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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운 여자의 손을 잡은 모르간이 행복해 마지않다는 듯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항상 뭐 씹은 표정만 짓던 그 모르간이 웃고 있었다.
“아으….”
왜 때문인지 모르간이 웃는 걸 보니 기분이 썩 유쾌하지는 않았다.
그의 손을 잡은 여자가 상당한 미인이라는 점에 더더욱.
모르간을 마주 보고 싱긋 웃고 있는 여자는 정말 미인이었다.
새하얀 피부와 크고 동그란 눈. 높은 콧대와 동글한 콧방울.
적당한 크기의 탱글한 붉은 입술까지.
웨이브 진 옅은 갈색 머리칼을 하나로 묶은 여자가 나풀거리며 움직였다.
그 살랑거리는 몸짓은 마치 요정 같았다.
“어쩌다가.”
이 넓은 연회장.
이 많은 영식 중 하필 어쩌다 모르간 헤라르일라와 춤을 추게 된 것인지는 몰라도, 진심으로 안타까울 뿐이었다.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모르간의 입이 움직였고 이내 여자가 눈을 곱게 접고 웃었다.
예쁜 여자가 비위까지 좋은 듯했지만 나는 진심으로 어서 곡이 끝나기를.
저 불쌍한 여자가 일 초라도 빨리 모르간에게서 도망칠 수 있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멀리서 봐도 이렇게 아름다운데 자세히 보면 정말 놀라울 듯했다.
“헤라르일라 공녀님.”
그때 누군가 말을 걸어왔다.
고개를 돌리자 전에 인사를 나눴던 영애가 서 있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 소공작님이 다른 영애와 춤을 추는 게 신경쓰이시나 봐요.”
“예?”
“인상을 쓰고 계시길래요.”
영애의 지적에 그제야 인상을 쓰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나는 멋쩍게 웃으며 미간을 문질렀다.
“그게 아니라 모르간 헤라르… 오라버니가 너무 행복하게 춤을 추고 계셔서요.”
“네?”
그제야 영애의 시선이 모르간에게로 옮겨갔다.
“영애와 오라버니가 그닥 어울리지 않는 듯해서요.”
“아, 하긴. 수준이 맞지는 않네요.”
귀족사회에서 가족 간의 사적인 문제를 드러내는 게 득 될 게 없는 행동이라는 걸 잘 알고 있었다.
친분도 없는 이 영애에게 모르간을 흉봐 봤자 좋을 게 없다는 걸 잘 알았다.
그녀의 입이 얼마나 무거울지 알지도 못하는 상태에서는 더욱 말이다.
그래서 이 언짢은 상황을 애둘러 말하고 있었는데.
‘수준이 맞지는 않네요.’
이렇게 단번에 내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을 만날 줄이야.
역시 다른 이들이 보기에도 이 상황이 퍽 일반적이지는 않은 듯했다.
“그러니깐요. 영애가 무척 착한가 봐요.”
“풉. 하긴 착하기라도 해야죠.”
“…네?”
“가문이 안 되면 착하기라도 해야죠. 안 그래요?”
그러나 내게 말을 건 영애는 아무래도 나와 같은 생각은 아닌 듯했다.
“아주 먼 친척에게 부탁해 수도 사교계에 나온 거래요. 그냥 태어난 대로 살 것이지. 그렇게까지 해서 아득바득 나오는 것도 웃기죠.”
그 영애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보세요. 저 영애가 입은 드레스 하며, 헤어 스타일 하며, 목걸이까지. 하나같이 고급스럽지가 않잖아요. 드레스는 영지에서 올라 올 때 갖고 온 모양이에요.”
영애가 한참을 키득거리다 입을 열었다.
“그런 주제에 감히 헤라르일라 공자님한테 집적거리다니. 영악하긴 한데 제 주제를 모르는 거죠.”
“…영악이요?”
“그렇잖아요. 헤라르일라가의 차기 가주에게 들이대는 걸 보면 아주 영악하죠. 하지만 아무리 들이대 봤자 공자께서 미치지 않고서야 저런 여자를 공작 부인에 앉히시겠어요? 혹 공자의 마음에 든다 하더라도 헤라르일라 공작님께서 두고 보실 리가 없고요.”
영애의 말을 듣던 나는 다시금 모르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여전히 실실거리는 중이었다.
눈웃음을 어찌나 치는지 앞은 보일까 하는 인간적인 걱정이 들 정도였다.
“표정만 보면 가문의 인장까지 넘길 판인데요?”
“네?”
“아니, 저 영애 예쁘다고요.”
내 말에 곁에 서 있던 영애가 인상을 와락 찌푸렸다.
“…예뻐 봤자죠. 그래봤자 사교계의 꽃한텐 상대도 안 되잖아요.”
“사교계의 꽃이요?”
그거 패트리샤 아니던가?
그러나 이윽고 이어지는 영애의 대답에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헤라르일라 공녀님이요.”
어쩐지 그 말을 하는 영애의 표정에서 뿌듯함이 얼핏 엿보였다.
하긴.
패트리샤가 예쁘긴 하지.
오랜 기다림 끝에 드디어 영애와 내 의견이 일치하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그건 둘째치고, 놀라운 건 놀라운 것이었다.
제국 내 패트리샤와 견줄 만큼 어여쁜 영애가 있었다니.
…잠깐.
“…저기, 혹시.”
순간 아찔한 생각이 머리를 스쳐 갔다.
“저 영애의 이름이 뭔지….”
“글쎄요. 얼핏 듣긴 했는데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어서 잊어버렸네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손은 착실히 떨리고 있었다.
“혹시 영애 이름이….”
