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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43화 (43/67)

43

히이잉.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완전히 멈추었다.

어두운 주변 탓에 불을 켠 황성의 연회장이 더욱 밝고 화려하게 보였다.

사람들의 웃음 섞인 인사 소리와 흘러나오는 선율 소리.

공작은 황성의 사용인이 마차의 문을 열어 주자 내리기 전 잠시 밖을 둘러보았다.

“패트리샤, 소공작은 아직 오지 않은 모양이구나. 모르간. 네가 패트리샤가 소공작을 만날 때까지 함께 있어 주거라.”

“…네. 알겠습니다.”

모르간은 공작의 명이 내키지 않는 듯했지만 이내 고개를 끄덕이었다.

먼저 마차에서 내린 공작이 내게 손을 내밀었다.

그의 손을 잡고 마차에서 내릴 때 주변 이들의 시선과 함께 작게 소곤거리는 소리가 들려왔다.

“패트리샤, 그럼 아비는 먼저 들어가마. 오늘 소공작과 좋은 시간 보내거라.”

공작도 사람들의 시선을 눈치 챘는지 평소보다 더욱 환하게 웃어 보였다.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공작은 마지막으로 내 어깨를 가볍게 도닥이더니 이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리 와.”

모르간이 쌀쌀맞게 입을 열었다.

“파트너가 무슨 이런 식으로 함께 해? 소공작도 너한테 마음이 그리 큰 건 아닌가 봐?”

꽤나 오랜만에 받아 보는 시비에 그를 가만히 바라보자 그가 분한 듯 미간을 찌푸렸다.

“크흠. 너 때문에 이게 뭐냐? 날도 추운데.”

모르간은 나와 더는 다투기 싫은 듯 먼저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밀럼과 바버가 타고 온 마차가 멈췄고 그들은 잠시 나와 모르간을 바라보다 이내 연회장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러고도 한참.

모르간이 다시금 입을 열었다.

“소공작과 만나서 들어가기로 한 건 맞아?”

짜증 섞인 비아냥이었지만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니, 할 수 없었다.

끝 가을의 쌀쌀한 밤바람에 숄을 걸치고 있었음에도 몸이 으슬으슬 떨려 왔다.

그렇게 5분 정도 더 기다리고 있을 때 모르간이 다시 한번 짜증을 내었다.

“야. 너 때문에 지금 이게 뭐냐? 벌써 20분째야.”

“그만 들어가도 돼.”

“뭐?”

“나 혼자 기다릴 테니 그만 들어가라고.”

“하?”

모르간이 기가차다는 듯 작게 헛웃음을 흘리더니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네가 그렇게 말했다. 그럼.”

모르간은 그렇게 미련 없다는 듯 자리를 떠났다.

“아씨. 추운데.”

모르간에게 우스워 보이기 싫어 추위를 참고 있던 나는 그가 가고 나서야 조심스레 온기를 잃고 차가워진 팔을 쓸었다.

손도 이미 차가워진 상태였기에 크게 따듯하지는 않았지만.

“언제 오는 거야.”

기약 없는 기다림에 한숨이 새어 나왔다.

20분 정도 기다리는 거야 크게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오늘은 날이 좋지 않았다.

추위와 사람들의 시선까지 함께 견뎌야 했으므로.

드레스 안에서 티나지 않게 발을 이리저리 움직이고 있을 때 게르하르트 가의 마차가 들어섰다.

순간 마차 안의 로렌스와 눈이 마주쳤다.

칠흑 같은 머리칼을 넘겨 드러난 반듯한 이마와 짙게 자리한 눈썹.

남자치고 긴 속눈썹과 반쯤 가려진 눈꺼풀 사이로 보이는 새빨간 눈동자.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주위를 둘러보며 천천히 마차에서 내렸다.

넓은 어깨와 긴 팔다리.

그가 고개를 돌리자 높은 콧대와 날렵한 턱선이 눈에 들어왔다.

새하얀 피부와 그의 눈 만큼이나 붉은 입술.

연미복을 갖춰 입은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평소와 달랐다.

놀랍게도 평소보다 더 멋있었고.

이상하게도 평소보다 차가워 보였다.

저벅저벅.

망설임 없이 다가온 로렌스가 나를 내려다보았다.

“많이 기다렸나?”

“…네.”

순간 로렌스의 눈썹이 작게 움직였다.

“날이 추운데 미안하군.”

짧게 사과를 내뱉은 로렌스가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만 들어가지.”

가죽 장갑을 낀 로렌스가 눈앞으로 손을 내밀었다.

내가 그에 대해 잘 아는 건 결코 아니었지만 어째서인지 평소와 달라 보이는 로렌스였다.

잠시 머뭇거리다 그의 손을 잡자 그가 내게서 완전히 시선을 돌렸다.

“소공작님.”

“…왜.”

“혹시 기분 안 좋으세요?”

그제야 로렌스의 시선이 다시 내게 닿았다.

아주 잠깐이었지만.

“아니.”

그 짧은 부정에 적절한 다음 말을 찾지 못한 나도 그만 입을 다물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 소공작님과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공녀님 입장하십니다!”

시종의 안내와 함께 연회장 안으로 들어서니 많은 이들의 시선이 느껴졌다.

수근 거리는 이들을 지나쳐 나를 끌고 연회 장 안으로 들어간 로렌스는 헤라르일라 공작을 찾아 인사를 건넸다.

짧은 안부 인사와 공작의 시답잖은 농담을 끝으로 둘의 인사가 끝이 났다.

