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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작님, 오랜만입니다.”
“헤라르일라 공자. 방문을 허락해 주어 고맙습니다.”
로렌스는 시몬이 건네 준 상자를 모르간에게 건넸다.
“제가 좋아하는 차입니다.”
“이런 것까지. 감사합니다. 아차, 편히 앉으십시오.”
로렌스는 허둥거리는 모르간을 잠시 바라보다 자리에 앉았다.
“아, 지난번 모임에서 하르테 영식이 재밌는 얘기를 했었습니다. 그가 남부 지역에 내려갔을 때….”
로렌스는 느리게 고개를 끄덕이며 제 앞에 놓인 찻잔을 들었다.
모르간에게 어떤 말을 해야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알 수 있을지.
사실 마음 같아서는 돌리지 않고 똑바로 묻고 싶었다.
패트리샤가 집을 쫓겨나 제게 왔던 날.
공작은 제게 패트리샤를 책임질 것을 종용했었는데 지금은 왜 아무런 말도 없이 넘어가는 것인지.
사실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묻든 모르간에게 묻든 저와는 큰 상관이 없었다.
그들이 거짓을 고하든 진실을 말하든 어쨌거나 뭐든 알아낼 수 있을 테니.
마음 같아서는 직접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로렌스는 가만히 입을 닫고 모르간의 기나긴 잡담이 끝날 때까지 기다릴 뿐이었다.
몇몇 영식들의 모임.
불필요하다 생각해 참석하지 않았던 자리였다.
“그 영식의 제 주제도 모르고 하녀가 그랬다지 뭡니까? 얼마나 웃기던지.”
로렌스가 지난 모임에서 있었던 시답잖은 일들을 전해 듣는 이유는 단지 하나였다.
혹 지난 일을 꺼내어 들쑤시는 게 패트리샤에게 피해가 될까 봐.
“요즘엔 다들 검술대회를 준비하느라 바쁜 모양입니다. 소공작님은 많이 준비하셨습니까?”
로렌스는 그제야 잊고 있던 검술대회를 떠올렸다.
황실에서 매년 한 번씩 여는 대회였다.
모든 가문은 적어도 한 명씩 제 자제를 출전시켜야 했다.
“뭐, 그럭저럭 준비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외동인 로렌스는 자동 출전이었다.
“다들 대회 준비로 열심이지만 저는 이번에도 소공작님의 승리로 끝날 것 같더군요.”
“그보다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는 누가 출전하기로 했습니까? 영식께서 출전하는 건가요?”
로렌스의 질문에 모르간이 잠시 말을 아꼈다.
아무래도 이 대회에는 장자가 출전하는 게 일반적인 관습이었다.
그러나 쉬이 대답하지 못하는 모르간을 보니 다른 형제가 출전을 할 듯싶었다.
아무래도 대회에 출전해 봤자 웃음거리밖에 되지 못하니 다른 이에게 떠넘긴 듯싶었다.
“전해 듣기로는 요새 전문 교사를 불러 검술을 배운다죠?”
“아, 그건 제가 아니라….”
모르간이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패트리샤입니다.”
“공녀요?”
“예. 배우고 싶다더군요.”
어쩐지 평소와 달리 기가 꺾인 듯한 모르간이었다.
원래 같았더라면 패트리샤를 향한 한심 섞인 감정을 드러냈을 텐데.
“또 검술대회는 바버가 출전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아무래도 아버지께 일을 배우느라 바빠서요.”
“그렇군요.”
로렌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아무래도 이런 식으로는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을 듯했다.
로렌스는 답답한 듯 한숨을 삼켜 냈다.
똑똑.
그때 누군가 응접실의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패트리샤가 찾아왔다는 시녀의 말에 모르간이 잠시 로렌스를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들어와.”
이윽고 문이 열리고 패트리샤가 들어왔다.
“소공작님께서 공작저에 오셨다는 얘기를 전해 들어 인사하러 왔습니다.”
패트리샤가 고개를 숙였다.
그녀의 인사를 끝으로 응접실에 정적이 맴돌았다.
한껏 예를 갖춰 인사하는 패트리샤에 로렌스는 쉬이 입을 열 수 없었다.
왜인지 그녀가 제게 선을 긋고 있다는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패트리샤는 저를 잠시 바라보다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저는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오라버니와 즐거운 시간….”
뭐가 그리 바쁜지 그녀는 바로 자리를 뜨려 했다.
“요새 검술을 배운다고?”
제가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 밖으로 말이 나갔다.
꽤나 삐딱하게.
로렌스도 그런 제 말투에 당황해 인상을 찌푸렸다.
“아, 네. 아직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헤라르일라 공작저에는 연무장이 없지 않나?”
“네. 그래서 수업은 뒷마당에서 받습니다.”
“…원한다면 우리 연무장에서 연습해도 괜찮아.”
로렌스는 제가 왜 이런 말을 하는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실언을 했다는 당황스러움보다도 혹 거절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더 크게 다가왔다.
로렌스의 제의가 의아한 듯 패트리샤가 느리게 눈을 깜빡였다.
그 찰나의 시간이 지나고 로렌스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원한다면 내가 봐 줄 수도 있고.”
“아….”
