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5
히이잉.
헤라르일라가의 마차가 게르하르트 저택 앞에 천천히 멈춰 섰다.
달칵.
“공녀님, 조심히 내리십시오.”
잠시 기다리니 마부가 마차 문을 열어 주었다.
“고마워요.”
나는 꽃다발을 조심스레 품에 안고는 마차에서 내렸다.
솨아아.
무더운 여름이었음에도 시원한 바람에 기분이 좋아지는 날이었다.
더는 헤라르일라 저택에서 나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않아도 됐다.
번거롭게 마차를 빌리지 않아도 됐고 아버지께 들킬까 마음졸이지 않아도 됐다.
독립할 자금을 모으기 위해 용돈을 모을 필요도 없어졌고 가족들의 모진 비난을 참아 낼 필요도 없어졌다.
게다가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내게 더 이상 사진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말했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릴 줄이야.
히죽.
“헤라르일라 공녀님?”
기쁨을 숨기지 못하고 비죽거릴 때 게르하르트 가의 집사가 나와 나를 맞았다.
“아….”
“안내할까요?”
“…네. 부탁드립니다.”
나는 한껏 고개를 수그린 채 게르하르트 집사의 안내를 따라 응접실로 들어섰다.
“공녀님의 방문을 소공작님께 알리겠습니다. 잠시 기다려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네.”
“그럼 편히 쉬고 계십시오.”
분명 그 웃음을 봤을 텐데, 고맙게도 모른 체해 주는 집사에 한결 뻔뻔해진 목소리로 답을 했다.
탁.
드디어 혼자 남게 된 나는 창피함에 발을 굴렀다.
“후우, 후. 제발 진정해.”
아무래도 너무 들뜬 듯해 심호흡을 해 봤지만 기쁜 마음은 좀처럼 쉽게 진정되지 않았다.
일이 이렇게 잘 풀린 데에는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의 덕이 컸다.
오늘 이곳에 온 이유는 헤라르일라 공작을 완벽히 속이기 위함도 있었지만 로렌스에게 고마움을 전하기 위함도 있었다.
어쩌면 날 걱정하고 있을 로렌스에게 괜찮다는 걸 보여 주기 위해서 말이다.
하얀 달리아꽃의 꽃잎을 만지작 거리고 있을 때 벌컥 문이 열렸다.
“…패트리샤.”
집사가 떠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로렌스는 내 생각보다도 훨씬 빨리 내려왔다.
“괜찮은 거야? 헤라르일라 공작과는 잘 얘기가 된 거야?”
“…네. 전 괜찮아요.”
다급한 질문들로 보아서는 로렌스가 날 걱정하고 있었던 듯했다.
“…다행이네.”
로렌스는 그제야 제가 들어오자마자 질문들을 쏟아냈다는 사실을 깨닫고 멋쩍은 듯 시선을 돌리며 소파를 향해 걸어왔다.
그는 서 있는 내게 그만 앉을 것을 권하며 자리에 앉았다.
“그래서 공작에게는 어떻게 말한 거야? 그가 이번 일을 그냥 넘어가겠대?”
“네. 소공작님께서 저 때문에 감내해야 할 희생은 없을 거예요.”
그 말에 로렌스는 작은 한숨을 내쉬었다.
“네가 공작에게 뭐라 말한 건데?”
로렌스는 헤라르일라 공작이 그리 쉽게 제 이득을 포기할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아는 듯했다.
그는 저 대신 내가 공작에게 뭔가를 내걸었을 거라고 생각하는 듯 걱정 어린 눈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에이, 정말 괜찮다니깐요. 작은 오해가 있었는데 풀었거든요. 아버지께서 제게 사과까지 하신 거 있죠?”
“…사과?”
“저 이제 외출 금지도 풀렸어요.”
로렌스는 아직도 내 말을 전혀 이해하지 못한 듯 나를 살폈다.
아마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것인지 더 자세한 설명을 바라는 듯했지만, 나는 환히 웃으며 그의 요구를 모른 체했다.
“저 여기도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마차를 타고 왔잖아요.”
로렌스도 내가 이 이상 자세한 내막을 알려 주지 않을 거라는 것을 깨달은 듯 작은 한숨과 함께 고개를 돌렸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러 왔어요.”
“걱정은 무슨. 도움은 필요없다며 거절하고 떠난 널 내가 왜 걱정해?”
로렌스는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 삐딱하게 쏘아붙였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방문했다는 집사의 말에 한다름에 달려온 자신을 부인하듯.
그런 그가 밉지 않아 작게 웃자 그가 매섭게 노려보았다.
“할 말은 다 끝난 건가?”
금방이라도 뭘 웃어라고 따져 물을 것 같던 로렌스였지만 그마저 내키지 않았는지 서둘러 대화를 끝내려 했다.
하기야 바쁜 로렌스를 이 이상 붙잡고 있는 것도 좋지는 않을 듯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난 그를 따라 일어섰다.
“그럼 그만 가 봐.”
“아, 근데 이거.”
나는 오랫동안 조심히 안고 있던 꽃다발을 로렌스에게 넘겼다.
로렌스가 그것을 흘긋 내려다보다 이내 나를 빤히 바라봤다.
이게 뭐냐는 듯.
“감사해서요.”
“뭐?”
“갈 곳 없는 저를 받아 주시고 챙겨 주셔서 감사했어요. 소공작님 덕분에 일이 무사히 끝날 수 있었거든요.”
로렌스는 잠시 머뭇거리다 내게서 그 꽃다발을 받아 들었다.
“그동안 정말 감사했습니다.”
그의 손에 들린 화려한 꽃다발과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지독히도 잘 어울렸다.
“나중에라도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두 팔 걷고 나설게요.”