그후 로렌스와 내 주위로 몰려든 이들에게 인사를 건네고 그들과 짧은 담소를 시작했다.

“초대장을 보내 주신다면 한번 들르겠어요.”

“어머, 공녀님께서 그리 말씀하신다면 빠른 시일 내에 자리를 한번 만들게요.”

나는 내게 말을 거는 영애에게 성실히 답변을 하면서도 로렌스가 신경 쓰였다.

그의 팔에 팔을 두른 채 에스코트를 받고 있었지만.

로렌스는 내게 선을 긋고 있었다.

처음 만났던.

불같이 화를 내던 그 날보다도 더 먼 것처럼 느껴졌다.

아니. 왜?

흘긋.

그를 올려다보았다.

웃음기라고는 조금도 찾아 볼 수 없는 입매와 차가운 눈빛.

오늘 그의 기분이 안 좋은 건 확실했는데.

그 원인이 나인지는 의문이었다.

그날 내가 화를 낸 것 때문인가?

어쩌면 로렌스는 아직 그날의 다툼을 기억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저, 소공작님.”

뭐 때문이냐는 듯 그의 눈썹이 살짝 들렸다.

“잠시.”

내가 테라스를 턱짓하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차라락.

커튼을 치고 나자 그제야 연회장의 웃음소리와 악기 소리가 한 꺼풀 꺾였다.

“뭐지?”

“혹시. 저한테 화나셨어요?”

순간 로렌스가 한쪽 눈가를 찌푸렸다.

“…아니.”

누가 봐도 내게 뭔가 있는 듯한 반응이었다.

“저, 그 연무장에서는 제가 조금 예민했던 것 같아요.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다면 죄송해요.”

로렌스가 반 발자국 뒤로 물러났다.

“저 때문에 기분 상하셨던 거.”

“…….”

“…맞죠?”

로렌스가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작게 한숨을 내쉬는 그는 어딘지 지친 듯도 보였다.

“…….”

그가 그날 일을 아직 마음에 담아 두고 있을 줄 알았다면.

그에게 편지를 보낼 때 짧게라도 사과를 전할 것을.

그도 나와 같은 마음이겠거니 넘겨짚었다.

“나도 잘한 건 없으니 신경 쓸 거 없어.”

로렌스가 다시금 한숨을 내뱉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의 입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움찔거렸다.

조금 처진 입꼬리와 힘없이 내려 뜬 눈.

차라리 화가 난 것이라면 좋을 텐데.

힘없이 지친 듯한 로렌스에 마음이 편치 않았다.

하긴.

오늘도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내 파트너로 함께한 데에는 그의 배려가 있었다.

내가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혼이 나지 않도록 도와주고자 날 배려한 행동이었으니.

생각해 보면 그의 도움을 참 많이 받았다.

“…….”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화가 나 폭력을 쓰는 이였다면 진작에 나부터 두들겨 맞았을 테지.

내가 아는 로렌스는 아무리 화가 나도 쉽게 폭력을 쓰는 이는 아니었고 그건 카를로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텐데.

“진작에 사과를 했어야했는데. 죄송해요.”

“신경 쓸 거 없다니까.”

그가 화가 났다면 그만한 이유가 있었을 터였다.

“할 말 다 했으면….”

로렌스가 그만 나가자며 걸음을 옮겼다.

“소공작님, 정말 괜찮으신 거 맞죠?”

“…….”

“오랜만에 만났는데. 정말 오랜만에 만난 건데….”

누가 뭐래도 내게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고마운 이였다.

흘긋.

로렌스를 흘긋 올려보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어쩐지 이대로 로렌스가 나가게 내버려 둔다면 그와 영영 멀어질 듯했다.

그렇다고 로렌스와 제가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처지도 아니었지만.

이런 식으로 멀어지는 건 싫었다.

“그날은 카를로스한테 미안한 마음에 제가 더 예민하게 반응했던 것 같아요….”

“…….”

“저는 소공작님과 이렇게 싸우고 멀어지고 싶지는 않아요.”

이곳에 와 처음으로 의지가 되던 이였다.

낯선 곳.

낫선 이들.

나를 싫어하는 가족들 사이에서 나를 위해 주었던 사람이었다.

결국.

끝내 멀어지게 될 이였지만 이렇게 얼굴 붉히며 끝을 내고 싶은 건 아니었다.

“왜 화가 나셨는지 말해 주시면 좋겠어요….”

투욱.

순간 로렌스가 제 겉옷을 벗어 내 어깨를 덮어 주었다.

초겨울, 울창한 숲의 한가운데에 들어선 것 같은 향.

로렌스의 향이 느껴졌다.

놀라서 로렌스를 올려다보자 한숨을 쉬며 그가 입을 열었다.

“나도 모르겠어.”

“네?”

“내가 왜 화가 나는지 정확히 모르겠다고.”

또다.

언젠가 봤던 표정이었다.

마치 버림받은 듯한 얼굴.

“그게 무슨….”

“네가 변한 이유가 더는 날 좋아하지 않기 때문인가?”

그가 왜 이런 것을 묻는 건지 이해하지 못하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리자 로렌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나는 어느 날 바뀌어 버린 네가 신경 쓰여.”

“네?”

“넌 헤라르일라 공작과 잘 해결됐으니 신경 쓸 거 없다고 말했지만, 나는 그게 진실인지 모르겠어. 네가 내 도움이 부담돼 거짓말을 하는 건 아닐지 하고 말야.”

로렌스가 답답한 듯 제 이마를 짚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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