있을 시간 있어?”
“하? 야? 너 진짜 정신이 나갔구나.”
모르간은 그렇게 씩씩거리면서도 저를 부른다는 공작이 신경 쓰이는지 머뭇거렸다.
“넌 갔다 와서 두고 봐.”
“그래, 그럴 수 있으면.”
씩씩거리며 다음을 기약한 모르간은 있는 힘껏 문을 닫아 버렸다.
쾅.
나는 그제야 힐긋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항상 이 불편한 상황에 카를로스를 끼게 해 미안할 뿐이었다.
“…카를로스, 놀랐지?”
“아, 아니요. 저는 괜찮은데. 괜찮으세요?”
“그럼.”
나는 그저 모르간이 공작에게 말을 전해 듣고 나서도 내게 이렇게 대할 수 있을지 궁금할 따름이었다.
“괜히 저 때문에 도련님께서 화나신 거 아닐까요?”
“아니야. 너 때문은 절대.”
모르간이 화를 낸 게 저 때문은 아니냐며 한껏 걱정하는 카를로스에 나는 신경 쓸 거 없다며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지난 밤에도 저 때문에….”
괜한 자책을 하는 카를로스에 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 모르간이 한 얘기는 신경 쓸 거 없어. 이건 비밀인데.”
아주 중요한 사실을 얘기하듯 목소리를 죽이자 카를로스가 나를 향해 다가왔다.
“모르간, 반쯤 제정신이 아니거든.”
“…정말요?”
“그렇다니까. 종종 약발이 떨어지면 저렇게 난리를 부려.”
놀란 듯 미간을 찌푸리더니 이내 그래서 그러셨구나라며 중얼거리는 카를로스였다.
“그러니까 넌 신경 쓸 거 없어.”
“…네. 알겠어요.”
“그래, 그럼 난 잠시 아버지께 다녀올게. 원한다면 이곳에서 있어도 좋아.”
슬슬 공작을 보러 가려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뇨. 저도 그만 가 볼게요.”
카를로스는 자신도 다시 창문을 닦으러 가야 한다며 나를 따라 일어섰다.
가문의 비밀을 알게 된 카를로스의 발걸음은 어딘지 비장해 보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