쉬이 진정되지 않는 그 손이 내 불안을 여실히 드러내고 있었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인가요?”
“비슷하게 들었던 것 같네요. 혹 공녀께서 아시는 분인가요?”
쿵.
쿵쿵.
심장이 얼마나 세차게 뛰는지 그 소리가 귓가에서 울릴 지경이었다.
“확실해요? 정말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라고요?”
“…아마 맞을 거예요.”
말도 안 돼.
내가 아는 한 여자주인공이 정식으로 수도에 올라 오는 건 2년 후의 별빛 무도회에서였다.
아마 그게 그녀의 공식적인 첫 수도 사교계 데뷔일 텐데.
그러니 소설대로라면 지금은 여자주인공이 수도에 있을 시기가 아니었다.
2년 후.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약혼녀이자 파트너로 수도의 사교계에서 데뷔하는 여자주인공.
모든 사교계의 인사가 그녀에게 주목하게 되는 꽤 유명한 사건이었다.
소설 중 중요한 사건이었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틀어지면 안 되는데.
소설이 바뀌었다.
“…저 영애는 오늘 수도의 사교계에 처음 나온 건가요?”
“네. 뭐, 불쌍하죠. 데뷔날에도 큰 주목을 받지 못하니 말이에요.”
영애가 비웃듯 혀를 차며 말했다.
“그보다 공녀 괜찮으신 건가요?”
영애는 한껏 당황한 내가 이상하다는 듯 조심스레 나를 살폈다.
“아, 네.”
나는 서둘러 손을 들어 보이며 애써 웃어 보였다.
“괜찮지 않을 이유가 없죠.”
쿵, 쿵쿵.
그러는 와중에도 심장은 거세게 뛰어 댔다.
이렇게 바뀌어도 되는 건가? 대체 왜 이렇게 된 거지?
초조함에 입 안을 깨물던 나는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영애께서는 춤은 많이 추셨나요?”
“…많이 추긴 했죠. 공녀께서는 소공작님 외에는 함께 추지 않으실 건가요?”
“신청해 주시는 이가 없어서요.”
내 일련의 행동이 자연스러워 보이길 바라며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기다려도 안 오실 듯하니, 전 목이나 축이러 가야겠어요.”
이 정도면 꽤 자연스럽게 자리를 파했다 생각했건만.
왜인지 영애가 나를 따라왔다.
“공녀님, 저도 함께 가요.”
“아, 편하실 대로.”
애써 싱긋 웃어 보이자 가까이 붙은 영애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녀님. 소공작님과 공녀님께서 사적인 친분이 있으신 줄은 몰랐어요. 항상 혼자 오시던 소공작님께서 파트너를 데리고 오실 줄이야. 놀랐지 뭐예요.”
잠시 혼자 생각을 정리하고 싶은데 쉼 없이 말을 걸어오는 영애에 그조차 쉽지 않았다.
“근데 왜 함께 출발하지 않으시고 연회장 밖에서 소공작님을 기다리고 계셨던 거죠?”
나는 트레이를 들고 지나다니는 사용인에게서 잔을 하나 받아 들었다.
차가운 유리잔을 가만히 들고 있다 고개를 끄덕이었다.
“두 분은 무슨 사이신 거예요?”
“아….”
이제 보니 영애가 내게 다가온 이유가 이것이었던 듯했다.
나와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무슨 사이인지 알아내려고.
아마 이 영애도 무도회에 참석한 다른 영애들처럼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좋아하는 것이겠지.
“그저 파트너로 함께 왔을 뿐이에요.”
나는 단숨에 잔을 비우며 말했다.
탁.
초조함과 조급함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밀려드는 생각에 잠식되지 않으려면 뭐라도 해야 할 듯해 나는 서둘러 새 잔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원하는 답을 내어 주었으니 이제 그만 갔으면 좋으련만.
“파트너 신청은 소공작님께서 하셨다고. 그럼 설마 소공작님께서 공녀를 좋아하시는 건가요?”
영애는 생각보다 대범했고 안타깝게도 호기심이 많았다.
“아뇨. 그게 아니라 소공작님께서 저를 도와….”
그 순간이었다.
“패트리샤.”
곡이 끝났는지 어느새 곁으로 다가온 로렌스가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내려다보았다.
그는 잠시 내 손에 들린 잔을 내려다보더니 이내 손을 뻗어 뺏어 갔다.
단숨에 잔을 비운 로렌스는 빈 잔을 트레이에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무슨 재밌는 얘기 중이었나 봐.”
나는 눈앞에서 빼앗겨 버린 잔을 허망하게 바라보다 다시금 새 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아뇨. 별 얘기 아니었어요.”
그러나 잔에 미처 손이 닿기 전에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내 손을 잡아 내렸다.
그러고는 상체를 숙여 나만 들릴 정도로 조용히 속삭였다.
“알고 그러는 건가?”
“네?”
“알코올이 들어 있는 음료야. 성인식도 치르지 않은 공녀가 먹기엔 적절치 않다고.”
“아….”
로렌스는 한심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젓더니 직접 음료를 건넸다.
“아….”
알코올과 무알코올 음료는 잔 모양이 다르구나.
창피당할 뻔한 상황을 면하고 멋쩍게 잔을 내려보고 있을 때, 영애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녀, 다른 영식과도 춤을 추고 싶으시다면 제 파트너와 한 곡 추시겠어요?”
“네?”
“제게 소공작님 말고 다른 분과도 추고 싶다고 하셨잖아요.”
영애는 나를 바라보며 말하고 있었지만, 어쩐지 내가 아니라 로렌스에게 하는 말인 듯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