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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40화 (4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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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공작님. 헤라르일라 공작저에는 무탈히 다녀오셨습니까?”

시몬은 생각보다 이르게 돌아온 로렌스에 조심히 물었다.

“응.”

로렌스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그 짧은 대답에서도 시몬은 로렌스의 기분을 엿볼 수 있었다.

요 며칠 기분이 좋지 않으신 듯했는데 지금은 확실히 괜찮아지셨다.

아무래도 공작저에서 뭔가를 알아내신 듯했다.

“그래서 알아내셨습니까?”

“뭐를?”

“…헤라르일라 공작이 별말 없이 공녀를 받아 준 이유 말입니다.”

뭐냐니.

분명 공작과 공녀 사이에 있었던 거래를 알아보러 헤라르일라 공작저를 찾아 간 게 아니던가.

로렌스는 잠시 눈을 깜빡이더니 고개를 저었다.

“그럼 헤라르일라 공작님은 만나 보셨습니까?”

“응. 만났지.”

“그날에 관해서 따로 언급하시지는 않으셨습니까? 혹 이상한 점은요?”

“…….”

시몬의 말에 로렌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었다.

“흐음….”

이상한 점.

그래, 확실히 이상했다.

패트리샤를 하루 재워 줬던 날 적반하장으로 협박을 하려던 공작이 오늘은 패트리샤를 보살펴 주어 고맙다고 말했으니.

또 이상한 점은 공작이 슬금슬금 제 눈치를 살피는 것이었다.

“이상하긴 했어. 뭔지는 아직 잘.”

로렌스가 저도 모르겠다는 듯 가볍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시몬은 어딘지 여유로워 보이는 로렌스에 미간을 찌푸렸다.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출발하기 전까지만 해도 제가 모르는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비밀을 알아내야 한다며 신경질적이지 않았는가.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했는데 왜 기분이 풀리신 거지?

“그럼 혹시 헤라르일라 공녀님은 만나셨습니까?”

“응. 만났지.”

“별말 없으셨습니까?”

“모레 우리 저택에 방문한다더군.”

“예? 모레 말입니까? 공녀님께서 왜 방문하시는 겁니까?”

로렌스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저에는 연무장이 없잖아. 검술 연습차.”

“….그럼 공녀께서는 가문의 기사들과 같이 연습하시는 건가요? 검술을 가볍게 배우시는 거라 생각했는데.”

로렌스는 시몬의 질문에 화제를 돌렸다.

“패트리샤가 올 때쯤 나도 연습할 거야. 연무장은 비워 둬.”

“아, 네. 알겠습니다.”

결국 헤라르일라 공작저까지 찾아갔지만 로렌스가 알아 온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다만 패트리샤와 약속을 잡았을 뿐이었다.

‘뭔가 따로 계획이 있으신 건가?’

시몬은 잠시 로렌스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끄덕이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라면 분명 다른 계획을 갖고있을 테지.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변한 이유와 공작과 공녀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계획말이다.

그러니 한층 여유로워지신 거겠지.

시몬은 한껏 유해진 로렌스를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 * *

똑똑.

“들어와.”

“소공작님. 헤라르일라 공녀께서 오셨습니다.”

로렌스는 패트리샤의 방문을 알리는 시몬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알았어. 패트리샤는 어디에 있지?”

“연무장으로 안내해 드렸습니다.”

“그래, 시몬.”

로렌스는 제 눈 앞에 쌓인 서류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답했다.

아무리 그녀가 원할 때 오라고 했다지만 역시 제 손님이었다.

적어도 처음은 제가 소개해 줘야 하지 않을까 싶었는데.

“아무래도 이게 시간이 조금 걸릴 것 같아서. 네가 안내 좀 해 줘.”

오늘까지 결제해야 할 서류가 4개나 있었다.

패트리샤에게 미안한 마음에 서류를 훑는 그의 눈이 점점 빨라졌다.

