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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42화 (4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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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똑.

“들어와.”

방문을 연 이는 다름 아닌 엠마였다.

“공녀님.”

“응, 듣고 있으니 말해.”

“다름이 아니라 별빛 무도회까지 이제 일주일밖에 안 남아서요. 슬슬 소공작님과 연락을 하셔서 어떻게 동행할지 정하셔야 할 듯해서요.”

“아….”

근 두 달 정도 만에 다시 듣게 된 로렌스의 이름이었다.

“그래야겠네.”

“그럼 편지지를 가져올까요?”

“응. 부탁 좀 할게.”

그리고 엠마가 편지지를 가지고 되돌아올 때쯤에서야 로렌스와 내가 다투고 헤어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아….”

사실 아직까지도 로렌스에게 반감이 남아 있느냐 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물론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먼저 화를 내긴 하였지만, 카를로스에 대한 미안함 때문에 내가 더 예민하게 반응한 것도 사실이었다.

“으음.”

그날로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기도 했고, 무엇보다 그가 집에서 쫓겨난 절 위해 기꺼이 방을 내준 날을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으니 말이다.

다만 오랜만에 건네는 첫인사를 어떻게 시작해야 하나 고민스러울 뿐이었다.

“공녀님, 무엇을 고민하시는 거예요?”

오랫동안 펜을 들지 못하고 종이만 노려보고 있으니 엠마가 고개를 갸웃하며 말을 걸었다.

“무슨 말로 편지를 시작해야 하나 잠깐 고민 중이야.”

소공작과 만날 일이 없기도 했고, 나름 바쁜 일상에 그와의 다툼을 잊고 있었다.

11월.

뜨거웠던 여름날은 이제 간데없고 며칠이 지나면 가을도 곧 끝이 날 듯한 계절이었다.

아버지는 여전히 내게 다정하려 애를 썼고 오라버니들도 슬금슬금 내 눈치를 보며 피해 다녔다.

일이 이렇게 되리라고는 예상치 못하고 자금을 모으려 골랐던 보석 드레스는 지난주에 도착했다.

공작이 고용해 주었던 검술 교사는 해고했고, 카를로스의 검술 교사는 개인적으로 새로 구해 주었다.

나는 그날로 검술을 관뒀고 카를로스는 그새 키가 5센티나 컸다.

다리가 아프다더니 키가 크려는 증상이었던 듯했다.

이대로만 간다면 아마 곧 나와 비슷해질 듯했다.

게다가 한 달 전쯤 내가 사교춤을 추지 못한다는 사실을 깨닫고 부랴부랴 선생을 구해 교육을 받았다.

아직도 스텝이 종종 헷갈리긴 하였지만 아주 못 봐 줄 정도는 아니었다.

나름 바쁜 두 달이었다.

사각사각.

긴 고민 끝에 펜 소리가 시작되었다.

길었던 고민이 무색하리만치 편지의 내용은 일반적이었다.

인사치레 차 안부를 묻고 본론을 말하는 뭐, 그런.

편지에는 그날의 다툼에 관한 언급도 사과의 내용도 없었다.

그간 별말이 없던 걸 보면 아마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도 잊고 지냈을 테니.

굳이 그날의 일을 꺼낼 필요는 없을 듯했다.

* * *

똑똑.

“소공작님.”

시몬이 조심스레 집무실의 문을 열었다.

“…편지가 왔습니다.”

로렌스와 눈이 마주친 시몬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게르하르트 공작령에 다녀온 뒤부터였나? 그쯤부터 로렌스는 계속 저 상태였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전혀 읽을 수 없는 얼굴이었다.

무표정한 낯빛, 무감정한 눈빛.

“초대장 정도는 네가 알아서 처리하지그래?”

“예. 그럼 초대장은 제가 처리하겠습니다. 근데 이건….”

시몬이 편지 봉투 하나를 로렌스에게 건넸다.

헤라르일라가의 인장이 찍혀 있는 봉투.

“헤라르일라 공녀께서 보내셨습니다.”

순간 로렌스의 눈썹이 작게 움직였다.

로렌스는 잠시 달력을 바라보다 봉투를 뜯었다.

팔락.

그가 빠르게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별빛 무도회 때 어떻게 만날 거냐 묻는군.”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파트너라고 같이 출발할 필요는 없지. 연회장에서 만나 같이 들어가는 걸로 하지.”

“답장은 직접 하시겠습니까?”

로렌스는 편지지와 봉투를 책상의 가장자리로 밀어내며 고개를 저었다.

“부탁하지.”

“네. 그럼 제가 답장 넣겠습니다.”

로렌스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시몬은 그런 로렌스를 잠시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럼 전 이만 나가 보겠습니다.”

탁.

집무실의 문을 닫은 시몬은 작은 한숨을 내뱉었다.

“대체 왜 그러시는 거지?”

차라리 패트리샤가 매일같이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찾아왔을 때가 더 나았던 듯했다.

그땐 적어도 로렌스가 짜증이나 화라도 냈으니.

지금은 저게 사람은 맞는지 의심까지 들 정도였다.

시몬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이내 발걸음을 돌렸다.

* * *

별빛 무도회 당일.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분주히 움직이는 작은 발소리가 방 안을 가득 메웠다.

“공녀님 숄 좀 챙겨 드려. 잔머리도 제대로 신경 쓰고.”

조금이라도 더 시간을 벌려는 듯 시녀들이 분주히 움직였다.

“공녀님. 구두로 갈아 신으실게요.”

