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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아뇨. 오늘은 컨디션이 그렇게 좋지 않아서요.”
나는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지금 이 복잡한 머릿속을 정리하지 못한 채 춤을 춘다면 상대의 발이 남아나지 않을 것 같았다.
아주 찰나의 순간이었지만 나를 바라보는 영애의 눈살이 매서워졌다.
“아….”
그제야 혼자 남을 방법을 알 수 있을 듯했다.
“소공작님. 몇 곡 더 춰야 하는데 죄송해요.”
은근히 여지를 흘리자 영애가 덥석 기회를 잡았다.
“그럼 공녀 대신 제가….”
“아뇨. 배려는 감사하지만 춤을 좋아하는 편이 아니라.”
그러나 영애와 내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로렌스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답답한 마음에 다시 한번 단숨에 잔을 비워 냈다.
나는 실망감이 가득 섞인 영애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죄송하지만, 전 컨디션이 안 좋아서 조용한 곳으로 가….”
“아, 조용한 곳으로 가시겠어요? 제가 안내할게요.”
그러나 이 영애는 아무래도 나를 보내 줄 생각이 없는 듯했다.
이렇게 된 이상 예의는 아니지만 아무래도 직접적으로 자리를 파하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아뇨. 저 혼자….”
“영애. 걱정은 감사하지만 제 파트너는 제가 챙기겠습니다.”
그러나 말을 다 끝맺기도 전에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흔한 날은 아니니 영애께서는 무도회를 즐기시는 게 좋겠습니다.”
이게 아닌데?
나는 혼자 생각할 시간이 필요한 거였는데.
“아….”
“패트리샤.”
내가 뭐라 입을 열려던 그때.
익숙하고도 짜증 나는 그 목소리가 이 불편하고 복잡한 사이에 끼어들었다.
등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고개를 돌리니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다가와 있었다.
그가 내게 먼저 다가올 리가 없었는데.
이윽고 내 눈에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들어왔다.
“안녕하세요. 공녀님.”
“….”
“저는 로드리게즈 가의 아르세르라고 합니다.”
이 여자를 피해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 했던 거였는데.
결국 마주하고 싶지 않은 사람들과 한데 있게 되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인사를 받았으면 너도 답을 해야지.”
멍하니 서 있는 내게 모르간이 작게 혀를 찼다.
“아,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입니다.”
“너무 아름다우세요. 정말 사교계의 꽃이라는 말이 너무 잘 어울리세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커다란 눈을 더욱 동그랗게 뜨며 손을 모았다.
멀리서 봤을 때도 예쁜 건 알았지만 가까이서 보니 더욱 아름다웠다.
길고 풍성한 속눈썹과 도톰한 애교살. 웃을 때면 봉긋하게 솟아나는 앞 광대까지.
아이같이 순수해 보이는 여자였다.
“아….”
이 갑작스러운 전개에 작게 탄식을 흘릴 때 아르세르가 내 주변을 살폈다.
그러다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뒤늦게 발견한 듯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게르하르트 소공작님.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입니다. 미처 알아뵙지 못해 무례를 저질렀습니다.”
“아뇨. 괜찮습니다.”
로렌스가 아무래도 상관없다는 듯 고개를 저어 냈다.
이게 두 사람의 첫 만남인가?
이렇게 아무런 임팩트 없는 만남이라고?
소설 속 주인공들의 만남인데?
나는 로렌스의 조그마한 변화라도 알아채 보려 그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그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소설 속에서도 첫눈에 반한다거나 그러지는 않았지만.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로렌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고는 더 이상 할 말이 없다는 듯 고개를 돌려 버렸다.
순간 정적이 맴돌았다.
의외로 그 정적을 깬 건 모르간이었다.
“로드리게즈 영애께서 네게 인사하고 싶다고 하셔서.”
“인사?”
그의 입에서 나온 의외의 말에 되묻자 모르간이 고개를 끄덕였다.
“수도에 올라오면서 공녀님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에 무척 설렜어요.”
숨겨 두었던 제 마음을 털어놓는 아이처럼 아르세르가 수줍게 말을 이었다.
“저를요?”
로드리게즈 영애가 수줍은 듯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이었다.
“꼭 한번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헤라르일라 공자.”
그때 로렌스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공녀가 몸이 안 좋아서 그만 쉬러 가려는 중이었습니다. 인사는 이쯤 하는 게 좋을 것 같군요.”
“아….”
모르간이 작게 탄식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아, 죄송해요. 전 그것도 모르고….”
“아, 아뇨.”
“저, 제가 부축해 드릴까요?”
“…괜찮아요.”
걱정된다는 듯 동그랗게 눈을 뜬 아르세르에 애써 웃어 보이며 거절했다.
“부담 가지실 필요 없으세요. 제가 부축해 드릴게요.”
그때 로드리게즈 영애가 내게 팔짱을 끼었다.
가깝게 붙어 오는 영애에 순간 당황하여 눈을 깜빡일 때,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입을 열었다.
“로드리게즈 영애. 공녀가 분명 거절하지 않았나?”
짜증이 섞인 로렌스의 지적에 아르세르가 조심스레 제 팔을 거뒀다.
“저, 전 단지 도와드리고 싶은 마음에….”
“후우, 그만하지.”
로렌스가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내게 손을 내밀었다.
“가자.”
“아, 네.”
나는 꽤나 매서운 로렌스의 태도에 그의 손을 잡으며 아르세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녀는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시선을 내리깔았다.
그를 따라 걸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두 사람의 첫 만남이 엉망이 된 것 같아 마음이 어지러웠고.
