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37화 (37/67)

37

채비를 마치고 내려가니 중앙 홀에 서 있는 공작이 보였다.

“패트리샤, 오늘도 예쁘구나.”

“…감사합니다.”

공작의 칭찬에 보답하려 그를 훑었지만 칭찬할 만한 마땅한 것을 찾아내지 못하고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이 된 듯한데, 이만 출발할까요?”

“그래, 그러자꾸나.”

공작이 서둘러 고개를 끄덕이더니 나를 에스코트하려는 듯 손을 내밀었다.

굳이? 라는 의문이 올라왔지만 눈앞에 들이 밀어진 그의 손을 무시할 수 없어 손을 잡았다.

“그럼 공작님, 공녀님. 조심히 다녀 오십시오.”

“아버지. 잘 다녀오세요.”

집사와 오라버니들의 배웅을 받으며 마차에 올라탔다.

모르간은 여전히 나를 노려보았고 밀럼과 바버도 지금의 상황이 그다지 마음에 들지는 않는 듯 얼굴 한가득 불만이 보였다.

그칠 줄 모르고 계속되는 그들의 시위였다.

눈치를 주는 오라버니들에 마음 같아서는 그들의 기분을 엉망으로 망쳐 놓고 싶다가도 순간 유치해지기는 싫어 그만두기로 하였다.

나를 향한 그들의 태도가 마음에 드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굳이 공작의 거짓 애정을 들먹이며 그들을 이겨 먹고 싶지도 않았기에.

히이잉.

이내 마차가 움직이기 시작했고 그와 동시에 마차 안에는 정적이 맴돌기 시작했다.

공작은 부단히도 애를 쓰며 내게 이것저것 물어 왔지만 대화는 금세 끝이 날 뿐이었다.

물론 대화가 금세 끝이 나는 데에는 단답으로 말하는 내 탓이 큰 듯했지만.

“그래서 요즘 배우고 있는 피아노는 좀 어떴니?”

“재미없어요.”

“재미없다고?”

“네. 차라리 다른 걸 좀 배워 보고 싶어요.”

“다른 거라면 무엇을 말이냐? 원하는 건 뭐든 가르쳐 줄 테니 말해 보거라.”

어쩐지 신이 난 듯한 공작을 잠시 바라보았다.

그러자 공작은 부담 갖지 말고 편히 말하라며 나를 다독였다.

“이 아비가 딸이 원한다는데 해 주지 않을 이유가 있겠느냐?”

“검술을 배우고 싶어요.”

“…검술?”

“네. 검술이요.”

생각보다 카를로스를 위한 검술 선생을 쉽게 구할 수 있을 듯했다.

원래라면 공작에게 부탁해야 했을 일이었는데.

그가 먼저 나서서 다 해 주겠다고 얘기해 주니.

“그래. 네가 원한다면 그렇게 하자구나. 당장 제이프에게 말해 놓으마.”

“제이프는 싫어요.”

가문의 기사에게 카를로스를 보일 수는 없었다.

“제이프에게 검술을 배운 오라버니들을 보세요. 아마 제이프는 가르치는 쪽으로는 재능이 없는 것 같아요.”

“흐음, 네 말을 들으니 그런 듯도 하구나.”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하였던가? 누가 봐도 모르간과 바버, 밀럼은 검술에 재능이 없었다.

어떤 유능한 이가 가르친다 하더라도 그들의 실력이 늘리는 없었다.

그 명백한 사실에도 공작은 제 아들들의 잘못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싶은 듯했다.

“게다가 가문의 기사는 아무래도 절 배려하며 가르치려 할 거예요. 그러니 가문의 기사가 아닌 이 중 실력이 출중한 자에게서 배우고 싶어요.”

“…그래. 이 주 안으로는 널 가르칠 좋은 기사를 찾아 주마.”

이 주 안.

헤라르일라 공작이 집을 구하기까지 6개월 정도가 걸린다고 했으니, 적어도 6개월 동안은 카를로스에게 검술을 가르쳐 줄 수 있을 듯했다.

