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41화 (41/67)

41

기사들의 검을 지나쳐 구석에 놓인 선반을 올려다보던 로렌스가 검 하나를 꺼내 제 뒤를 따라온 카를로스에게 건넸다.

“아, 감사합니다. 소공작님.”

로렌스가 일곱 살쯤 사용하던 목검이었다.

로렌스는 목검과 카를로스를 번갈아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냥 가져.”

“네?”

“가져가라고.”

오랜 시간 사용했던 목검을 짜증 나는 주황 머리에게 줘야 한다는 게 마음에 들진 않았지만.

패트리샤와 카를로스 그 둘이 검을 고르러 가는 건 더욱 언짢았다.

“…감사합니다.”

“패트리샤를 따라 검술 수업에 들어간다지?”

“아, 네.”

“함께 수업도 배우나?”

카를로스도 로렌스의 목소리에 묻은 반감을 눈치챈 듯 조심스레 고개를 끄덕였다.

“….”

겁먹은 듯한 눈망울로 저를 올려다보는 카를로스에 로렌스는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아, 어린애 데리고.’

스스로 생각해도 우습고 유치한 행동에 로렌스가 서둘러 미간에 자리한 주름을 지웠다.

“그래서. 나이는 아홉?”

“아니요. 저는 열넷입니다.”

“뭐?”

열넷이라면 저와 4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었다.

패트리샤와는 3살 차이밖에 나지 않는 것이었고.

순간 로렌스는 믿을 수 없다는 듯 카를로스를 내려다보았다.

카를로스도 로렌스가 제 키를 본다는 것을 알아챘는지 고개를 돌렸다.

로렌스는 카를로스가 제 시선을 불편해한다는 것도 알고 있었음에도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패트리샤와는 무슨….”

“…네?”

“패트리샤가 왜 널 데리고 다니는 거지?”

화가 담긴 로렌스의 말투에 카를로스는 긴장한 듯 어깨를 움츠렸다.

“이봐, 그녀의 방에서 뭘 하느냐고.”

“…다과를 먹어요.”

카를로스의 말에 로렌스가 인상을 찌푸렸다.

다과? 왜 하필 얘랑.

“검술 수업은 왜 함께하는 거지?”

“…히끅.”

기어코 카를로스의 입에서 겁에 질린 딸꾹질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로렌스는 하인의 기분까지 고려해 줄 정도로 인자하지 못했다.

“대답.”

“…히끅, 그게, 히끅.”

로렌스는 그 짧은 질문에 대한 대답 하나 제대로 하지 못하는 카를로스에 더욱 화가 일었다.

“소공작님?”

“히끅, 히끅.”

그때 패트리샤가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패트리샤는 한껏 몸을 웅크린 채 딸꾹질을 하는 카를로스와 화가 난 듯 인상을 찌푸린 로렌스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그러더니 가까이 다가와 다시금 카를로스를 제 뒤에 숨겼다.

“소공작님, 무슨 일인가요?”

로렌스는 마치 제가 몹쓸 짓이라도 했다는 듯 카를로스를 숨기는 패트리샤의 행동에 헛웃음을 흘렸다.

“궁금한 게 있어 몇 가지 좀 물어봤을 뿐이야.”

“카를로스에게요?”

패트리샤는 소리를 죽인 채 딸꾹질을 참아 보려 애쓰는 카를로스를 바라보다 다시금 로렌스를 올려보았다.

“궁금하신 게 뭔데요?”

로렌스는 제 잘못을 추궁하는 듯한 지금의 상황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하? 왜? 내가 공녀에게 허락이라도 받고 질문했어야 하나?”

“네? 아니. 그게 아니라.”

“그게 아니면 그만 빠지지?”

로렌스가 비키라는 듯 턱짓했다.

그러나 패트리샤는 더욱 아이를 챙길 뿐이었다.

“아이가 겁먹었잖아요.”

“하? 아이? 열네 살이라며. 공녀랑 세 살 차이밖에 안 나는데 무슨 아이?”

따지는 듯한 로렌스의 말투에 패트리샤가 인상을 찌푸렸다.

