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48화 (48/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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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별생각이 없으셨다고요?”

“그래.”

아니. 이렇게 무신경한 남자가 있나?

아름답다. 그게 어떠한 생각을 통해 얻어내야 하는 거였나?

그 정도로 생겨줬으면 그냥 딱 보고 느껴야 할 것 아닌가.

얘가 진짜 어쩌려고 이래?

답답함에 가슴이라도 치고 싶은 심정이었다.

“보니까 다른 영식들도 죄다 그 영애만 보고 있던걸요? 영애들도 한껏 긴장하고 말이에요.”

로렌스는 여전히 ‘그래서 어쩌라고?’ 하는 얼굴로 나를 바라보았다.

“…긴장돼서 그러나?”

로렌스가 한참 고민하다 입을 열었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아르세르 때문에 긴장해 이러냐는 것이었다.

“하아, 됐어요.”

제 귀인을 알아보는 눈이 이렇게 없어서야.

여주인공과 로렌스의 앞날이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눈앞이 갑갑했다.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도무지 이해를 못 하겠군.”

“아이고. 어련하시겠어요?”

“뭐?”

작게 중얼거린 건 또 잘 들리는지 로렌스가 미간을 찌푸렸다.

여간 성가신 사람이 아니었다.

“그러니까. 제가 말을 잘못했다고요. 이해 못 하시는 게 당연하다는 말이었어요.”

저벅저벅.

작게 한숨을 내쉬며 다가온 로렌스가 툭 내 무릎 위로 들고 있던 새하얀 것을 떨어뜨렸다.

“덮어.”

“이미 따듯한걸요?”

방을 뒤지던 게 이것 때문이었던 듯했다.

하지만 고마운 마음과는 별개로 이미 벽난로가 훗훗한 온기를 내뿜는 방에서 그가 건넨 담요는 그리 필요하지 않았다.

그러나 로렌스는 작게 한숨을 내쉬더니 허리를 굽혀 내 다리에 직접 담요를 덮어 주었다.

담요가 반쯤 땅에 끌려 당기려던 그때,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신을 벗고 쉬어.”

“네?”

“아까부터 불편해했잖아.”

“아….”

그가 정확히 언제를 말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높은 굽과 볼이 좁은 구두가 불편한 건 사실이었다.

그래서 담요를 찾아준 거구나.

“감사해요.”

콕콕.

로렌스가 세심히 배려해 줄수록 마음이 편치 않았다.

“…….”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그녀가 로렌스에게 어떤 의미인지 알았기에 더욱.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행복한 유년 시절을 보내지 못했다.

어머니는 일찍이 돌아가셨고 아버지란 이는 그를 아들로 생각하기보다도 가문의 힘을, 그러니까 제힘을 더해 줄 실험체로 생각했으니까.

블랙 드래곤의 선물.

몇 대만에 걸쳐 다시 발현한 블랙 드래곤의 힘.

당연하게도 로렌스는 태어나자마자 모든 이들의 주목을 받았다.

남들보다 강하고 많은 힘을 가진 로렌스였지만 그가 과연 힘을 원했을지는 의문이었다.

내가 알기로 그는 꽤 오랜 시간을 제 능력을 저주하며 살았다.

그 때문에 아버지에게 사랑받을 수 없다고 생각했으니까.

현 게르하르트 공작.

그는 제가 갖지 못한 힘을 부러워하고 열망하다 기어코 저보다 더 뛰어난 아들을 시기했다.

그리고 결국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이용해 그 힘을 갖기로 결심했다.

그날부터 로렌스는 가문을 위한 일이라는 명분으로 여러 실험을 당했다.

힘이 어디까지 발현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더 발현할 수 있을지.

어떻게 하면 다른 이들도 그 힘을 가질 수 있을지에 관한 실험을.

결국 그 모든 실험은 로렌스에게 상처가 됐다.

상처받은 남자주인공.

