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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가 우리 가문의 기사단장에게 그를 추천한 모양이야. 실력이 뛰어나다며.”
“…정말요?”
카를로스의 실력이 로렌스의 귀에 들어가기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로렌스가 알게 된 게 생각보다도 빨랐다.
역시 카를로스는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이 있었나 보다.
“원한다면 우리 가문에서 다른 기사들과 함께 연습을 시켜 줄 수도 있어.”
“…그러면 카를로스가 게르하르트 가문의 기사가 되는 건가요?”
“…아니.”
“네? 왜요?”
가볍게 고개를 내젓는 로렌스에 놀라 인상을 찌푸리자 그가 잠시 나를 빤히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왜, 그가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되었으면 좋겠나?”
“…네.”
“왜지? 왜 헤라르일라가가 아니라 왜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되길 바라는 거지?”
“그야 소공작님 가문의 기사단이 가장 실력 있는 곳이니깐요. 게다가 저는 카를로스가 저희 가문과 엮이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로렌스가 말없이 나를 바라보았다.
꽤나 시간이 지나고 그가 내뱉은 질문은 의외의 것이었다.
“그를 좋아하나?”
“아니요?”
황당함에 말끝이 조금 올라갔다.
“그럼 그와는 무슨 사이인 거지?”
“…고마운 친구 사이?”
귀족가의 영애가 가문의 사용인과 친구가 됐다는 걸 로렌스가 믿을까?
원래의 패트리샤를 알고 있던 그에게 의심을 살까 싶어 뒤늦게 말끝을 흐렸다.
“친구?”
역시나 로렌스가 의아하다는 듯 되물었다.
“그, 제가 힘들 때마다 도와줬거든요.”
로렌스는 조금 눈살을 찌푸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솨아아.
차가운 밤바람이 얼굴을 훑고 지나갔다.
나는 생각에 잠긴 듯한 로렌스를 흘긋 바라봤다.
이 정도면 충분히 설명한 건가?
조용한 테라스 안으로 금관 악기 특유의 화려한 소리가 조용히 흘러 들어왔다.
내려앉은 침묵에 그제야 조심스레 로렌스가 건넸던 음료를 홀짝이었다.
“그래서, 너는 더 이상 날 좋아하지 않는 건가?”
“크흡. 네?”
“왜? 아니면 아직도 날 좋아하나?”
상체를 뒤로 젖힌 채 나를 내려다보는 로렌스에 서둘러 잔을 내려놓았다.
나는 쉬이 답하지 못하고 로렌스의 눈을 바라보았다.
그 눈을 보면 그의 생각을 알 수 있지 않을까 싶어.
그러나 고요한 그 눈빛은 내가 뭐라 답해도 별 상관없는 듯 보였다.
“…아니요. 이제 마음 정리했어요.”
“그럼 네게 난 뭐지?”
“그게 무슨?”
“카를로스와 친구가 된 이유가 고맙기 때문이라 하지 않았나?”
로렌스가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그랬죠.”
“나도 공녀를 꽤 도와줬다고 생각하는데. 아닌가?”
“도와주셨죠. 많이요.”
“그럼. 우리도 친구가 아닌가?”
친구.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인상이 절로 찌푸려졌다.
“소공작님과 제가 친구요?”
“왜? 내게는 고맙지 않은가?”
“아니요. 그건 아닌데.”
“하면?”
로렌스가 뭐가 문제냐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너와 내가 친구가 되지 못할 다른 이유가 있나?”
그런 게 있을 리가.
오히려 로렌스가 친구가 되어 준다면.
다시 한번 빠르게 머리가 돌아갔다.
그러나 이내 이득을 재빠르게 계산하고 있는 내가 싫어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내가 고개를 내젓자 문제없지? 라는 표정을 지어 보이는 로렌스였다.
“저, 소공작님은 저와 친구가 되고 싶으세요?”
“응.”
“왜요?”
나야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친구가 되면 좋은 점이 많았다.
혹 도움이 필요할 때 부탁할 수 있을 테니.
무려 게르하르트의 차기 가주였다.
그와 친구가 될 수 있다는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하지만 로렌스는 대체 왜?
그가 나와 친구가 되어 얻을 게 있던가? 아마 없을 테지.
“왜 저랑 친구가 되고 싶으신 건데요?”
그간 로렌스를 속이려 했던 순간들이 빠르게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인간적으로 막 괜찮은 사람도 아니지 않았는가. 물론 속은 그는 모르겠지만.
로렌스가 느리게 눈을 깜빡이었다.
적절한 대답을 골라내듯 눈을 깜빡이던 그가 이내 입을 열었다.
“잘 모르겠는데?”
“네?”
“잘 모르겠다고.”
그러나 정작 로렌스가 내놓은 대답은 조금도 내 궁금증을 해소해 주지 않았다.
무성의한 대답일 뿐이었다.
“흐음. 그럼 이제 저한테 화나신 거 없는 거죠?”
로렌스가 작게 한숨을 쉬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저흰 이제 친구인 거고요?”
로렌스가 다시금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럼 저 어디 가서 소공작님을 제 친구라고 소개하고 다녀도 되는 거죠?”
순간 로렌스가 멈칫하였다.
“굳이?”
로렌스가 한쪽 눈썹을 들어올렸다.
“굳이 그런 짓을?”
“친구라면서요.”
내가 어깨를 으쓱이자 그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지 내키지 않는 상황에도 평소보다 너그러운 로렌스였다.