그럼 아마 소설 속에서 검을 배우기 시작한 시점보다는 빨리 검술을 접하는 것일 테지.

이게 카를로스에게 도움이 되기를 바랄 뿐이었다.

* * *

똑똑.

꽃놀이를 마치고 돌아온 이른 오후.

들어오라 허락하자 이내 엠마가 트레이를 들고 들어왔다.

엠마가 내게 물을 건네며 입을 열었다.

“공녀님, 공작님과 꽃 구경은 재미있으셨나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는 것으로 그 답을 끝내고 싶었지만 한껏 기대를 담은 엠마의 눈빛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응. 국화가 정말 예쁘게 피어 있더라. 시간이 조금 더 지나면 훨씬 예쁠 것 같아.”

“다른 공자님들은 함께 가지 못해 아쉬우신 듯했어요.”

“응, 아버지께서 단둘이 가기를 원하셨거든.”

엠마는 어쩐지 내가 공작과 단둘이 외출을 나갔다 온 사실에 꽤나 기쁜 듯 보였다.

그러나 내게는 불편한 시간일 뿐이었다.

무슨 중요한 말을 하려고 나를 불러낸 건 줄 알았는데 그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공작님께서는….”

엠마가 다시금 입을 열려 한 순간 벌컥 문이 열렸다.

노크 한번 없이 문을 열어젖힌 이는 다름 아닌 모르간이었다.

“….”

그는 허락도 없이 방에 들어와 나를 노려보았다.

“뭐야? 허락도 없이 들어와서는 뭘 노려봐?”

나랑 눈싸움이라도 하길 바라는 건지.

밑도 끝도 없는 모르간의 매서운 눈빛에 나도 인상을 찌푸렸다.

엠마는 당황한 듯 나와 모르간을 번갈아 바라보다 이내 눈치를 살피며 방을 빠져나갔다.

“하, 짜증 나게 하지 말고 할 말 없으면 나가.”

“…아버지랑 둘이 외출하고 오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뭐?”

“아버지가 네게 관심 주니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고. 그게 진심일 것 같아?”

가만히 그를 바라보자 그가 다시 입을 열었다.

“네가 아버지께 같잖은 말을 흘렸더라? 이 집 사람 중 누구도 널 좋아하지 않아 슬프다고 징징거렸다며?”

모르간이 콧등을 찌푸리며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는 내가 창피라도 느끼길 바라는 듯했지만, 아쉽게도 전혀 창피하지 않았다.

진심이 아닌 그저 연기일 뿐이었으니.

“아버지가 네게 잘해 주는 이유를 넌 아직도 모르겠니? 혹 네가 다른 곳에 말을 흘리고 다닐까 봐 그러시는 거야. 정말 널 사랑해서가 아니라.”

독한 말을 내뱉는 모르간은 내게 상처를 주고 싶어 하는 듯했다.

“정말?”

“그럼.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건 나라고.”

아니면 아버지가 가장 사랑하는 게 자신이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것일 수도.

나는 가만히 모르간을 바라보았다.

대체 그는 뭐가 그리 불만이었길래 이렇게 날 찾아온 거지?

“네가 뭐라도 된 것 같지?”

그 질문에 솔직히 말하자면 무척 그랬다. 뭐라도 된 것 같았다.

그러니 툭하면 윽박을 지르며 나를 누르려던 모르간도 지금은 제 분을 있는 그대로 다 내보이지는 못하는 것 아닌가.

물론 그의 말처럼 나를 향한 공작의 태도가 진심이 아니라는 건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를 협박해 그렇게 만든 게 나였으니.

어쩌면 모르간은 갑작스레 내게 다정해진 공작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일 수도 있었다.

그에 따라 내게 마음대로 분을 내지 못한다는 것을 받아들이는 게 힘들지도 몰랐다.

어쩌면 내가 모르간이 생각하는 그의 진짜 가족들과 섞이는 게 싫은 것일 수도 있었고.

“아버지가 내게 다정히 대하시는 게 다 거짓이라고?”

“그래.”

