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6
“패트리샤, 잘 잤느냐?”
다이닝룸에 들어 선 공작이 자리에 앉기 전 나를 바라봤다.
희미하게 올라간 입꼬리와 평소와 달리 상냥한 말투.
눈에 띄게 달라진 공작의 태도에 다른 이들의 반응을 살피려 주의를 둘러보았다.
“크흠, 큼.”
공작은 오라버니들에게도 내게 인사를 건네라는 듯 종용했지만 오라버니들은 뚱한 표정으로 공작의 시선을 피할 뿐이었다.
특히나 모르간은 나를 향한 공작의 다정함이 마음에 들지 않는지 인상을 찌푸린 채였다.
그러나 나를 매섭게 노려보면서도 전처럼 적의를 입 밖으로 표현하지는 않았다.
“밤사이 불편한 건 없었고?”
분명한 의도가 담긴 다정함.
그닥 기분이 좋지는 않았지만 공작처럼 옅은 미소를 띠었다.
“네. 아버지도 평안히 주무셨나요?”
아무래도 목소리를 높이고 싸우며 얼굴을 붉히는 편보다야 빈말뿐인 안부라도 묻는 사이가 나았기에.
“패트리샤, 오늘 아침은 네가 좋아하는 양념에 절인 오리고기란다. 많이 먹거라.”
“네, 아버지도 맛있게 드세요.”
사실 공작이 이렇게까지 태도를 바꾸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대충 더 이상 시비는 털지 않겠거니 생각했는데.
그저 그를 협박해 돈만 얻어 낼 수 있으면 족했는데.
아무래도 공작은 내가 두 번 다시는 다른 생각을 하지 못하도록 확실히 달래 보자 마음먹은 듯했다.
하기야 제 잘못을 폭로하겠다는 내게 감정적으로 나와 봐야 얻을 게 없긴 했다.
다이닝룸의 문이 열리고 사용인들이 식사를 나를 그때 공작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패트리샤, 혹 오늘 시간 괜찮으면 아비와 함께 어디 좀 가지 않겠니?”
“…어디요?”
“테이른 공원에 국화가 예쁘게 피었다더구나. 날도 좋은데 함께 꽃구경이나 가는 건 어떻겠니?”
당연히 내키지 않는 제안이었다.
공작과 함께 꽃구경이라니. 즐거울 리가 없지 않은가.
“네. 좋아요.”
하지만 짧게 고민을 마치고 고개를 끄덕이었다.
처참히 일그러지는 모르간의 표정이 보기 좋아서도 있었고.
공작이 그곳에서 내게 무슨 말을 할지도 궁금했다.
게다가 공작에게 부탁할 것도 있었고.
“그럼 10시에 출발하자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잘 구워진 고기를 입에 넣었다.
* * *
모르간의 불만 어린 시선에도 아침 식사는 조용히 끝이 났다.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가던 나는 내 방의 문 앞에 서 있는 엠마에 천천히 걸음을 멈췄다.
엠마도 내가 다가오는 것을 눈치챘는지 불안한 듯 손을 움찔거렸다.
내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엠마는 항상 저런 식이었다.
볼일도 없으면서 의미 없이 주위를 맴돌고 슬금슬금 눈치를 보거나 주눅 든 모습.
“하아.”
답답함에 한숨이 흘러나왔다.
차라리 할 말이 있다면 말을 걸면 좋을 텐데.
평소와 달리 한껏 주눅 든 모습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엠마, 할 말이라도 있어?”
“…아니요.”
엠마가 한껏 고개를 숙였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것 같은 얼굴을 하고.
“그럼 대체 왜 그래? 평소랑 다르잖아.”
“…….”
엠마가 굳게 다문 입에 더욱 힘을 주었다.
사실 그녀가 왜 이러는 것인지 대충 이해는 됐다.
아마 내가 쫓겨나던 날 모른 체하던 게 걸려서겠지.
“내가 쫓겨나던 날 돕지 않은 게 미안해서 그래?”
하지만 난 정말 상관없었다.
애초에 엠마에게 크게 기대하지도 않았다.
공녀인 나도 어쩌지 못하는 그 상황에서 일개 시녀인 엠마가 무얼 할 수 있었겠는가.
“…제가 모른 체한 게 죄송해서요.”
“잘 돌아왔는걸. 신경 쓰지 마.”
애당초 그녀는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시녀였다.
결국 공작에게 돈을 받는 공작의 사람이란 뜻이었다.
게다가 나가지 말라고 나를 말리는 엠마에도 저택을 나간 건 나였으니.
“난 분명히 괜찮다고 했어. 그러니 주눅 든 채 있지 마. 그게 더 싫으니까.”
“…네. 공녀님.”
엠마가 알아들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 무거운 고갯짓에 정말 내 말을 알아들은 건지 의문이 들었지만.
딱히 더 할 말도 없었기에 걸음을 옮겼다.
“아, 그보다 카를로스 좀 불러와 줘.”
“네, 공녀님.”
엠마가 서둘러 걸음을 옮기는 걸 확인하고 방문을 닫았다.
* * *
똑똑.
“공녀님, 카를로스입니다.”
“응, 들어와.”
떨어진 허락에 카를로스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를로스. 저기 앉아.”
내가 1인 소파 깊이 몸을 파 묻은 채 작게 턱짓하자 카를로스가 웃음을 흘렸다.
아이는 뭐가 그리 재밌는지 키득거리며 내 맞은편에 가 앉았다.
