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8
게르하르트의 공작저.
똑똑.
“소공작님, 저 시몬입니다.”
“들어 와.”
시몬이 집무실의 문을 열자 로렌스가 잠시 그를 바라보다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렌스의 명으로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사람을 넣은 지도 2주가 지나고 있었다.
패트리샤가 게르하르트 공작저를 찾아 오지 않은 지는 2주하고도 5일째였고.
“…….”
시몬의 손에는 어떠한 서류도 들려 있지 않았다.
게르하르트 공작령과 관련된 보고는 아침에 이미 했었으니, 아무래도 그가 절 찾아온 이유는 패트리샤 때문일 듯했다.
2주 만에 드디어 쓸만한 정보가 들어 온 듯했다.
“2주 전에 헤라르일라 공작저에 넣었던 이를 만나고 왔습니다.”
로렌스가 말해 보라는 듯 고개를 까딱이자 시몬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우선 패트리샤 공녀님은 무탈하게 지내시는 듯했습니다.”
“무탈히?”
“예. 또한 이젠 사용인들에게 화를 내시지도 고함을 치거나 폭력을 쓰지도 않으신다고 합니다.”
“…공작과 공자들과는 어떻게 지내지?”
“공작과는 얼마 전 함께 나들이를 다녀왔다고 했습니다. 공자들과는 식사 시간을 제외하면 딱히 마주치는 일이 없으신 듯했습니다.”
“나들이? 공작과 패트리샤 그 단둘이?”
로렌스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헤라르일라 공작은 결코 활동적인 사람이 아니었다.
그는 하루의 대부분을 자신의 집무실에서 보냈다.
가끔 연회에서 그를 볼 때도 가능하면 의자에 앉아 있고 싶어 하던 공작이었다.
그런 공작이 패트리샤와 함께 나들이라니. 대체 무엇을 위해서?
그들의 나들이가 과연 어떤 분위기였을지 쉬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패트리샤 공녀님은 일주일 전에도 꽃놀이를 가셨다고 합니다.”
“혼자?”
“시녀 한 명과 하인 한 명을 대동하셨다고 하더군요. 요즘 공녀께서 특별히 여기시는 하인이라고 들었습니다.”
시몬의 보고를 듣던 로렌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시몬도 그런 로렌스의 변화를 눈치챈 듯 잠시 말을 멈췄다.
로렌스는 시몬과 눈이 마주친 후에야 다시 평소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이어서 해. 그 하인에 대해서 말해 봐.”
로렌스는 길어질 듯한 보고에 소파로 자리를 옮겼다.
“예. 전해 듣기로는 공녀님께서 자주 그 하인을 방으로 부르신다고 하십니다.”
털썩 앉아 다리를 꼰 로렌스는 눈을 감은 채 시몬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말끔하던 그의 미간위에 주름이 새겨지는 건 순간의 일이었다.
“왜지?”
“그곳에서 무엇을 하시는지까지는 알아내지 못해 정확한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습니다.”
로렌스가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시녀도 아니고 하녀도 아니고 굳이 하인을 제 방으로 부를 일이 무엇이란 말인가.
시몬은 잠시 로렌스의 눈치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게다가 공녀님께서 요즘 검술을 배우신다고 하십니다.”
“검술?”
“예. 헤라르일라 공작가에서 검술을 가르쳐 줄 외부교사를 구했습니다. 또한 그 검술 수업에도 하인을 대동하신다고 들었습니다.”
“하?”
기어코 로렌스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공작이 왜 패트리샤를 받아 준 건지는 알아봤나?”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쫓겨났던 패트리샤 공녀가 돌아오고 나서부터 공녀를 대하는 공작의 태도가 한결 부드러워졌다고 했습니다. 그자의 말에 의하면 눈으로 보기에는 누가 뭐래도 사랑받는 막내딸이라 하더군요.”
“…사랑받는 막내딸?”
헤라르일라 공작의 성격이라면 차라리 사교계에 소문을 내서라도 패트리샤를 제게 붙이려고 했을 텐데.
조용히 넘어가는 것도 모자라 패트리샤에게 다정히 군다고?
사랑받는 막내딸?
말도 안 되는 소리였다.
변해 버린 패트리샤. 변해 버린 공작.
변해 버린 패트리샤와 공작의 관계.
꽃놀이와 검술.
…그리고 하인.
결국 그 무엇도 로렌스의 답답한 마음을 해소해 주지 못했다.
길었던 기다림은 되려 짜증이 되어 돌아올 뿐이었다.
그냥 보고를 통해 전해 듣는 것만으로는 그 미묘한 변화까지 알아낼 수는 없었다.
“모르간 측으로 방문 요청을 보내지. 요청 사유는….”
아무래도 직접 확인하고 살펴봐야 할 듯했다.
“요청 사유는….”
그러나 모르간과는 그리 친한 사이가 아니었다.
그와 친분이 있는 것도, 그를 만나야 할 명분이 있는 것도 아니었다.
“네. 알겠습니다. 모르간 공자께 전할 작은 선물을 하나 챙겨 놓겠습니다.”
“…그래.”
로렌스가 이마를 짚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 제가 뭐 하고 있는 건지. 스스로도 어이가 없었다.
