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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0화 (5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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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혹시 공녀님, 공녀님만 괜찮으시다면….”

아르세르가 말을 끝맺지 못하고 몇 번이나 입술을 움찔거렸다.

뭔가 한참을 고민하다 그녀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공녀님만 괜찮으시다면 함께 전시회에 가실래요? 끝나고 차도 마시고요.”

한껏 고개를 당긴 아르세르가 날 조심스레 올려다보았다.

“창피한 말이지만 저는 한 번도 전시회에 가 본 적이 없거든요. 처음을 공녀님과 꼭 함께했으면 좋겠는데요.”

아르세르가 주절거리며 말을 늘였다.

꼼지락거리는 손을 보니 한껏 긴장한 듯 보였다.

“안 될까요?”

안 될 리가.

아르세르가 이리 나와 주면 나야 고마운 일이었다.

“아뇨, 그렇게 하죠.”

“우와, 정말 감사해요!”

별것 아닌 일에도 아르세르는 박수까지 쳐 가며 기뻐했다.

“공녀님, 혹시 쿠키 좋아하세요? 만약 좋아하신다면 제가 선물해 드리고 싶어서요.”

“선물이요?”

“네! 제가 직접 구워서 선물 드리고 싶은데….”

“그럼 저야 고맙죠.”

아르세르가 힘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정말 맛있게 만들어 볼게요. 혹시 딸기가 좋으세요? 아니면 블루베리가 좋으세요?”

“디저트는 딱히 가리지 않아서요.”

“그럼 두 가지 다 만들어 볼게요!”

아르세르는 그 후로도 한참 동안 내 취향을 물었다.

조잘조잘 떠드는 모습이 마치 다람쥐 같은 귀여운 여자였다.

로렌스와 아르세르.

두 사람을 엮어 주려면 서두르는 게 좋을 듯했다.

둘의 관계가 애매하게 고착되어 버리기 전에 말이다.

“영애만 괜찮으시다면 그날 한 명 더 초대해도 될까요?”

“…아, 네.”

그러나 어쩐지 아르세르는 내키지 않는 듯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 불편하실까요?”

“아뇨! 그게 아니라 공녀님과 단둘이 시간을 보내고 싶었거든요. 하지만 그건 너무 제 욕심이겠죠?”

아르세르가 다시금 활짝 웃어 보였다.

“그보다 누구를 초대하실 건가요?”

“아직 초대에 응하실지는 확실치 않지만, 게르하르트 소공작님을 초대하면 어떨까 해서요?”

“…소공작님이요?”

“네. 소공작님과 친해져 놓으면 사교계에 적응하기도 훨씬 편해지실 거예요.”

아르세르가 순간 울컥한 듯 입술을 일그러트렸다.

“…공녀님, 정말 감사해요. 절 이렇게까지 챙겨 주시다니.”

품 안에서 손수건을 꺼내 제 눈가를 톡톡 두드리는 아르세르였다.

“아, 아니. 울 것까지야….”

“죄송해요. 전 제가 수도에 나름 잘 적응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곳에 올라와 생각보다 마음고생이 있었나 봐요.”

그녀의 희고 고왔던 얼굴이 순식간에 조금 붉어졌다.

“근데 공녀님께서 이렇게까지 챙겨 주시니 순간 마음이 놓여서. 죄송해요.”

몇 번 훌쩍이던 아르세르가 다시 한번 사과를 했다.

“근데 괜히 제가 두 분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건 아닐까요?”

“데이트요? 아, 소공작님과 제가 그런 사이는 아니니 걱정할 건 없어요.”

“네? 두 분이 연인이 아니시라고요?”

아르세르의 눈이 두 배쯤 커졌다.

참 제 기분을 숨김없이 드러내는 여자였다.

방금 울었단 사실이 믿기지 않을 만큼.

“파트너로 참석하셨길래 당연히 연인이신 줄 알았어요.”

“아, 거기에는 사정이 있어서요. 소공작님과는 친분이 조금 있을 뿐이에요.”

원작 여주 앞에서 로렌스 게르하르트와의 친분을 언급하는 게 조금 멋쩍어 말끝을 흐렸다.

두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운명이었다.

아마 조금만 기회를 만들어 준다면 분명 빠르게 서로에게 빠져들겠지.

다른 사람들이 나와 로렌스를 어떻게 생각하는지는 크게 중요하지 않았다.

어차피 그저 소문과 추측으로 사람들의 입에서 몇 번 오르락거리다 결국 끝날 관계였기에.

그러나 여자주인공이 우리의 사이를 오해한다는 건 좋은 상황은 아니었다.

“그러시군요. 아, 그럼 약속은 공녀님께서 시간이 되실 때로 잡는 게 좋겠어요.”

“네. 그럼 소공작님께 여쭤보고 이번 주 안으로 연락드릴게요.”

아르세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영애는 그렇게 화제를 바꿔 다시 한참을 조잘거렸다.

* * *

아르세르와의 길었던 대화가 끝이 나고 흔들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던 그때, 엠마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아가씨, 소공작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소공작님이? 이리 줘.”