로렌스에게 괜한 말을 듣게 된 아르세르에게 미안해졌다.
내가 둘 사이에 끼면 안 되는데.
“…아니. 왜.”
“뭐?”
“왜 그렇게 사납게…. 영애가 놀라신 것 같아요.”
그제야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내 시선을 따라 멀리 떨어진 아르세르를 흘긋 바라보았다.
그가 눈살을 찌푸리며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내게 무례했다고 말하고 싶은 건가?”
“…아니, 그게 아니라.”
“너도나도 처음 보는 영애였어. 선을 모르고 다가오는 이에게 최대한 예를 지키며 주의를 줬다고 생각했는데?”
로렌스는 기분이 좋지 않은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하아….”
내가 작게 한숨을 내쉬니 로렌스가 이내 입을 열었다.
“우선 가자. 몸은 어디가 안 좋은 거지?”
순간 그의 커다란 손이 느리게 눈앞으로 다가와서는.
툭.
서늘한 로렌스의 손등이 이마에 닿았다.
“열이 있는 건 아닌 듯한데.”
“소공작님, 걱정은 감사하지만, 대기실은 저 혼자 가도 돼요. 그러니 그만 들어가 보세요.”
“혼자 있어야 하는 이유라도 있는 건가?”
“네?”
“그게 아니라면 같이 있고 싶은데? 공녀가 나 때문에 아픈 건 아닐지 걱정돼서 말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자 그가 다시금 나를 끌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찬 바람을 많이 쐤잖아.”
로렌스의 말끝이 살짝 내려갔다.
그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지만 내게 미안해하고 있는 것만은 확실히 느껴졌다.
“…….”
어쩐지 소설이 꼬이기 시작했다.
언제부터였을까.
이런 식으로 두 사람이 만나도 되는 건가?
소설이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흘러가고 있었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그녀는 왜 소설과 달리 벌써 수도에 올라온 것일까?
소설의 원 내용과 달라진 게 있다면 그건 분명 나였으니,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온 시기가 바뀐 이유도 나 때문일 테지.
내 무슨 행동이 그녀에게 영향을 미친 걸까.
흘긋.
로렌스의 커다랗고 하얀 손이 잡고 있어야 할 건 내가 아니었다.
“…….”
남들이 보기에는 별것 아닌 상황이었다.
무도회의 젊은 영애와 영식들이 그저 인사를 나누던 것뿐이었으니.
그러나 나만은 달랐다.
그렇게 시작해서는 안 될 만남이었고, 그렇게 흘러가서도 안 될 사이였다.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에게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더욱.
패트리샤에게 곤욕을 당한 아르세르와 그런 여자에게 동질감을 느끼는 로렌스.
하지만 어쩌면 내가 패트리샤가 된 순간부터.
내가 바뀐 순간부터 둘의 만남은 소설과 같을 수 없었다.
“…….”
나도 알고 있었는데.
막상 그 때문에 두 사람이 이어지지 않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필요했다.
“저, 소공작님.”
그가 그녀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고 싶었다.
“…소공작님.”
“듣고 있으니 말해.”
“조금 전에 로드리게즈 영애 말이에요. 정말 예쁘지 않아요?”
로렌스가 나를 흘긋 바라보더니 걸음을 멈췄다.
그의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올지 한참을 기다리고 있을 때 그가 우리 앞의 문을 열었다.
“들어가.”
로렌스가 작게 턱짓했다.
“아니, 마치 무슨 요정처럼 순수한 눈망울과 새하얀 얼굴.”
“굳이 이 복도에서 서 있을 건가?”
내가 들어가지 않고 말을 잇자 문을 잡고 있던 로렌스가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에 서둘러 걸음을 옮기자 로렌스가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소파에 앉아.”
그는 소파를 턱짓하더니 방안을 배회하기 시작했다.
“한눈에 봐도 여리여리하고 귀여운 미녀였잖아요. 안 그래요?”
로렌스는 내 질문이 들리지 않는 듯 수납장을 뒤적이었다.
“아, 맞아! 마치 사슴 같지 않았어요? 동이 트는 새벽녘 깨끗한 시냇물에 목을 축이러 온 사슴 같지 않았어요?”
순간 수납장을 뒤적이던 로렌스가 한껏 미간을 찌푸린 채 나를 바라봤다.
나는 나를 바라보는 로렌스의 그 얼굴에 순간 할 말을 잃었다.
그 표정은 분명 내가 모르간 헤라르일라를 바라볼 때의 그 얼굴이었다.
한심하다 못해 짜증이 날 때의 그 얼굴.
“…아니. 아니! 그래서 안 예쁘냐고요!”
모르간과 같은 취급을 받다니.
순간 치미는 창피를 참지 못하고 소리를 질렀다.
“대체 무슨 의도로 묻는 건지 모르겠군.”
“…그냥. 예쁜 것을 보고 놀란 이 마음을 함께 나누고 싶은 거죠.”
로렌스의 얼굴이 더욱 심히 구겨졌다.
“그냥 소공작님과 조금이라도 더 대화하려 물은 거예요. 침묵보다는 이편이 낫잖아요. 그래서 안 예뻤냐고요.”
그냥 예뻤다.
이 한마디만 해 주면 내 걱정과 근심이 눈 녹듯 사라질 것을.
그 한마디가 뭐 그리 어렵다고 이렇게 뜸을 들인단 말인가.
한참 동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던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하아, 별생각 없었어.”
“네?”
“별생각 없었다고. 그보다 내 생각이 중요한가? 공녀가 그렇게 생각했다면 그런 거겠지.”
순간 마음 깊은 곳에서 열불이 치솟았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