“…그럼 저도 이제 소공작님한테 말 놔도 되는 거죠?”
“뭐?”
“아니, 그렇잖아요. …이제 우린 친구니까.”
와락 눈살을 찌푸린 로렌스에 순간 시선을 떨궜지만 이내 다시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이제 와 하는 말이지만, 솔직히 마음에 들지 않았다.
아니, 다른 영애와 영식에게는 격식 차려 말하면서 나한테만 툭툭 말을 놓았다.
나한테만 말이다.
나는 애당초 로렌스가 그런 성격인 줄 알았다.
모두에게 반말을 하는 버르장머리 말이다.
하지만 로렌스는 누구보다 예의를 아는 사람이었다.
오직 나한테만 그 예를 지켜 주지 않을 뿐이었던 거였다.
차별도 그런 차별이 없었다.
“안 돼?”
“하?”
너그러워진 소공작이 친구가 된 기념이라며 허락해 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그러나 삐딱하게 올라간 눈썹이 내려올 기미가 없는 걸 보니 그의 자비는 이미 끝이 난 듯했다.
서둘러 꼬리를 내려야 할 때였다.
“아니, 저는 친구끼리 친근함의 표현으로….”
“해 봐.”
로렌스가 거만하게 고개를 들었다.
“네?”
“어디 한번 해 보라고.”
해 보라는 로렌스에 잠시 고민했으나.
막상 삐뚜름하게 올라간 붉은 입술을 보니 말이 나오지 않았다.
두 눈 부릅뜨고 해 보라고 하면 어떻게 할 수 있겠느냔 말이었다.
“…하하하, 생각해 보니 아무리 친한 사이라도 오래가려면 예를 지켜야 하는 것 같아요.”
“그럼 편할 대로.”
로렌스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저는 내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마치 선택권이 내게 있었다는 듯 뻔뻔한 태도였다.
흘긋 그를 노려보다 눈이 마주쳐 서둘러 웃었다.
로렌스는 잠시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근데 헤라르일라 공작과는 그게 끝이야?”
“…아버지요?”
“아니. 협박이었다며. 협박을 통해 얻어 낸 게 꽤 잘해 준다, 그게 끝이냐고.”
나는 잠시 고민하다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럼?”
“자유를 얻었죠. 이제 제 마음대로 제가 원할 때 저택을 나가도 되고요. 또 강제적인 결혼도 없을 거예요.”
로렌스가 가까이 다가와 입을 열었다.
“공작이 그렇게 약속했나? 결혼에 대해서?”
“네. 그리고 근처 영지에 제가 지낼 거처를 얻어 주기로 하셨어요.”
“그게 네가 진심으로 원하는 건가?”
나를 바라보는 로렌스의 시선에 다시 한번 걱정이 어렸다.
내가 진심으로 원하는 것.
“…그럼요. 제가 원하는 거죠.”
내 말에 로렌스가 말없이 고개를 끄덕이었다.
“그럼 수도에서 내려가겠군.”
“아마 내년 중으로는요.”
로렌스가 말없이 고개만 끄덕이었다.
아무래도 로렌스의 눈에는 수도를 떠나는 내가 반쯤 쫓겨나는 것으로 비치는 듯했다.
하긴. 어쩌면 그의 생각이 맞을지도.
공작과 오라버니들의 괴롭힘에 떠나려는 건 맞으니까.
그들이 애당초 패트리샤에게 친절했더라면 굳이 떠나려 하지 않았을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또 그리 슬픈 일은 아니었다.
어쨌거나 공작과 오라버니들과의 연에 미련이 없었으니.
“어느 영지로 내려갈지는 정했나?”
“아뇨. 아직.”
헤라르일라 공작이 알아보고 있다고 했었으니 나름 좋은 곳으로 골라 주지 않을까? 싶었다.
“원한다면 우리 영지로 와. 헤라르일라의 공녀이니 어디든 기본적인 대우는 받을 테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인 친분이 있는 곳이 더 좋잖아.”
그런가?
게르하르트 영지.
확실히 도움을 받을 수 있는 이가 가까이 있다면 마음이 놓일 것 같기는 했다.
역시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친구가 된 건 최고의 행운인 듯했다.
“한번 생각해 봐.”
“네.”
로렌스는 뭔가 내게 할 말이 더 있는 듯했지만 끝내 말을 더 잇지는 않았다.
“그럼 그만 일어나자. 너무 오래 있었어.”
“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를 따라 일어났다.
다시 연회장으로 들어서자 영애들의 흘긋거리는 시선이 느껴졌다.
그때 웨이브 진 머리를 길게 늘어뜨린 영애가 다가왔다.
“소공작님은 춤은 더이상 안 추시나요?”
그제야 영애들의 시선의 뜻을 알아차린 나는 조심스레 로렌스의 팔에서 손을 거뒀다.
로렌스는 딱히 내키지는 않는 듯했지만 이내 제게 말을 건 영애에게 춤을 신청했다.
순간 영애의 얼굴 위로 환한 미소가 떠올랐다.
“좋아요.”
로렌스와 그 영애가 손을 잡고 홀로 나아갔다.
사람들 틈에 섞여 그들을 시선으로 쫓던 나는 순간 내 곁에 사람들이 있다는 것도 잊어버리고 경악에 잠겨 탄식을 흘렸다.
“아으, 저게 뭐야.”
홀의 중앙에서 몸을 흔들고 있는 건 분명 모르간 헤라르일라, 그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