“나는 이것까지만 마무리 짓고 내려갈 테니.”

“네. 알겠습니다. 그럼 공녀님은 제가 부족함 없이 안내해 드릴 테니 걱정하지 마십시오.”

시몬이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고는 집무실을 나갔다.

드르륵.

그러나 걱정 말라는 시몬이 집무실을 나가고 채 몇 분도 지나지 않아 로렌스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 손님인데 신경을 써야 할 듯했다.

남은 업무야 패트리샤가 돌아가고 나서 처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저벅저벅.

로렌스는 빠르게 연무장으로 걸음을 옮겼다.

가능하다면 그녀에게 묻고 싶은 게 많았다.

갑자기 왜 검술을 배우는 것인지.

공작저에서의 생활에 불편함은 없는 것인지.

끼익.

그러나 연무장의 문을 연 순간 머릿속을 가득 채웠던 질문들이 순식간에 증발해 버렸다.

패트리샤만 있을 줄 알았던 그곳에 작은 아이가 같이 있었다.

목검을 들고 있는 아홉 살쯤 되어 보이는 사내아이.

“어? 소공작님.”

그때 로렌스의 방문을 알아챈 패트리샤가 그에게 다가왔다.

“보좌관님께서 늦게 오신다고 하셨었는데 업무는 끝나신 거예요?”

로렌스는 패트리샤를 바라보다 이내 카를로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아, 카를로스. 이리 와서 인사드려.”

멀리서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이가 패트리샤의 불음에 그녀 곁으로 다가섰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패트리샤와 꽤나 가까이 붙어 서 아이가 다시 한번 고개를 숙였다.

“…누구지?”

잘 익은 자몽의 과육과 붉은 석양을 연상케 하는 머리칼을 가진 아이.

인사하는 것을 보면 귀족은 아니었다.

“카를로스라고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사용인이에요.”

“근데 왜 여기 있는 거지?”

“아, 카를로스가 저와 같이 검술을 배워서요.”

시몬이 말했던 하인이 바로 이 아이인 듯했다.

패트리샤가 데리고 다닌다는 하인이 이렇게 작은 아이일 줄은 몰랐는데.

로렌스는 순간 시몬에게 화가났다.

이렇게 어린아이였다면 그 사실을 함께 보고했어야지.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지 않았던가.

패트리샤가 아이를 귀여워했었나?

“…….”

카를로스를 내려다본 로렌스는 어째서인지 다시금 기분이 언짢아졌다.

금세 눈을 피했지만 자신을 올려다보는 아이의 시선이….

곱지만은 않았다.

“같이 연습하러 왔어요. 혹시 안되나요?”

“나는 공녀에게만 허락했었지.”

좀 전의 그 눈빛은 뭐란 말인가.

로렌스는 카를로스의 의중을 알아내려는 듯 그를 바라봤다.

“아….”

패트리샤는 로렌스가 이리 나올 줄은 몰랐는지 작게 탄식을 흘렸다.

패트리샤는 당황한 듯 로렌스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카를로스의 어깨를 잡고 제 곁으로 끌어당겼다.

카를로스를 챙기는 듯한 그 행동에 로렌스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죄송해요. 제가 오해했나 봐요.”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그럼 아이는 내보내겠다 말하기를 기다렸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은 전혀 예상 밖의 것이었다.

“그럼 저희는 그만 가 볼게요.”

순간 로렌스는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패트리샤는 저와의 기 싸움에서 이겨 이곳에 남으려는 게 아니었다.

그만 가 보겠다는 그녀의 말은 더 없이 진심이었다.

왜?

저 아이는 받아 줄 수 없다고 해서?

“…여기까지 왔는데 그냥 하고 가.”

로렌스는 혼란스러운 마음을 간신히 억누르며 말을 꺼냈다.

“하지만 카를로스가….”

“아이도.”

대체 저 아이가 뭐길래.

“그래도 될까요? 그럼 저희는 오늘만….”

“…….”

