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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것도 모르겠어서 답답하고 짜증 나. 네가 변한 이유도 헤라르일라 공작가에서는 정말 문제없이 잘 지내는 건지도.”
로렌스가 다시금 깊은 한숨을 뱉어 냈다.
“네가 힘들다고 날 찾아와 울었… 찾아왔잖아.”
로렌스의 말에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하룻밤 잤던 그 날이 떠올랐다.
그에게 돈을 꾸려 울먹였던 그 순간을 말하는 듯했다.
“공작은 화가 나 널 찾으러 왔고. 근데 넌 갑자기 다 잘 해결됐다고, 신경 쓰지 말라고 하면.”
“아….”
“아무런 설명도 없이 그렇게 끝인 거야?”
로렌스의 물음에 나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그제야 아차 싶었다.
아직까지 날 신경 쓰고 있었구나.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내 생각보다도 훨씐 더 날 걱정하고 있었다.
‘나랑 혼인하면 더는 공작이랑 부딪히지 않아도 되잖아.’
이제야 소공작이 내게 건넸던 그 말의 무게를 조금은 알 것 같았다.
변명할 것 없이 내 잘못이었다.
“그래. 개인적인 가정사니 나한테 말하기 싫은가 했어. 그래서 옆에 두고 지켜보려 했고. 네 말대로 정말 괜찮은 건지.”
옆에 두고 지켜보려 했어.
로렌스는 혹여나 내가 도움이 필요하진 않을까 걱정하고 있었다.
“하아, 그랬는데. 예상대로 흘러가지 않는 상황에 통제 안 되는 것들에 나도 모르게 짜증이 나더라.”
로렌스의 미간이 답답한 듯 한껏 일그러졌다.
그의 인상이 짙어질수록 미안한 마음이 커져 갔다.
나는 그저 로렌스, 그가 어쩔 수 없이 날 도와준다고 생각했다.
내가 도와 달라고 부탁하니 어쩔 수 없이 도와주는 거라 생각했다.
정말 진심으로 날 걱정하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내가 괜찮으니, 괜찮아졌으니 나를 향한 그의 걱정도 끝이 났으리라 생각했다.
“죄송해요. 저는 소공작님께서 절 부담스러워하실 거라고 생각했어요. 그래서 최대한 걱정 끼치지 않고 신경 쓰실 일 없게 하는 게 맞는 거라고 생각했어요.”
굳이 연무장을 빌려 주겠다 말한 이유가, 곁에 두고 내가 정말 괜찮은지 확인하려던 거였구나.
“제가 생각이 짧았어요. 계속 신경 쓰시고 걱정하실 거라고는 차마 생각 못 했어요.”
그런 사람한테 화를 냈으니.
“…제가 다 설명할게요.”
그때 나팔 소리를 시작으로 오케스트라의 연주곡이 변했다.
“그게 어떻게 된 거냐면….”
“황제 폐하께서 오셨나 보군.”
“저….”
“일단 나가자.”
로렌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커튼을 걷고 그만 가자는 듯 나를 바라보았다.
“이리 와. 패트리샤.”
머뭇거리는 나를 향해 그가 고개를 까딱해 보였다.
지금이 아니어도 로렌스가 내 말을 들어 주려 할지 걱정이 들었지만, 지금은 나갈 수밖에 없었다.
로렌스가 내게 건넸던 제 겉옷을 다시 가져갔다.
차가운 밤바람을 막아 주던 그의 옷이 없어지니 어딘지 마음이 답답했다.
로렌스가 다시금 제 팔을 내게 내밀었다.
나는 그를 흘긋 올려다보다 이내 그의 팔에 손을 올렸다.
“….”
생각해 보면 나를 위해 나서 주던 건 카를로스처럼 로렌스도 마찬가지였는데.
나를 돕는 게 제게 해가 될 수 있었음에도 로렌스는 기꺼이 나서 주었다.
“….”
내가 걱정되어 한걸음에 달려와 준 카를로스에게는 마음의 문을 열어 놓고.
왜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는.
…그게 안 됐다. 그러지 못했다.
물론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싫냐고 묻는다면 그건 결코 아니었지만.
로렌스에게 너무 친근하게 다가가면 안 될 듯싶었다.
패트리샤의 정해진 운명에 그와 잘못 엮이면 위험해질 것만 같아 선을 그었다.
그게 로렌스에게 어떻게 비칠지는 생각하지 못한 채.
“하아….”
머리로는 알고 있었다.
나는 패트리샤가 아니고, 로렌스와 여주의 사이를 방해할 생각도 계획도 전혀 없으니 내가 죽을 일도 없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는데 아직도 조금 두려웠다.
게다가 로렌스는 카를로스보다 원래의 패트리샤에 대해 잘 아는 인물이었다.
혹 내가 진짜 패트리샤가 아니라는 걸 들키지는 않을까 하는 두려움도 있었다.
그러한 이유들로 로렌스와 멀어져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려고 했고.
어쩌면 지금이 로렌스와 자연스럽게 관계를 끊을 수 있는 가장 좋은 기회였다.
“…….”
가장 좋은 기회였는데.
막상 닥쳐 보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언젠가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멀어져야 한다고 해도 지금은, 이런 식으로는 싫었다.
“패트리샤.”
로렌스의 부름에 고개를 들자 어느새 황제는 황좌에 앉아 있었고 곡은 다시 바뀌어 있었다.
이내 많은 영애와 영식이 연회장의 가운데를 향해 나아갔다.
“한 곡 춰야 할 듯싶은데.”
로렌스가 주변을 둘러보며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래?”
“…좋아요.”
아무래도 그와 다시 테라스로 나가려면 춤 한 곡 정도는 춰야 할듯 했다.