“그럼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시몬은 잠시 혼란스러워 보이는 로렌스를 살피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그를 혼자 내버려 두는 게 좋을 듯했기에.
로렌스는 반쯤 넋이 나간 채로 고개를 끄덕이었다.
* * *
뜨거웠던 여름의 기세가 한 꺼풀 꺾인 요즘이었다.
솨아아.
하늘은 청명했고 바람은 시원했으며 시간을 함께할 벗까지 생긴 완벽한 요즘.
더 이상 공작저에서의 생활이 불편하지 않았다.
공작은 내게 친절했으며 공작에게 크게 혼난 이후 모르간도 더 이상 나를 노려본다거나 눈치를 주지 않았다.
모르간이 꼬리를 내리자 그를 따르는 밀럼과 바버도 마찬가지였다.
덕분에 더 이상 의미 없는 신경전을 하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흔들의자에 몸을 뉜 채 어쩌면 올해의 마지막이 될 아이스크림을 입에 넣었다.
만족스럽게 그릇을 비우고 고개를 돌리니 입가에 아이스크림을 묻힌 카를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카를로스, 깨끗이 먹어야지. 너 입가에 다 묻었어.”
“…공녀님도 묻으셨어요.”
“그럴 리가.”
입가를 훔치니 뭔가 묻어나긴 했지만, 그럴 리 없다며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이스크림은 아니야. 내가 애도 아니고 묻히면서 먹을 리가 없잖아.”
똑똑.
카를로스가 억울한 듯 무슨 말을 하려는 순간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내게는 더없이 좋은 타이밍이었다.
“들어와.”
“공녀님, 공녀님! 그거 들으셨어요?”
평소보다 어딘지 조급해 보이는 엠마에 고개를 기울이자 그녀가 다시금 말을 이었다.
“오늘 게르하르트 소공작님께서 오신대요.”
“…어디에?”
“저희 공작저에요!”
한껏 들뜬 듯 엠마가 작게 손뼉까지 치며 말했다.
“…왜? 왜 오시는 거래?”
“모르간 공자님을 뵈러 오시는 거라는데. 무슨 이유에서 뵙기를 약속하신지는 저도 잘 모르겠어요.”
엠마는 로렌스가 왜 방문하는지는 큰 관심이 없는 듯했다.
“근데 네가 왜 그렇게 신난 거지?”
“그야, 공녀님께서 좋아하실 소식이니까요.”
엠마가 눈을 데구르르 굴렸다.
“거짓말.”
“…실은요. 잘생기셨잖아요.”
잠시 머뭇거리던 엠마가 그제야 제 진심을 입 밖으로 내놓았다.
약간 붉어진 얼굴을 보니 확실히 진심인 듯했다.
“그보다 공녀님은 신나지 않으세요? 소공작님과 만나실 수 있잖아요.”
“신나.”
내가 좋아해 마지않는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오는데 신나지 않냐는 물음에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근데 모르간이랑, 그러니까 모르간 오라버니와 소공작님이 친밀한 사이는 아니지 않았어?”
“으음, 친밀하지는 않으셨을 거예요.”
나는 엠마의 대답에 고개를 끄덕이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왜 모르간을 만나러 온 것인지 궁금하긴 했으나 어차피 내가 상관할 바가 아니었다.
인사 정도는 하러 가야겠지만.
“그래서 소공작님은 몇 시쯤 오신대?”
“3시경에 방문하신다고 들었어요.”
“그래?”
검술 수업이 3시 반이었으니 시간은 맞을 듯했다.
“공녀님.”
그때 엠마가 방 안에 들어올 때부터 한참 동안 가만히 있던 카를로스가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이 오시는데 왜 공녀님이 신나시는 거예요?”
“그거야 당연히 공녀님께서 소공작님을 좋아하시니까 그렇지.”
엠마는 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이미 카를로스의 질문에 대한 답을 마쳤다.
“아닌데? 공녀님, 소공작님을 좋아하세요? 지난번에는 아니라고….”
“카를로스 넌 몰랐니? 공녀님께서….”
나는 서둘러 손을 들어 엠마의 말을 저지했다.
“엠마. 쓸데 없는 얘기까지 할 필요는 없어. 그만 나가 봐.”
엠마는 갑작스러운 축객령에 조금 당황한 듯 보였지만 이내 방에서 나갔다.
엠마가 방에서 나가고 어쩐지 혼란스러운 듯한 카를로스가 눈에 들어왔다.
패트리샤가 로렌스를 좋아한다? 소설 속에선 그러다 결국 죽음을 맞이하지 않았던가.
더는 사실이 아닐뿐더러 그 죽음과 관련된 카를로스가 알기엔 적절한 내용이 아니었다.
“카를로스, 엠마 얘기는 신경 쓸 거 없어. 그보다 오늘은 소공작님께 인사드리고 수업에 가야 할 것 같아.”
“소공작님이요?”
“응, 같이는 아니고 나 혼자.”
어딘지 불편해 보이는 카를로스에 말을 더했다.
“방에서 기다리고 있으면 인사드리고 올게. 그리고 나서 같이 수업 가자.”
카를로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었다.
“네. 기다릴게요.”
카를로스가 고개를 끄덕임에 따라 그의 주황 머리칼이 보기 좋게 흔들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