패트리샤는 그제야 로렌스의 제의를 고민하는 듯 보였다.
“그럼 종종 들러도 괜찮을까요?”
“편할 대로.”
로렌스는 그제야 패트리샤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소공작님,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어차피 나도 검술대회 준비를 해야 하니. 신경 쓸 필요 없어.”
“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패트리샤가 나가자 가만히 있던 모르간이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께서 패트리샤의 검술을 봐 주시겠다고요?”
모르간이 눈을 크게 뜨고 되물었다.
왜 그런 말을 했냐는 듯.
“아무래도 이곳은 연무장이 없으니.”
로렌스도 제 답이 모르간의 질문에 대한 완벽한 답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서둘러 말을 끝맺을 뿐이었다.
* * *
“카를로스. 그만 수업 가자.”
“네!”
기다렸다는 듯 호다닥 뛰어나오는 카를로스였다.
검술 수업을 시작한 지 일주일째.
주마다 두 번씩 수업을 받으니 오늘이 세 번째 수업이었다.
첫째 날에는 검을 잡는 법을 배웠다.
둘째 날에는 가장 기본적인 검술을 배웠고.
오늘도 뭐, 배웠던 것을 복습할 듯싶었다.
나는 카를로스를 흘긋 내려다보았다.
카를로스는 수업을 즐거워하는 듯 했지만, 내 생각보다 검을 다루는 데 애를 먹었다.
분명 검술 쪽으로 천재적인 재능을 가지고 있다고 읽었는데.
지금까지는 나와 별반 다른 점이 없었다.
혹 교사가 잘 가르치지 못하는 건 아닌지 의문이 들다가도, 기준이 없으니 쉬이 판단할 수 없었다.
사실 교사가 카를로스에게 엄청나게 호의적인 편도 아니었다.
아무래도 공작가의 뭣도 아닌 하인을 가르쳐야 한다는 게 내키지 않는 모양이었다.
물론 내 부탁이 있었으니 직접적으로 카를로스에게 따지지는 않지만 퉁명스러운 말투로 종종 딴지를 걸고는 했다.
나는 괜찮으니 카를로스의 자세를 봐달라 말을 해도 대충 훑어볼 뿐이었다.
교사가 이렇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그 때문에 낭패가 한두 개가 아니었다.
나를 가르치는 데 열을 올리는 교사 덕분에 대충 때우려던 시간 동안 거의 쉼 없이 검을 들어야 했다.
나는 그 덕분에 근육통으로 며칠씩 앓아야 했는데 카를로스는 잘 배우고 있는 것인지 의문이었다.
“카를로스. 검술 수업은 재미있어?”
“네. 아직 검이 익숙지 않지만 재미있어요.”
가만히 내버려 두어도 카를로스는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되겠지만.
“그럼 우리 종종 게르하르트 공작저에 가서 검술 연습하자.”
“게르하르트 공작저요?”
“응, 방금 소공작님이 공작저의 연무장을 사용해도 된다고 허락해 주셨거든.”
로렌스가 종종 검술을 봐 주겠다고 말했다.
로렌스가 가르쳐 준다면 분명 카를로스에게도 큰 도움이 될 듯했다.
게다가 카를로스가 하루빨리 로렌스의 눈에 띄어 그의 기사단에 입적하는 것만큼 안전한 것도 없었다.
혹 만에 하나 카를로스가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기사로 묶이게 된다면…. 생각만 해도 최악이었으니.
만에 하나 그렇게 된다면 카를로스를 돕겠다 시작했던 이 일로 그의 발목을 잡게 되는 것이었으니.
하루빨리 로렌스의 눈에 카를로스가 띄는 것이 가장 안전했다.
“연습하다가 소공작님께 자세를 봐 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으니까 좋을 것 같아. 괜찮지?”
“…네. 좋아요.”
카를로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고개를 끄덕였다.
“소공작님께서는 검술도 잘 하세요?”
“응, 그러시는 것 같더라. 나도 직접 본 적은 없지만, 들은 바에 따르면.”
“근데 소공작님께서 저까지 봐 주실까요? 제 자세까지요.”
“으음, 부탁하면 들어 주시지 않을까?”
카를로스가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공작님은 친절하세요?”
“으음. 친절하신 분 같아.”
“공녀님처럼요?”
“응?”
“공녀님처럼 친절하세요?”
전혀 예상치 못한 칭찬이었다. 갑작스러운 말에 카를로스를 바라보니 아이의 눈은 더없이 진지했다.
기분 좋으라고 대충 흘리는 빈말이 아니었다.
“공녀님보다 더 좋으신 분인 거예요?”
“크흠.”
이제 보니 어린아이가 세상 사는 법을 이미 다 터득한 듯했다.
나는 조금 거만하게 고개를 들고 말했다.
“아니. 아마 내가 더 좋은 사람일걸?”
“…다행이다.”
“응? 못 들었어.”
“아니에요. 공녀님, 어서 가요.”
카를로스가 환히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나는 조금 빨라진 카를로스의 발걸음을 쫓으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카를로스, 뭐가 갖고 싶다고? 이 친절하고 아름답고 현명하기까지 한 내가 지금 기분이 좋아. 원하는 거 있으면 말해 봐.”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