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9
달칵.
찻잔을 든 내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래서 여기는 왜….”
“아, 헤라르일라 공자님께서 초대해 주셨거든요.”
그건 이미 예상한 바였다.
내가 정말 궁금한 건 그녀가 왜 그 초대에 응했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설마.
설마 모르간 헤라르일라에게 관심이 있는 건 아닐 테지만 말이다.
“제가 수도의 사교계는 처음이라 아는 사람이 없거든요. 헤라르일라 공자님께서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몰라요.”
그러나 곧이어 이어지는 아르세르의 말에 대충 지금이 무슨 상황인지 알 듯했다.
“패트리샤. 아르세르 영애는 수도 생활이 처음이라시니 네가 잘 챙겨 드려.”
챙겨 드리기는.
패트리샤가 아무리 사교계의 꽃이라 불린다 하지만 마음대로 약속에 나가지도 못하던 그녀였다.
결국 영애들과 얼굴만 알 뿐이었다.
아니, 그저 얕은 안부 인사만 묻는 정도?
“영애, 이제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패트리샤가 챙겨 드릴 테니 말이죠.”
“정말요?”
모르간의 말에 아르세르가 내 눈치를 살폈다.
뭐라도 된 듯 명하는 모르간이 짜증 나긴 했지만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시구나. 꽤나 막막하셨겠어요.”
“네. 아직도 너무 어려워요.”
“아르세르 영애, 이제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도와드릴게요.”
“…정말 그래 주실 수 있으세요?”
조금 울컥한 듯 보이는 아르세르였다.
새로운 곳.
새로운 사람들.
그 사이에서 적응해야 하는 게 얼마나 힘든지 나도 잘 알았기에 그녀의 마음고생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럼요.”
“감사해요. 저 수도의 영애들은 제가 마음에 안 드시는 줄 알고 침울했거든요.”
아르세르는 민망한 듯 작게 웃어 보였다.
하긴, 수도의 영애들이 그녀를 마음에 들어 하는 눈치는 아니었던 듯했다.
먼저 말을 거는 이도 없었을뿐더러 어제 내게 그녀를 험담하던 영애도 있었으니.
“그럼 지금은 어디서 지내시는 거예요?”
“친척분 집에서 지내고 있어요.”
“갈 때 시녀에게 주소를 남겨주시면 종종 연락드릴게요. 같이 놀러 가도 좋고요.”
아르세르가 눈꼬리를 내려뜨렸다.
“정말 감사해요. 공녀님은 얼굴만큼이나 마음씨도 아름다우세요.”
“하하, 별것 아닌데요.”
심하게 고마워하는 아르세르에 어색해져 머리를 매만졌다.
어째 이곳 사람들은 별것 아닌 일에도 심하게 고마워하고는 했다.
다른 의도를 품은 사람 미안하게.
아, 아니지.
어쨌든 로렌스와 잘 되는 건 아르세르에게도 좋은 일이었다.
로드리게즈 영애와는 이만하면 앞으로 자주 볼 수 있을 듯했고 지금이라면 그녀에게 처음부터 궁금했던 질문을 해도 괜찮을 듯했다.
“그보다 영애는 왜 수도로 올라오신 거죠?”
“저희 영지는 사람이 많지 않아서요. 잠잠하고 심심했거든요. 또 수도의 사교계가 궁금했기도 했고요.”
사람이 많지 않아서?
그러나 사람이 많지 않다고 모든 이들이 수도의 사교계로 올라오는 것은 아니었다.
이곳의 영애들이 사교계 활동에 목을 매는 가장 큰 이유는.
좋은 남편감 찾기. 혹은 나중에 도움을 받을 만한 연줄 만들기.
그러니 지방에서 수도로 올라오는 영애들의 목적도 이 이유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수도로 나와 제가 택할 수 있는 신랑의 폭을 넓히려는 야망을 품은 것이겠지.
수도의 사교계가 궁금했다, 라.
아무래도 어쩌면 속물 같아 보일지도 모르는 목적인지라 에둘러 말한 듯했다.
흐음, 그래도 아르세르가 소설의 주인공인데.
진짜 궁금해서 올라왔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지만 수도에 올라오는 것 자체가 돈이었다.
2년 후면 파산할 아르세르의 가문이 현재라고 그리 부유하지는 않을 테지.
단지 궁금증 때문에 올라왔다기에는 감수해야 할 것이 너무도 많았다.
확신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궁금증보다는 남편감 혹은 연줄을 만드려는 의도인 듯했다.
“…….”
하지만 내가 질문을 통해 정말 알고 싶은 건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온 시점이 지금인 이유였다.
2년 후가 아닌 지금인 이유 말이다.
“오직 그뿐인가요?”
아니.
만약 이번에 수도로 올라 온 이유가 좋은 남편을 찾기 위해서라면 그럼 왜 소설에서는 이 시기에 사교계로 올라오지 않은 거지?
생각할수록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이번에 올라온 게 정말 다른 목적이 있는 게 아니라, 그저 재미를 위해서라고?
도통 알수 없는 아르세르의 마음에 머리가 터질 듯 복잡했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그렇게 즉흥적인 사람이었나?
소설에서 그녀가 움직인 이유는 가문의 파산을 막기 위하여. 그것이었다.
아직은 아르세르의 가문이 파산 직전은 아닐 텐데.
“네?”
소설 속에서 아르세르는 제 가문을 일으키기 위해 직접 투자자를 찾아다녔다.
