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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지금쯤이면 공작도 나름 생각을 정리했을 테고, 모르간도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파악했겠지.
“아버지. 저 패트리샤입니다.”
“…그래. 어서 들어오거라.”
잠깐의 정적 후 공작의 허락이 떨어졌다.
문을 열자 뚱한 얼굴로 자리에서 일어나는 모르간과 어색한 웃음을 지어 보이는 공작이 나를 맞았다.
끝내 공작은 내 말이 진실일지를 두 눈으로 확인하는 편이 아닌 그저 조금 내 기분을 맞춰 주기로 결론을 내린 듯했다.
하기야, 도박을 걸기엔 그는 잃을 게 너무 많았다.
“그래, 패트리샤. 이리 와 앉거라.”
공작은 모르간이 일어난 자리를 권했다.
공작과 가장 가까운 자리.
모르간은 못내 제 자리를 내게 넘겨 준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그래, 편히 쉬다 왔니?”
공작은 내게 맞춰 주기로 한 모양인데. 모르간은 어쩔 생각인 거지?
흘긋 바라본 그는 아니꼽다는 듯 나를 훑어보았다.
“하아, 아니요.”
아무래도 멍청한 모르간이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는 시간이 조금 더 필요한 듯했다.
“하아….”
나는 부러 속상하다는 듯 이마를 짚으며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편히 쉬지 못했다고?”
아마 모르간은 이 방을 나가 공작의 통제에서 벗어난다면 내게 또 해코지하려 들겠지.
“왜, 뭐가 널 불편하게 만든 거니?”
“그게…. 오라버니 때문에요.”
“오라버니? 누구를 말하는 거냐?”
“….”
잠시 말하기 곤란하다는 듯 우물거리고 있으니 공작이 모르간을 향해 세차게 고개를 돌렸다.
“패트리샤가 대체 왜 이러는 거냐?”
“…저는 잘 모르겠습니다.”
공작의 날 선 물음에 모르간이 고개를 저으며 발뺌했다.
그러나 나는 모르간이 제 뜻대로 빠져나가게 둘 생각이 조금도 없었다.
어쨌거나 공작은 지금 내 기분을 맞춰 주려 애를 쓰는 중이었다.
모르간도 공작이 어느 정도로 내 기분을 살피는지 직접 본다면 앞으로 제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감이 올 테지.
이 자리에서 모르간에게 확실한 주의를 줘야 했다.
“패트리샤, 대체 무엇 때문에 그러는 것이냐?”
“모르간 오라버니는….”
재차 묻는 공작에 하는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제가 마음에 안 드나 봐요.”
“그게 무슨. 무슨 소리니? 패트리샤.”
내가 한껏 풀이 죽은 채 말하자 공작이 나를 달래려는 듯 부드럽게 말끝을 올렸다.
“누가 뭐래도 우리는 가족이 아니니? 널 싫어한다니, 그런 우스운 얘기가 어디 있니.”
“하지만 항상 저와는 태생부터 다르다며 절 천박하다 나무라는걸요? 흑, 방금은 저보고 창부라며….”
서러움에 북받친 듯 서둘러 입을 틀어막았다.
“흐윽, 태생부터 다르다. 아무래도 어머니가 다르니 절 동생이라 여기지 않는 거겠지요.”
“후우….”
내가 세상 서럽게 흐느낄 때 공작이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안 그래도 지금 그가 가장 예민하게 받아들일 주제였다.
공작이 눈을 부라리며 모르간을 노려봤다.
“모르간. 당장 네 동생에게 사과하거라.”
“…네? 하지만 아버지 저는….”
“당장!”
공작이 세차게 티테이블을 내리쳤다.
“이런 덜떨어진 것. 네가 기어코 일을 크게 키우는구나.”
공작은 내가 갑작스레 가문의 비밀을 폭로하겠다 행동하는 게 모르간 탓이라는 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모르간은 처음 받아 보는 아버지의 실망한 눈빛에 억울한 듯 몇 번 입을 달싹이었다.
그러나 빤히 모르간을 바라보는 공작은 이 일을 어물쩍 넘어갈 생각이 조금도 없는 듯했다.
그 무언의 눈빛에 모르간이 끝내 입을 열었다.
“미안.”
“모르간 헤라르일라. 똑바로 용서를 구하거라.”
모르간은 분한 듯 힘껏 주먹을 움켜 쥔채 부들거렸다.
공작의 질책이 다시 한번 떨어지기 직전 힘겹게 입을 열었다.
“미안하다, 패트리샤. 넌 누가 뭐래도 내 동생이야. 결코 그런 뜻으로 한 말은 아니지만, 네가 오해했다면 미안하다.”
모르간의 속이 텅 비어 있는 사과에 웃음이 나려 했다.
입으로는 미안하다 중얼거렸지만, 끝까지 말도 안 되는 변명을 늘어놓으며 제 잘못은 없다 말하는 모르간이었다.
그간 있었던 그의 행동에 악의가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걸까?
물론 그에게 제대로 된 사과를 받을 수 있을 거라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패트리샤, 이제 좀 괜찮아졌니?”
공작이 모르간을 향해 있던 고개를 내게로 돌렸다.
“…네. 사과받았으니 괜찮아요.”
“괜찮아졌다니 다행이구나. 악의 없는 장난이….”