“응.”

“목걸이와 귀걸이는 정말 이것들로 하시겠어요?”

“드레스가 충분히 화려하니 장신구까지 너무 화려할 필요는 없을 것 같아.”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시녀가 서둘러 목걸이를 채워 주웠다.

높이 틀어 올린 머리칼과 공을 들여 색을 더한 얼굴.

이 완벽한 얼굴이 내 것이라는 사실이 새삼스레 놀라웠다.

장신구를 최소화하여 화려한 드레스였음에도 그리 과해 보이지는 않았다.

새하얗고 뽀얀 피부와 살짝 올라간 눈은 오늘따라 반짝이었다.

오뚝한 콧대와 생기를 더한 입술.

더 이상 손 볼 데 없이 완벽했다.

“공녀님. 이제 끝나셨습니다.”

오늘의 치장에 모든 시녀들이 만족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공작의 명으로 제외당한 엠마만 빼고.

엠마는 여전히 내 치장을 돕는 역할에서 자신이 빠졌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뾰로통해 있었다.

“숄만 걸쳐 드릴게요.”

어깨가 훤히 드러나는 드레스에 시녀가 숄을 준비해 주었다.

그때 아무것도 하지 못한 채 방 한구석에 가만히 서 있던 엠마가 조심스레 다가왔다.

“공녀님, 너무 아름다우세요. 오늘은 특히 더요.”

“그래. 고마워.”

“근데 옆머리만….”

탁.

엠마는 못내 뭔가 아쉬운 듯 내게 손을 뻗었으나, 곁에 서 있던 시녀가 가차 없이 엠마의 손을 쳐냈다.

“엠마. 공작님께서 분명히 넌 빠지라고 하셨잖아. 왜, 또 그날처럼 공녀님의 머리를 타 버린 지푸라기처럼 망쳐 놓으려는 거니?”

“치, 알겠어.”

시녀의 단호한 지적에 엠마가 서운한 듯 입을 비죽이었다.

엠마는 단념한 듯 손을 거뒀지만, 그녀의 얼굴을 보니 여전히 아쉽다는 표정이었다.

풀이 죽은 듯한 엠마에 그녀에게서 시선을 떼어 내기가 힘들었으나.

그렇다고 내가 엠마에게 날 맡기고 싶은 건 아니었다.

사교계의 모든 인사들이 자리하는 오늘 같은 날은 결코 그럴 수 없었다.

“공녀님, 분명 오늘 무도회에 참여하신 영애들 중 공녀님이 가장 아름다우실 거예요.”

“이렇게 예쁘시니. 아마 소공작님도 반하실걸요?”

엠마를 쫓아낸 시녀들이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그 덕에 나도 서운한 듯 입이 나온 엠마에게서 고개를 돌릴 수 있었다.

똑똑.

한창 그들의 칭찬이 이어지던 그때 집사가 방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공작님께서 기다리고 계십니다.”

“지금 가지.”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와 함께 무도회에 가는 일정이었다면 좋았을 것을.

로렌스는 연회장 앞에서 만나 들어가자고 말했고 그 덕분에 공작과 오라버니들과 같은 마차로 이동해야 했다.

바쁘면 내가 그의 저택으로 가도 됐었는데.

“…공작님께서는 현관 홀에서 기다리시고 계십니다.”

문을 열고 나오자 집사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바라보는 시선에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그가 걸음을 움직였다.

또각, 또각.

구두의 굽 소리가 조용한 복도에 울렸다.

계단을 내려오자 가식적이게끔 커다랗게 눈을 뜬 공작과 인상을 찡그린 오라버니들이 보였다.

“패트리샤, 오늘 무척 아름답구나. 숲의 요정도 너보다 아름다울 수는 없을 게다.”

왜인지 정확히 알 수는 없지만 공작의 칭찬에 순간 기분이 언짢았다.

“정말이지 너무 아름답구나. 이런 여자와 파트너가 된 소공작도 참 운이 좋구나.”

하지만 그간 그래 왔듯이 입술을 끌어 올렸다.

“감사해요, 아버지.”

“그래, 소공작과는 연회장 앞에서 만나기로 했다고?”

“예.”

“그럼 패트리샤는 나와 모르간과 함께 마차를 타자꾸나. 그럼 이만 가자.”

흘긋 바라본 밀럼과 바버는 저들이 따로 이동해야 한다는 사실이 마음에 들지 않는 듯 보였다.

마음 같아서는 넷이 함께 가고 나 혼자 가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고 말하고 싶었지만, 공작이 에스코트 해 주는 대로 걸을 뿐이었다.

“패트리샤. 조심히 올라가거라.”

“감사해요.”

공작의 도움을 받아 마차에 올라타자 잠시 따라 올라온 시녀가 드레스를 정리해 주었다.

“…….”

달빛 한 점 떨어지지 않는 어두운 밤이었다.

꽤나 쌀쌀한 날씨에 숄을 움켜쥐었다.

이윽고 올라타는 공작과 모르간에 나는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빛 한점 없는 어둠에 창밖은 조금도 보이지 않았고, 다만 그 창에 비친 마차의 내부만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마차가 출발하였지만 내부의 그 어색한 분위기는 조금도 사라지지 않았다.

공작은 뭐라도 하나 더 말을 걸어 보려 나를 빤히 바라보았고 모르간은 공작과 나를 흘긋거릴 뿐이었다.

히이잉.

마차가 공작저를 벗어나 광장으로 들어섰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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