하지만 그건 그의 사정이었다.

그가 혼란스럽든 화가 나든 내가 상관할 바는 아니었다.

그간은 하는 수 없이 모르간의 만행을 참았던 것이지만 지금은 상황이 달랐다.

공작은 내 기분을 살폈고 그간 쌓였던 내 서러움을 어떻게 풀어 줄 수 있을지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설마 정말 믿었던 거냐?”

내게 선택권이 생긴 지금.

모르간의 개인적인 혼돈을 배려해 그의 무례를 참아 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그럼 아버지께 물어보러 가자. 정말 거짓인지.”

다만 계속된 그의 무례에 나는 기분이 나빴고.

모르간이 지금의 상황을 받아들이기까지 가만히 기다려 주기엔 내가 참을성이 많지 않았다.

“뭐?”

나는 당황한 듯 눈살을 찌푸린 모르간을 뒤로하고 방을 나갔다.

저벅저벅.

얼마간 걸었을 때 다급히 달려오는 소리가 들렸다.

“야, 패트리샤. 당장 거기 서!”

그의 애탄 불음을 무시하자 허겁지겁 달려온 그가 내 앞을 가로 막았다.

“어딜 가는 거야?”

“아버지께.”

순간 그의 동공이 잘게 흔들렸다.

“오라버니 말이 맞는지 확인하러 가는 거야. 그러니 비켜.”

“…가지 마.”

모르간도 제 언사가 공작에게 책잡히리라는 걸 아는 듯 팔을 벌려 길을 막았다.

그러나 내가 그의 말을 들어야 할 이유는 조금도 없었다.

무시, 조롱, 비난, 거기다 폭력까지.

지금껏 그의 행동 어디에도 날 위한 배려는 없었다.

그러니 모르간이 내게 배려나 용서를 바라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비키라고 했어.”

“가지 마!”

“내가 왜?”

“이 멍청한 것이 끝까지! 어딜 눈을 부릅뜨고 대들어!”

순간 화가 난 듯한 모르간이 칠 것처럼 손을 들었다.

그리고 그 순간 헤라르일라 공작의 집무실 문이 열렸다.

“모르간! 이게 무슨 소란이더냐!”

멍청한 모르간이 이 복도가 공작의 집무실 앞이라는 것도 잊어버린 채 버럭 소리를 지른 것이었다.

“흐윽, 아버지.”

“…패트리샤?”

공작은 내가 흐느끼자 당황한 듯 눈을 깜빡이었다.

그의 얼굴에서 옅은 낭패감이 보였다.

“아, 아버지 그게 아니라!”

“입 다물 거라! 내 분명 동생을 건드리지 말라고 말했거늘!”

공작이 버럭 소리치자 모르간이 어깨를 잘게 떨었다.

“대체 어떻게 했길래 얘가 울어!”

“흐앙, 아버지!”

“하아, 패트리샤. 괜찮으니 그만 울고 편히 말해 보거라.”

공작이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 어깨를 도닥였다.

나는 기다리던 말에 지체 없이 입을 열었다.

“오라버니가 갑자기 찾아와서는 화를 냈어요. 흐윽. 아버지가 제게 잘해 주는 건 다 거짓이라면서요. 아버지가 제게 잘해 주는 이유가 사실은….”

“모르간 헤라르일라! 이 멍청한 것!”

순간 공작이 매섭게 호통을 쳤다.

“어디 그런 멍청한 소리를 하는 게냐! 당장 패트리샤에게 사과하거라!”

공작은 혹 상처받은 내가 또 틀어질까 걱정하는 듯했다.

“저 멍청한 것이 한 말은 전혀 신경 쓸 필요가 없단다. 패트리샤.”

“흐윽, 흑.”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그만 들어가자꾸나.”

공작은 안절부절못하며 나를 집무실로 이끌었다.

“모르간 헤라르일라. 뭘 멀뚱히 서 있는 게야?”

“…아버지.”

“따라오거라.”

단호한 공작의 명에 모르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금방이라도 울 것 같은 모습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