결국 그를 위로해 주고 치료해 줄 이는 여자주인공인 아르세르였다.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의 품에서 안정을 느끼고 치유를 받았다.

뿐만 아니라 여러 실험 때문에 생긴 로렌스의 부작용 또한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와 함께일 때는 잠잠해졌다.

그러니 이번에도 그래야만 했다.

그게 소설이 정해 준 운명이었고,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위한 일이었으니.

“…….”

처음에는 무엇보다 내가 사는 게 중요했다.

아니, 내게 있어 중요한 것은 오직 그뿐이었다.

로렌스와 아르세르가 어찌 되든 내 상관 아니라 생각했다.

그 둘이 이어지지 않으면 그저 그 정도밖에 안 되는 연이니 그대로 끝나는 것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일이라 했는데.

아무래도 이젠 그렇게는 생각하지 못할 듯했다.

…나는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행복했으면 했다.

물론 나도 살아야 하고.

시선을 느꼈는지 눈을 감고 있던 로렌스가 천천히 눈을 떴다.

“왜? 필요한 거 있어?”

“…아뇨.”

“아픈 건 아니지?”

로렌스가 상체를 깊이 숙여 날 살폈다.

온기라고는 전혀 찾을 수 없을 것 같던 차가운 붉은 눈이었는데.

“전 괜찮아요.”

걱정을 담고 있는 그 눈이 지나치게 따듯했다.

* * *

사그락, 사그락.

가만히 있지 못하고 꼼지락거리자 두껍고 빳빳한 이불 소리가 어두운 방 안을 채우기 시작했다.

“하아.”

결국 나는 무도회에 더 있지 못하고 로렌스와 함께 마차를 타고 돌아왔다.

“하아….”

마음 같아서는 그만 수도를 떠나고 싶었다.

지낼 저택도 곧 구해질 테고 나름 로렌스와도 카를로스와도 악연을 푼 듯했으니.

죽음과 관련해서는 이제 더는 걱정할 일도 없었다.

그러니 그만 떠나면 끝일 듯했는데, 마음이 불편했다.

“짜증 나게.”

왜 친절해 가지고 사람을 심란하게 만든단 말인가.

이대로 떠난다면.

로렌스와 아르세르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그 누구에게도 제 속을 털어놓지 못할 것이다.

결국 평생을 외롭고 불행하게 살게 되는 게 아닐까?

부작용도 고치지 못할 테고.

“신경 쓰이잖아.”

아니, 그렇다고 내가 뭘 어찌한단 말인가.

나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와 연도 없는데.

아니, 연이야 원한다면 만들면 되는 거긴 하지만.

“내가 도울 일 있으면 말해. 너 하나 정도는 도와줄 수 있으니까.”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나를 향해 내비쳤던 걱정 중 단 한나도 빈말은 없었다.

“곁에 두고 지켜보려 했어. 네 말대로 정말 괜찮은 건지.”

그는 어림짐작했던 내 예상보다도 훨씬 날 걱정하고 있었다.

“아휴, 몰라!”

퍽퍽!

답답한 마음에 베개를 내리쳤다.

“몰라, 몰라! 뭐, 설마 죽기야 하겠어? 나 이미 로렌스랑 친구고 카를로스랑도 친구야. 근데 설마 내가 죽겠어?”

그들과 자꾸 엮이는 게 마음이 편치는 않았지만 결국 이렇게 될 일이었던 듯싶었다.

아무리 첫 만남이 흐지부지 흘러갔다고 해도 둘은 소설이 점지한 짝이었다.

그러니 조금만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분명 뜨거운 사랑이 시작되겠지.

그럼 모두가 해피엔딩이었다.

까짓것 사랑의 큐피드가 되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듯했다.

“하아, 근데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랑 어떻게 친해지냐.”

밤은 깊어만 가는데 계속해서 떠오르는 고민에 나는 그렇게 한참을 뒤척거렸다.

* * *

그러나 고민 많았던 밤이 무색하리 만치 일은 내 예상보다도 훨씬 쉽게 진행됐다.