“…왜 이렇게 화가 나신….”

“히끅. 공녀님. 히끅, 전 괜찮아요.”

카를로스가 패트리샤를 말리려는 듯 그녀의 옷자락을 살짝 잡아당겼다.

그 작은 손짓에 패트리샤의 고개가 돌아갔고, 동시에 패트리샤와 로렌스 두 사람의 미간이 일그러졌다.

“하, 패트리샤. 이게 무슨 태도지? 내가 질문 하나 하는데 공녀의 허락을 구해야 하는 위치인가?”

“…….”

“저 하인에게 물을 게 있으니 비키라고 분명히 말했어.”

“싫어요.”

“뭐?”

작게 숨을 들이마신 패트리샤가 눈을 부릅뜨며 로렌스를 노려보았다.

“싫다고요. 대체 뭐가 궁금하시길래 그렇게 매섭게 아이에게 겁을 주세요?”

말을 할수록 분이 나는지 패트리샤의 목소리가 점점 커져 갔다.

“제 사용인이에요. 이곳에는 제 부탁으로 함께한 거고요. 그럼 제 부탁으로 와 준 아이가 소공작님 때문에 겁먹고 끙끙대는데 제가 가만히 지켜봐야만 하나요? 전 그러기 싫어요!”

패트리샤가 씩씩거리며 로렌스에게 한 걸음 다가섰다.

“게다가 제가 언제 질문하지 말라고 했어요? 소공작님은 화를 내고 카를로스는 겁을 먹었으니까 제가 대신 답해 드리면 되는 문제였잖아요. 물어보고 싶은 게 있는 거였으면, 답을 듣기 위함이었으면 제가 답해 드려도 문제없는 거잖아요!”

“하? 지금 화를 내는 건가?”

“먼저 내셨잖아요!”

빽 하고 소리를 지르는 패트리샤에 로렌스가 할 말을 잃은 듯 그녀를 노려보았다.

대체 저 자식이 뭐라고 제게 성을 낸단 말인가.

로렌스는 진심으로 지금의 상황이 이해되지 않았다.

제가 왜 패트리샤와 언쟁을 하고 있어야 한단 말인가.

분명 저는 그녀를 위해 업무까지 미뤄 가며 시간을 냈고, 그녀를 돕기 위해 지금의 자리에 있는 것이 아니던가.

“대체 둘이 무슨 사이인 거지? 연애라도 하나?”

“하?”

패트리샤가 기가 찬다는 듯 제 머리를 거칠게 쓸어 넘겼다.

“제가 카를로스와 무슨 사이건 소공작님한테 제가 그걸 왜 알려 드려야 하죠? 지금 카를로스와 제 사이가 중요한 사안이냐고요!”

한참을 씩씩거리던 패트리샤가 입을 다문 건 카를로스가 다시 한번 그녀의 옷깃을 잡아당기고 나서였다.

“아….”

금방이라도 흘러내릴 듯 가랑가랑거리는 카를로스의 눈물을 본 패트리샤가 작게 탄식을 흘렸다.

“후우, 아무래도 저희가 이곳에 온 게 마음에 안 드시는 것 같으니 이만 가 보겠습니다.”

로렌스를 노려보며 말을 마친 패트리샤는 카를로스의 손을 잡고 연무장을 빠져나갔다.

“하?!”

창고에 혼자 남게 된 로렌스는 이 치미는 분노를 어떻게 해야 할지 조금도 알 수 없었다.

패트리샤가 무엇 때문에 제게 화를 내는 것인지도 알 수 없었고.

* * *

“…소공작님?”

“…….”

“연습은 벌써 끝나신 겁니까?”

“….”

“헤라르일라 공녀님은 어떻게, 가셨습니까?”

시몬의 말을 무시하고 걷던 로렌스가 걸음을 멈췄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그녀가 어떻게 되든 말든 저와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그래, 그녀의 일에 신경 쓸 필요가 전혀 없었음에도 쓸데없는 짓을 벌인 제 잘못이었다.

제멋대로에 제 생각밖에 하지 못하는 여자였다.