“혹시 소공작님만 괜찮으시다면….”

패트리샤가 뭐라 말을 하는 듯했지만 로렌스는 그녀의 말을 듣지 못했다.

바로 제 앞에서 얘기했음에도.

로렌스는 카를로스와 함께 멀어지는 패트리샤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 패트리샤와 원래 친분이 있었던 걸까?

대체 무슨 사이길래 패트리샤가 계속 데리고 다니는 거지?

주인을 모시는 사용인이 주인의 일정이 끝날 때까지 기다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사실 당연한 것이었다.

근데 패트리샤는 카를로스를 기다리게 하지 않았다.

되려 자신이 일정을 끝내 버릴 뿐이었다.

저 아이와 떨어지고 싶지 않아서?

아니면 저 때문에 긴 시간을 무료하게 기다려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걸렸던 걸까?

“후우.”

어찌 됐건 패트리샤에게 카를로스라는 아이가 여러 사용인 중 한 명은 아닌 듯했다.

설마 정말 좋아하는 건가?

“…….”

그럴 리가.

“그럴 리가 없지.”

로렌스는 이내 고개를 저어냈다.

키도 작고.

놀라우리만치 잘생긴 것도 아니고.

신분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패트리샤가 이성으로 보기엔 너무 어리지 않은가.

패트리샤가 저 아이를 좋아할 리 없었다.

로렌스는 거기까지 생각을 마치고 뒤늦게 패트리샤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걸었다.

“카를로스. 이 다음에 어떻게 하는 거였지?”

“공녀님, 발이 틀리셨어요.”

패트리샤의 물음에 카를로스가 그녀에게 다가가 자세를 알려 줬다.

패트리샤의 관심 어린 눈빛이 아이를 따라다녔다.

얼핏 그 시선에 감탄도 섞인 듯했다.

“…….”

그 모습에 로렌스는 어쩐지 짜증이 났다.

제가 검술에 대해 알면 뭘 안다고 누굴 가르친단 말인가?

“그다음에는….”

“오른발을 움직여야지.”

로렌스가 카를로스의 말을 끊었다.

“한 발자국 내디뎌.”

“아, 소공작님. 저희는 신경쓰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저야 카를로스에게 물어보면 되니깐….”

“제 검도 못 고르는 놈한테 뭘 배우려고?”

로렌스가 아니꼽다는 듯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네?”

“키도 작은 게 검은 왜 그런 걸 들고 설쳐 대는 거지?”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카를로스 검이 왜….”

로렌스는 카를로스의 신장에 비해 지나치게 긴 검을 보고 고개를 저었다.

“너무 길잖아. 크고.”

“하지만 저 목검은 선생님이….”

패트리샤는 뭔가 말을 하려다 말고 작게 한숨을 내뱉었다.

로렌스는 그런 패트리샤를 바라보더니 카를로스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힘줘 잡았다.

“아야!”

“봐. 이러다 어깨 망가져.”

로렌스는 한심하다는 듯 패트리샤와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검술에 능한 저를 놔두고 이런 애송이한테 뭘 묻는 건지.

둘이 대체 뭘 하는 거란 말인가.

“그러니까 나한테….”

그러나 로렌스는 끝까지 말을 마치지 못했다.

“…카를로스, 오늘 돌아가는 길에 목검 좀 보러 가자.”

“아니요. 저는 이걸로도 괜찮은걸요?”

어딘지 풀이 죽은 패트리샤에 카를로스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아냐, 내가 딱 맞는 걸로 골라 줄게.”

로렌스는 패트리샤와 카를로스의 대화를 가만히 듣다 입을 열었다.

“이봐. 검이 필요한 거라면 따라와.”

검 좀 안 맞는 게 뭐 대수라고.

굳이 뭘 딱 맞는 것으로 ‘골라’ 준단 말인가?

로렌스는 입이 비뚜름해지려는 것을 간신히 억누르며 연무장의 창고로 걸음을 옮겼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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