그 점으로 보아서는 현실감 있고 능동적인 사람인 것 같았는데.
“하필 지금 올라온 이유가 궁금해서요.”
분명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현시점에서 수도로 올라온 데는 내 영향이 있을 터였다.
소설과 달라진 건 나 하나뿐이었으니, 소설이 바뀌었다면 그건 나 때문일 테지.
“….”
내 무엇이 그녀를 수도로 올라오게 한 것일까.
“하필 지금이라니.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제가 시기를 잘 못 잡은 건가요?”
“패트리샤, 무슨 질문이 그렇지? 언제 올라오든 그건 로드리게즈 영애의 선택이지.”
지금껏 대화에 끼어들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던 모르간이 나를 나무라며 입을 열었다.
“영애, 신경 쓰지 마십시오. 대답하실 필요도 없습니다.”
아르세르가 난처한 듯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이런 식으로 물어선 아르세르의 속마음을 알 수 없을 듯했다.
“아니, 전 혹시 저 때문인가 해서요.”
“네? 그, 그게 무슨 뜻인지….”
순간 아르세르의 시선이 잘게 흔들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아르세르의 속마음을 전혀 알 수 없었다.
그저 내 질문의 내용이 당황스러웠던 것일 수도 있으니.
“하? 뭐 그런 멍청한 질문이 있지?”
그러나 아르세르가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모르간이 이내 말을 가로챘다.
마치 제가 그녀의 오라비라도 되는 양.
“로드리게즈 영애께 무례하게 굴지 마.”
저 멍청한 것은 제가 모르간 로드리게즈라도 되는 줄 아는 모양이었다.
“후우.”
아르세르가 조금이라도 불편해하는 기색을 드러낼 때마다 그녀의 편을 들어 심기를 거슬렀다.
그 때문에 결국 아무것도 알아내지 못하고 있지 않은가.
째릿.
“크흠.”
가볍게 그를 노려보자 그제야 모르간이 나를 향해 드러내던 적대감을 조금 감추었다.
“아니, 영애가 그리 말했었잖아요. 절 보고 싶었다고요.”
“아….”
아르세르가 그제야 미소를 지었다.
“아름다운 공녀님을 한 번쯤 만나 뵙고 싶었거든요.”
“…그랬군요.”
결국 이번에도 그 무엇도 알아낼 수 없었다.
하여튼 도움이 안 돼.
다시 한번 모르간을 노려봐 주었지만 그럼에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오라버니, 아버지한테 가 봐야 하는 거 아니야?”
“뭐? 아버지?”
“2시쯤 만나자고 하셨잖아.”
“아버지가?”
모르간이 처음 듣는다는 듯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내가 방금 지어낸 사실이니 처음 듣는 게 당연했지만, 그를 이곳에서 쫓아내기로 한 나는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었다.
모르간이 시계를 흘긋 바라보았다.
“지금쯤 가야 하는 거 아니야? 안 가 봐도 되겠어?”
모르간이 고개를 갸웃하면서도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로드리게즈 영애. 죄송하지만 전 이만 일어나 봐야 할 듯하군요.”
“아뇨. 하는 수 없죠.”
모르간은 이 자리를 나가야 한다는 것이 아쉬운 듯 보였다.
그러나 아버지의 부름을 모른 체할 수도 없는 처지였기에 그는 응접실을 나갈 수 밖에 없었다.
“영애, 자리를 제 방으로 옮기시겠어요?”
“공녀님 방으로요?”
“네.”
“네! 너무 좋아요.”
아르세르가 해맑게 웃었다.
들뜬 목소리와 곱게 접힌 눈이 참 해맑아 보였다.
하긴.
어쩌면 그녀가 무슨 연유에서 올라왔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을지도.
그녀가 악녀도 아니었고.
내가 그녀를 경계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었다.
이렇게 해맑은 사람을 경계할 이유가 없었다.
“그럼 갈까요?”
나는 모르간이 다시는 우리 둘 사이에 끼지 못하도록 자리를 옮겼다.
* * *
“그럼 공녀님은 뭐 하시면서 쉬시나요?”
“저는 보통 책을 읽어요.”
아르세르는 능숙하게 대화를 이끌어 냈다.
악의가 전혀 담기지 않은 그 순수한 눈이 조금 들떠 있었다.
새로운 친구를 사귈 때의 그 설렘이었다.
그 눈을 보니 나도 조금 마음이 간질거렸다.
“영애는요?”
“저는 쿠키를 구워요.”
“쿠키요?”
“아, 조금 이상한가요?”
왜 때문인지 아르세르의 얼굴이 붉어졌다.
“아니요? 뭐가 이상하다는 거죠?”
“아무래도 수도에서는 선호하지 않는 활동인 듯해서요. 유화라든가, 피아노라든가, 독서 같은 고상한 활동은 아니잖아요.”
“으음, 그런가요?”
그다지 생각해 보지 않았던 사항이었다.
가볍게 고개를 갸웃하자 아르세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공녀님은 아무 상관 없으세요?”
“그다지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요.”
“저는 고민이에요.”
아르세르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다른 영애들의 대화에 끼고 싶은데 공통된 주제가 없을까 봐요. 아, 물론 제게 말을 걸어 주시지도 않지만요.”
어쩐지 조금 풀이 죽은 목소리였다.
본 지 얼마 되지 않은 내게 참 솔직한 여자였다.
참 순수하고 솔직한 아이같은 여자.
소설 속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왜 아르세르에게 마음의 문을 열었는지 알 것도 같았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