“이제 소공작님 귀찮게 안 할게요.”

패트리샤가 그간 절 찾아오지 않았던 이유.

그녀가 변한 이유.

결국 시몬이 맞았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더는 절 좋아하지 않게 된 것이었다.

그녀가 갑작스레 검술을 배우는 것도 아마 카를로스, 그를 위해서인 듯했다.

헤라르일라 공작과 패트리샤 사이의 그 변화의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다 잘 해결됐어요. 더는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녀는 제게 더 이상 상관하지 말라고 선을 그었다.

도움을 구하는 게 어려워 예의상 하는 말이라 생각했는데. 결국 아니었다.

패트리샤는 진심으로 제게 선을 그은 것이었다. 더는 신경 쓰지 말라고.

시작도 그러하더니 끝까지.

끝까지 제 멋대로인 여자였다.

“시몬, 두 번 다시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에 대해 말하지 마.”

쾅!

큰 소리를 내며 굳게 닫힌 집무실의 문에 시몬은 놀란 듯 눈만 깜빡이었다.

* * *

“공녀님, 괜히 저 때문에 죄송해요.”

“카를로스, 네가 왜?”

아직도 분이 다 풀리지 않았지만 애꿎게 눈치를 보는 카를로스에 나는 분을 삭이려 애를 썼다.

“갑자기 화를 내는 사람 잘못이지.”

“그래도….”

“아, 몰라. 사람 진짜 이상해.”

로렌스 게르하르트.

도통 그의 기분을 고려할 수가 없었다.

지난번부터 갑자기 화를 내다가, 또 갑자기 친절해졌다가.

제멋대로.

오늘도 마찬가지였다.

분명 제가 먼저 저희 연무장을 빌려 주겠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래, 물론 그의 말대로 그는 나만 초대했는데 내가 마음대로 카를로스를 데리고 갔으니 그건 내 잘못일지도 몰랐다.

“후우….”

아니, 그래도 그렇지.

그 넓은 연무장에 사람 하나 정도 더 들어간다고 문제 될 게 있냐는 것이었다.

좋게 말할 수도 있는 문제를 꼭 따지듯이.

그렇게 마음에 안 들었으면 가겠다고 할 때 붙잡지 말든가.

제 분을 카를로스에게 표출하는 건 또 뭐란 말인가.

게다가 카를로스와 연애라도 하냐고?

그 비아냥거리는 태도만 생각하면 아직까지 화가 났다.

“검까지 주셨는데….”

카를로스가 내 눈치를 살피며 검을 만지작거렸다.

한눈에 봐도 검술 교사가 카를로스에게 내주었던 검보다 카를로스에게 맞을 듯했다.

“…됐어. 누가 달라고 했어?”

카를로스에게 도움이 되고 싶어 시작한 일이었는데.

얄미운 교사는 카를로스에게 맞지도 않는 버거운 검을 내주기나 하고.

로렌스는 아무 잘못도 없는 아이한테 화나 내고.

“이러다 어깨 망가져.”

안 그래도 미안한데.

대체 뭐가 불만이길래 작은 아이한테 그렇게 몰아붙인단 말인가.

검이 버거워도 말도 못 하는 아이였다.

그런 카를로스가 겁먹고 딸꾹질까지 할 정도였으니.

어쩌면 또 살기나 슬슬 흘렸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땐 내가 잘못했으니까 할 말 없었지만. 이번엔 대체 뭐가 아니꼬워 그런단 말인가.

“짜증 나. 돌아가면 교사부터 자를 거야.”

“공녀님, 저 때문에 소공작님과 사이가 틀어진 거면 제가 가서 사과드릴게요.”

“됐어. 틀어지든 말든 아쉬울 것 없어. 그리고 네가 뭘 잘못했다고 사과를 해? 그 꼴은 절대 못 봐.”

흘긋 카를로스를 바라보았다.

카를로스는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단장이 되어야 하는데.

하긴.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실력 좋은 기사를 사사로운 감정 때문에 놓칠 리는 없으니 거기까지 내가 걱정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