“로드리게즈 영애?”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그녀가 왜 여기에.

“헤라르일라 공녀님, 안녕하세요. 절 기억해 주시다니 정말 영광입니다.”

아니, 그녀를 왜 우리 집 현관 앞에서 만난 거지?

“여긴 어쩐 일로….”

“로드리게즈 영애. 오, 오랜만입니다. 오시는 길은 무탈하셨습니까?”

어떤 말도 듣지 못했지만, 계단에서 허둥지둥 내려오는 모르간을 보니 대충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지 알듯도 했다.

“푸흡. 오랜만이라기에는 몇 시간 전에 헤어졌는걸요?”

“그, 그렇기는 하죠.”

살풋 웃는 아르세르에 모르간이 붉게 얼굴을 물들이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하?”

마치 설레하는 듯. 모르간의 행동에 순간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모르간이 저런 얼굴을 할 줄 알다니.

정말 최악이었다.

“크흠, 그럼 응접실로 안내하겠습니다.”

“…아, 네.”

그때 아르세르의 시선이 꽤나 오래 내게 머물렀다.

마치 나와 떨어지기가 아쉬운 듯.

모르간도 아르세르의 그 시선의 의미를 알아챘는지 서둘러 입을 열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너 할 일도 없잖아?”

“뭐?”

“…너도 와서 차나 한잔 마셔라.”

하대하는 말투와 명령. 그와 상반되는 절실해 보이는 표정까지.

어떻게 저렇게 속이 눈에 훤히 보이는지.

모르간은 아르세르 앞에서 센 척이라도 하고 싶은 듯했다.

그러니 말투가 또 거만해지지 않았는가.

그렇게 거만하게 명령했지만 표정은 또 내가 거절할까 두려운 듯보였다.

원래라면 절대 그의 말을 들을 리가 없었지만, 오늘은 달랐다.

“그래.”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자 모르간이 놀란 듯 미간을 찌푸렸고 아르세르는 활짝 웃어 보였다.

모르간은 그런 아르세르를 바라보다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보다 너 어제는 굉장히 무례했지.”

“…뭐?”

“영애께서 호의를 베푸는데 그렇게 매몰차게 거절할 이유가 있었나?”

내가 생각보다 순순히 나오자 모르간은 아르세르에게 날 이겨 먹는 모습까지 보여 주고 싶은 듯했다.

“영애께서 네 배려없는 그 행동에 얼마나 상처를 받으셨는지 알아?”

아마 아르세르에게 잘 보이고 싶은 거겠지.

어림도 없지.

“그랬구나. 영애, 그때는 제가 너무 아파서 미처 거기까지 생각을 못 했네요.”

“아, 아뇨. 아프시면 그러실 수도 있죠.”

아르세르가 놀란 듯 작게 손을 저었다.

“그보다 오라버니. 방금 그 말은 내가 아니라 소공작님께 하는 말인 듯한데, 내가 전해 드릴게.”

“뭐?”

“걱정 마, 내가 토씨 하나 빠트리지 않고 잘 전해 드릴 테니.”

모르간의 얼굴이 차차 창백해졌다.

“소, 소공작님께 전할 것까지야.”

모르간이 아르세르를 흘긋 바라보며 고개를 저었다.

“그, 그럴 것까지는 없어.”

“왜? 딱 들어 보니 내가 아니라 소공작님께 하는 말이던데.”

“아, 아니! 그럴 필요 없다니까!”

모르간은 제가 말을 더듬고 있다는 사실을 아는지 모르는지 겁먹지 않은 척 목소리만 높일 뿐이었다.

‘왜 무서워서 소공작님께는 못 말하겠어?’

그의 비열한 속내를 집어 내어 더 몰아붙일까 하다가 오늘은 이쯤 하기로 했다.

아무래도 아르세르 영애와 친해지려면 아직은 모르간이 필요할 듯했기에.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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