“카를로스, 내가 네게 검술을 가르쳐 줄 이를 구해 주겠다고 한 거 기억나지?”
“네.”
“근데 아무래도 가문의 기사를 네게 붙여 주는 건 좀 별로일 것 같아서.”
혹시나 카를로스의 천재적인 재능을 알아본 기사가 그를 헤라르일라 소속으로 묶어 두려 한다면 카를로스에겐 최악이었다.
그러니 가문의 기사에게 카를로스를 맡길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카를로스는 내 말의 의도를 이해하지 못한 듯 눈을 깜빡이면서도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마 다른 곳에서 구해야 할 것 같아.”
“네.”
“그리고 선생을 구하는 건 나보다 아버지께서 알아봐 주시는 편이 더 좋을 것 같아서. 내가 오늘 한번 말씀드려 볼게.”
“으음….”
카를로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님께서 저를 위해서요? 화내시지 않을까요?”
“그래서 우선 내가 검술이 배우고 싶다고 말하려고. 그러니까 너를 위해서가 아니라 나를 위해 찾아 달라고 하는 거지. 그 수업 시간에 너도 같이 배우면 되잖아. 어때?”
“저는 너무 좋긴 한데….”
“그럼 이렇게 하기로 하자.”
“그렇지만 저 때문에. 공녀님을 번거롭게 해 드리고 싶지는 않아요.”
그만 대화를 마치려던 순간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불편하시면 전 신경 써 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응? 나는 조금도 번거롭지 않아.”
나는 카를로스의 말에 고개를 저었다.
정말 조금도 불편하지 않았고, 번거롭다고 생각해 본 적도 없었으니.
사실 나도 검술을 배워 두면 언젠가 쓸모가 있을지도 모르고.
“네가 배우고 싶어 하는 거잖아.”
어쨌거나 카를로스에게 도움이 됐으면 하는 마음뿐이었다.
“나는 너한테 부담 주려던 게 아니라 단지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려 주려던 거야. 그리고 넌 좋다고 했고. 나는 조금도 번거롭지 않으니까 미안하게 생각할 거 없어.”
카를로스는 고개를 끄덕이었다.
뭔가 생각에 잠긴 듯한 카를로스의 얼굴에 조용히 주변을 둘러보다 시계를 확인한 나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를로스, 차 한잔 마실래?”
“아니요, 괜찮아요.”
“그럼 우유는? 맛있는 쿠키가 있거든. 초콜릿도 있고.”
카를로스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수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 모습에 웃음을 흘리자 카를로스가 얼굴을 붉혔다.
부끄러워하는 아이에 서둘러 엠마를 불러 다과를 내 달라고 말했다.
“근데 공녀님은요? 안 드실 거예요?”
“아, 10시에 아버지랑 약속이 있어서 준비하려고. 편히 앉아서 먹고 가.”
카를로스가 고개를 끄덕이었다.
“공작님과 어디 가시는 거예요?”
“응. 꽃이 예쁘게 폈다고 보러 가자고 하셔서.”
머리를 빗으며 카를로스의 물음에 고개를 끄덕였다.
“….”
꽤나 오랫동안 아무런 말이 없는 카를로스에 그를 흘긋 바라보자 눈이 마주쳤다.
색 좋은 주황 머리칼이 꽤 길게 내려와 눈가가 덥혔다.
머리칼에 눈이 찔리지 않으려면 아무래도 조만간 머리를 손봐야 할 것 같았다.
“공녀님.”
“응?”
“저도 꽃 보러 가고 싶어요.”
같이 가자는 뜻일까?
카를로스의 마음을 헤아려보려 잠시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럼 시간 될 때 같이 갈까?”
“네! 너무 좋아요.”
같이 가고 싶었던 게 맞았는지 카를로스가 환히 웃었다.
꽃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지만 환히 웃는 카를로스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그를 위해서라면 하루 정도 시간 내는 거야 문제 되지 않았으니.
기왕 나가는 거 카를로스의 머리도 그날 손보면 될 듯했다.
“그래. 그럼 엠마도 같이 데리고 나가서 밥도 먹고 오자.”
게다가 엠마랑 같이 나갔다 오면 그녀가 혼자 끙끙대는 것도 끝이 날 듯했다.
“네. 헤헤. 벌써 기대돼요.”
“그래, 그럼 돌아와서 시간 정해 보자.”
똑똑.
“공녀님, 들어가겠습니다.”
그때 다과를 가지러 갔던 엠마가 돌아왔다.
“엠마 님!”
카를로스는 함께 꽃을 보러 가게 된 게 신이 난 듯 서둘러 엠마를 불렀다.
“공녀님께서 함께 꽃놀이 가재요. 엠마님, 저, 공녀님. 이렇게요.”
“아….”
카를로스의 말에 엠마가 작게 탄식을 흘리며 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정말 저도 함께 가도 되겠냐는 듯한 눈빛이었다.
“그날은 내가 밥 살게. 이왕 나간 거 원한다면 옷도. 괜찮아?”
“…네. 너무 좋아요.”
엠마는 툭 치면 울 것 같은 눈이 돼서는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돌아오면 날을 정하자.”
“네.”
엠마는 잠시 숨을 고르다 입을 열었다.
“공녀님, 채비를 도울까요?”
“…아냐. 혼자 하는 게 편해.”
잠시 고민하다 지난번 엠마가 내 머리를 만졌던 날을 떠올리고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