많은 이들이 나와 로렌스를 주목하고 있었으니.
고개를 끄덕이자 로렌스가 내 손을 잡고 홀로 이끌었다.
고풍스러운 선율에 다른 이들이 몸을 움직이기 시작했다.
“패트리샤, 고개를 들어야지.”
그때 로렌스가 가까이 다가와 속삭였다.
내 허리에 올린 손에 살짝 힘을 주어 당기는 로렌스에 고개를 들자 눈앞에 자리한 그의 얼굴이 보였다.
멍하니 서 있던 나는 로렌스가 고개를 살짝 기울이고 나서야 서둘러 스텝을 밟았다.
그 어설픈 스텝으로 한참을 허둥거리다 로렌스의 발을 밟았다.
“아, 죄송해요.”
“하아, 그간 있었던 일에 대한 네 설명을 듣는 건 나도 원하는 바야.”
로렌스가 작게 한숨을 뱉어냈다.
“그러니 지금은 춤에 집중하지.”
“…네.”
그러나 애석하게도 대답을 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또 그의 발을 밟아 버렸다.
“아, 죄송….”
순간 로렌스가 반쯤 입을 벌린 채 환히 웃었다.
붉은 입술이 벌어지며 새하얀 치아가 보였다.
이윽고 곱게 접히는 눈. 길어진 눈꼬리와 봉긋하게 솟은 볼.
“하아, 됐어. 너도 알겠지만 지금은 모두가 우릴 보고 있어.”
그 미소에 눈도 떼지 못하고 가만히 그를 바라볼 때 로렌스가 한숨을 내쉬며 말을 이었다.
“근데 네가 내 발을 밟았는지 아닌지는 우리 둘밖에 몰라. 그러니까 발을 밟아도 당황하지 말고 웃어.”
“…그.”
“네가 그렇게 당황한 티를 내면 내가 밟혀 주는 의미가 없잖아.”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세 번째 실수를 저질렀다.
조금 전부터 여러 생각들로 머리가 엉망이었다.
거기다 계속해서 로렌스의 발을 밟아 대는 탓에 긴장으로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몸이 굳을수록 실수는 더 잦아졌고.
로렌스는 계속되는 내 실수에 짜증이 치민 듯했지만, 부러 더 밝게 웃어 보였다.
“웃어, 패트리샤.”
꽤나 살벌한 명이었다.
로렌스의 명에 어색하게 입꼬리를 끌어오려 보였다.
그러나 그 정도로는 모자라단 듯 로렌스가 조용한 시선으로 종용했다.
“하하.”
무슨 생각을 하기도 전에 입은 이미 최대치로 찢어졌다.
그에 맞게 눈도 반쯤 감으니 로렌스가 그제야 작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 * *
“하아. 최악이야.”
길고도 끔찍했던 춤이 끝나고 다시 테라스로 돌아 온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었다.
무려 열세 번이었다.
로렌스의 발을 사뿐히 즈려밟은 게 말이다.
로렌스는 잠시 기다리라는 말만 남겨 두고 어딘가로 가 버렸다.
“하아….”
다시 생각해도 정말 최악이었다.
내가 만약 로렌스 게르하르트였다면….
다시금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그때 커튼을 건드는 소리가 나 고개를 드니 로렌스가 서 있었다.
손에 음료를 든 채.
“자.”
“…감사해요.”
로렌스가 내게 잔을 넘기며 옆자리에 앉았다.
“날이 추우니 빨리 들어가지.”
“아, 그럼 이거….”
“됐어. 그냥 덮어.”
조금 전 로렌스가 다시 걸쳐 줬던 그의 재킷을 돌려주려 하자 로렌스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그와 동시에 어색한 침묵이 내려 앉았다.
나는 그가 건넨 잔을 만지작거리다 조심히 입을 열었다.
“저, 저는 이제 정말 괜찮아요. 아버지도 오라버니들도 더는 제게 모질게 굴지 않으시거든요.”
나는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진실을 말하기로 했다.
“그게 실은.”
그게 그를 향한 최선의 배려인 듯했으니.
“제가 아버지를 협박했어요.”
순간 로렌스가 눈살이 찌푸려졌다.
“…제가 사생아라는 사실을 사람들에게 다 털어놓겠다고요.”
나는 한껏 목소리를 죽인 채 속삭였다.
이곳에는 로렌스와 나.
단둘밖에 없었지만, 그럼에도 오직 그만 들을 수 있도록.
로렌스의 붉은 눈이 잘게 흔들렸다.
내가 로렌스에게 그간의 일을 말할 수 없었던 이유는 혹 로렌스의 의심을 사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지금껏 참고 살던 패트리샤가 갑작스레 아버지를 협박했다 하면 혹 의심을 살까 봐.
그러니까 나는 지금 위험을 감수하고 그에게 사실을 털어놓는 것이었다.
꽤나 큰 결심이란 말이었다.
“…그랬더니 그 후로는 꽤 잘해 주세요.”
“…공작이 그 말을 믿던가?”
“그런 것 같아요. 조금은 진심이었으니깐요.”
로렌스가 복잡한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 이내 고개를 돌렸다.
그러다 얼마 후 다시 입을 열었다.
“…카를로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이유는 뭐지?”
갑작스런 카를로스에 관한 물음에 나는 입을 다물었다.
아이가 배우고 싶어 해서? 재능이 있는 아이였으니까? 뭐라고 말해야 좋을지 잠시 고민했다.
로렌스는 그런 나를 가만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에게 붙여 준 선생이 우리 가문의 기사였다는 건 알고 있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일부러 그런 조건을 가진 이를 찾았던 거였으니 모를 수가 없었다.
애초에 카를로스에 관한 얘기가 로렌스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며 고른 선생이었으니.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