“그렇지만 아버지. 만약 이후에도 똑같은 일이 반복된다면 그땐 정말 슬플 거예요.”
순간 한결 풀어지려던 공작의 얼굴이 다시 한번 경직되었다.
“더 이상 오해라는 말은 통하지 않으니, 그때는 이 모든 게 실은 오해가 아닌 진심이었단 말이잖아요.”
일이 잘 해결됐다 생각하며 행복해하던 공작이 순간 당황한 듯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러나 이내 그의 입에서 내가 원하던 말이 흘러나왔다.
“걱정하지 말거라. 그땐 나도 모르간을 그냥 보고 있지는 않을 테니.”
가만히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모르간은 가족의 소중함을 알게 될 때까지 훈육을 받아야겠지.”
모르간에게 족쇄가 채워지는 순간이었다.
공작은 모르간을 잠시 노려보다 축객령을 내렸다.
분함에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굴 것 같던 모르간이 나가고 방 안에는 공작과 나만 남게 되었다.
공작은 잠시 머뭇거리다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패트리샤, 이 집에서 나가고 싶다고?”
“….네.”
“하지만 마땅한 거처를 구하는 게 당장 되지는 않는단다. 그건 너도 알고 있겠지?”
“네.”
공작의 말에 나도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가 집을 나가고 싶은 이유가 정확히 무엇인지 말해 주겠니?”
공작의 물음에 잠시 고민하다 진실을 말하려 입을 열었다.
“이곳 사람들은 누구도 절 원하지 않으니깐요.”
“하아, 패트리샤. 그런 말이 어디 있느냐. 이 아비가 표현이 서투르지만 무엇보다 널 아낀단다.”
공작은 잠시 당황한 듯 보였지만 나름 잘 상황을 모면했다.
“패트리샤, 그럼 이 집의 모든 이들이 널 사랑한다는 걸 깨달으면 더는 이곳에서 나가고 싶지 않아지겠니?”
이번에도 공작은 모든 이들의 사랑을 깨닫지 못하는 내 잘못이라는 듯 말하고 있었다.
여전히 모든 상황의 문제는 나라는 듯.
하지만 이 정도는 너그러이 넘어가 주기로 했다.
그보다 나는 공작의 진심이 무엇일지 알고 싶었다.
그는 날 이 저택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은 듯했다.
그 이유가 저택을 구하는 데 드는 돈 때문은 아무래도 아닌 듯했고.
아마 날 제 곁에 둔 채 감시하고 싶은 거겠지. 지금껏 그래 왔던 것처럼.
“…….”
지금은 내게 잘 보이려 내 기분을 맞춰 주지만, 협박이 통하지 않게 되는 순간이 온다면 또 본 모습이 나올 테지.
사람은 하루아침에 바뀔 수 없었다.
나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왜?”
공작의 물음에도 나는 구태여 뭔가를 말하지는 않았다.
다만 단호하게 다시 한번 고개를 저을 뿐이었다.
“그래. 그럼 아비가 집을 구해 놓으마.”
공작은 제 뜻대로 움직이지 않는 내가 답답한 듯했지만 하는 수 없다는 걸 깨달았는지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나 걸릴까요?”
“집뿐 아니라 사용인들까지 필요할 테니. 적어도 6개월은 걸릴 테지. 직접 봐 둔 지역은 없는 거니?”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사용인까지는 바라지도 않았다.
밥을 만들 수 있는 부엌이 있고 몸을 누일 수 있는 침대가 있고 비바람을 막을 수 있는 벽만 있으면 만족할 듯했는데.
아무래도 공작은 내게 사용인까지 붙여 줄 생각인 듯했다.
아마 그들을 통해 날 감시할 생각인 거겠지만.
사용인들까지 지내려면 집이 꽤 커야 할 텐데.
하긴. 공작에게 그간 당한 게 있는데 뜯을 수 있을 때 많이 받아 놓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말없이 공작을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품위 유지비는 부족하지 않니?”
“…저는 괜찮아요.”
“…부족하니? 그래, 얼마나 더 원하는지 말해 보거라.”
나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아버지가 알아서 주세요. 저는 주시는 대로 받아도 괜찮아요.”
공작은 난감한 듯 입술을 오물거렸으나 이내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음 분기부터는 넉넉하게. 네 오라버니들보다도 더 많이 책정할 테니 걱정 말거라.”
“네. 감사해요.”
공작은 그제야 안도의 숨이 섞인 웃음을 뱉어 냈다.
아무래도 고분고분한 내 태도에 마음이 놓인 듯.
어쩌면 날 잘 진정시켰다며 안심하는 것일지도 몰랐다.
사실은 모든 게 내가 원하는 대로 됐는데도 말이다.
“아버지.”
“그래, 편히 말하거라.”
“말씀이 끝나셨으면 더 늦지 않게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가 봐도 될까요? 혹시나 제가 늦으면 곤란해지잖아요.”
그제야 공작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래. 그럼 이만 일어나 보거라.”
“그럼 먼저 일어나 보겠습니다.”
공작은 집무실을 나가는 내 등 뒤에 대고 큰 소리로 외쳤다.
“패트리샤, 가문의 마차를 준비해 줄 테니 잠시 기다리거라.”
이제는 천 하나 덧대이지 않은 딱딱한 대여 마차가 아니라 푹신한 가문의 마차를 타고 갈 수 있다는 사실에 은근한 만족감이 일어났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