로렌스는 환히 웃는 나와 꽃다발을 번갈아 바라보다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 * *
“소공작님, 헤라르일라 공녀님께서는 왜 오신 거랍니까?”
시몬은 로렌스의 오른손에 들린 꽃다발을 흘긋거리며 입을 열었다.
그러나 굳게 입을 다문 로렌스는 시몬의 말은 들리지 않는 듯 걸음만 옮길 뿐이었다.
시몬은 어딘지 멍해 보이는 로렌스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님과는 잘 끝난 걸까요?”
저벅저벅.
그러나 이번에도 돌아오는 답은 없었다.
복도를 무겁게 감싼 정적에 시몬은 그제야 입을 다물었다.
더는 로렌스의 사념을 방해하고 싶짖 않은 듯.
그러나 그런 시몬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로렌스의 사념은 그리 길게 이어지지 못했다.
“후우….”
깊은 한숨을 내뱉은 로렌스는 제 손에 쥐어진 꽃다발을 들어 올렸다.
커다란 하얀 꽃송이가 왠지 마음에 들지 않았다.
코끝을 간질이는 꽃 향도 심기를 건드릴 뿐이었다.
“저는 이제 괜찮으니 걱정하지 마시라고 말씀드리러 왔어요.”
패트리샤는 분명 그리 말했다. 자신은 괜찮다고.
더는 제 도움도 관심도 바라지 않는 듯 보였다.
그러니 이제 그녀에게 신경 쓸 이유가 전혀 없었다.
도움을 먼저 거절한 건 그녀였으니.
“짜증 나.”
로렌스는 치미는 짜증에 제 머리를 거칠게 헤집었다.
작금의 상황이 대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전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분명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그간 제 가족들에게 무시당했다.
공작과 공자들 모두 그녀를 불쾌하다 여겼으니.
분명 집을 나온 것도 참다 참다 더는 견디지 못하게 됐기 때문일 테지.
이렇게 쉽게 해소될 문제가 아니었다.
패트리샤를 향한 헤라르일라 가의 배척과 괴롭힘이 이렇게 쉽게 끝날 리가 없었다.
게다가 헤라르일라 공작은 패트리샤가 게르하르트 저에서 밤을 보냈다는 사실을 들먹이며 저와 엮으려 했다.
점잖은 체하지만 실상 제 이득을 위해서라면 뭐든 하는 공작이었다.
근데 무엇 때문에 이 좋은 기회를 그냥 놓친다는 말인가.
이건 헤라르일라 공작답지 않았다.
패트리샤는 좋게 끝났다는 식으로 말했지만, 분명 뭔가가 있는 듯했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제 득을 포기할 만큼의 큰 거래가.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사람을 넣어.”
바스락.
로렌스의 손아귀에서 꽃다발이 엉망으로 주름졌다.
“네?”
“그 저택에서 패트리샤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아 와.”
그래, 패트리샤가 아니더라도 알아봤을 정보였다.
상황을 따라가지 못한다는 건 그만큼 제가 모르는 사실이 있다는 뜻이었고. 언젠가 그 사실이 제 약점이 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저가 어떻게 움직이고 있는지 정도는 패트리샤가 아니더라도 알아봐야 했을 정보였다.
패트리샤를 위해서가 아니었다.
“공작이 조용히 패트리샤를 받아 준 이유도 알아봐.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야.”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뭐 때문에 제 도움을 그리 단호하게 끊어 낸 걸까?
“그동안 감사했습니다.”
뭐가 그리 즐겁다고 환히 웃던 걸까?
그녀를 꽤나 오랫동안 봐 왔지만 그런 식으로 웃는 건 처음이었다.
곱게 눈을 접고 입술 끝을 끌어올렸다. 어딘지 조용한 웃음.
“…….”
그동안.
마치 두 번다시는 보지 않을 사람처럼. 작별을 염두에 두고 있는 듯했다.
저와는 두 번 다시 보지 않을 사람처럼 말이다.
“네. 빠른 시일 내로 사람을 넣겠습니다. 그럼 더 명하실 건 없으십니까?”
“없어.”
탁.
로렌스는 집무실을 따라 들어오려는 시몬의 코앞에서 문을 닫아 버렸다.
“…….”
제 예상과는 전혀 다르게 흘러가는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중에라도 혹 제 도움이 필요하시다면 두 팔 걷고 나설게요.”
저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의 도움이 필요할 때라.
이건 완전 저주가 아닌가.
로렌스가 손에 들고 있던 꽃다발을 팍 내려놓았다.
“진짜 짜증 나는군.”
쓸데 없이 커다란 꽃송이도, 특색 없는 흰색도.
무엇보다 머리를 어지럽히는 지독한 향도 모두 최악이었다.
제가 더 이상 사진을 찾지 않아도 된다고 하자 신나서 펄떡거리려던 패트리샤가 떠올랐다.
아무래도 그녀는 더 이상 절 찾아오지 않으려는 듯했다.
정말이지 책임감이라고는 손톱만큼도 모르는 여자였다.
저는 괜찮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제가 그녀 걱정을 얼마나 했던가.
갈 곳 없는 그녀를 위해 혹 퍼질 소문까지 감수해 내지 않았던가.
공작의 불합리하고 폭력적인 태도에 그녀를 위해….
“후우.”
그런데 이제 괜찮으니 신경 쓸 필요 없다고?
자신을 위해 도움을 건넨 사람에게 참 불친절한 태도였다.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이기적이고 제 멋대로인 패트리샤에 다시 한숨을 내뱉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누가 뭐래도 변했고, 로렌스는 그 연유를 알아내야만 할 것 같았다.
그래야지 제 마음이 한결 편안해질 듯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