“방금 그 영애와는 원래 친분이 있으셨나요?”

“으음. 그런 건 아니야.”

엠마는 영애들과 크게 친분이 없는 내가 아르세르와 오래도록 함께 대화를 나눈 사실이 신기한 듯 물었다.

사실 내가 한 일이라고는 고개를 끄덕이는 것밖에 없었지만.

“근데 꽤 친해진 것 같아.”

나는 로렌스로부터 온 편지를 뜯으며 말했다.

무도회에서 돌아와 헤어지기 전 로렌스는 카를로스의 훈련과 관련해 어떻게 진행할지 빠른 시일 내에 편지를 주겠다고 말했다.

실력 있는 이를 두고 보기 아까웠던 걸까?

로렌스가 왜 카를로스를 도우려는 건지 정확히는 알지 못했지만 그 이유가 어찌 됐건 카를로스에게는 좋은 일이었다.

역시나 그의 편지에는 카를로스의 훈련계획이 쓰여 있었다.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들이 어떻게 훈련을 진행하는지에 대한 간략한 설명과 카를로스도 실력 향상을 위해 가문의 기사들과 합숙 훈련을 받는 게 어떻겠냐고 적혀 있었다.

가문의 기사가 아닌 그를 게르하르트 영지에서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시켜 준다는 것 자체가 로렌스의 큰 배려였다.

그의 말대로 이렇게 진행하는 편이 카를로스의 실력 향상에 있어 가장 좋을 듯했다. 물론 카를로스에게 물어봐야겠지만.

내 생각에도 카를로스가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의 일을 그만두는 게 좋을 것 같기는 했다.

아무리 내가 뒤를 봐준다 해도 카를로스는 저만 혼자 일을 빠지는 것을 불편해했다.

게다가 일이 끝나고 검술 연습을 하러 가는 것도 그에게 체력적으로 부담이었고.

매번 저택을 들락날락하는 카를로스를 아니꼽게 생각하는 다른 이들의 시선도 있었다.

카를로스와 벌써 헤어져야 한다는 게 아쉽기는 했지만.

내 욕심 때문에 그의 앞날을 막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을 마친 나는 로렌스의 편지를 정리했다.

“흐음, 그보다 모르간 오라버니는 뭐 하고 있니?”

“모르간 공자님은 공작님의 업무 서류를 정리하고 계시는 듯했습니다.”

“아, 진짜?”

공작이 그를 부른다는 건 거짓말이었는데.

“오라버니는 아버지와 같이 있는 거였구나.”

안타깝게도 잡힌 모양이었다.

“그보다 카를로스가 오면 잠시 내 방으로 들르라고 말해 줄래?”

“오늘도 늦게 올 듯한데, 괜찮으시겠어요?”

“응. 기다리지 뭐.”

흔들의자에서 일어난 나는 로렌스에게 답장을 쓸 편지지를 꺼내 들었다.

사각사각.

로렌스가 나를 위해 애써 주었으니.

나도 그의 도움이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답장을 써 내려가는 날 바라보던 엠마가 실링 왁스를 녹여 주었다.

“소공작님이 뭐라고 하신 거예요?”

“내가 알아봐 달라고 부탁한 게 있어서.”

편지지를 잘 접어 봉투에 넣자 엠마가 인장을 넘겼다.

“다 됐다. 이거 오늘 내로 소공작님께 보내 줘.”

“네. 알겠습니다.”

아르세르와 로렌스를 이어 줄 편지지가 엠마의 손으로 넘어갔다.

* * *

똑똑.

“공녀님, 저 카를로스예요.”

“응. 들어와.”

늦은 저녁.

검술 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카를로스가 내 방에 들렀다.

“부르셨다고요. 늦게 와 죄송해요.”

“아냐. 늦는다는 걸 이미 알고 있었는걸.”

내가 내 앞의 소파를 턱짓하자 가까이 카를로스가 다가왔다.

“저 바닥에서 구르고 땀도 많이 나서요. 그냥 서 있을게요.”

“아, 씻지도 못하고 왔구나.”

아마 엠마가 바로 올라가 보라고 말한 듯했다.

“오늘 부른 건 검술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서. 네 선생님이 전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였다는 건 알고 있지?”

“네. 매번 자랑하시는걸요.”

카를로스가 지겹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네 스승님이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단장과 네 얘기를 했나 봐. 그래서 소공작님의 귀까지 들어갔고.”

“…소공작님이요?”

“응. 그래서 소공작님께서 널 가문의 기사들과 함께 훈련을 받을 수 있게 편의를 봐주신다고 하셨거든. 어때?”

카를로스는 조금 놀란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저는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도 아닌데요?”

“응. 어때?”

카를로스가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이었다.

제안을 듣자마자 카를로스의 눈이 반짝이었으니.

“그래. 실력 있는 기사들과 합숙 훈련을 하면 카를로스 네 실력도 더 빠르게 늘 거야.”

“네? 합숙 훈련이요? 어디서요?”

“게르하르트 영지에서.”

순간 카를로스가 당황한 듯 입술을 옴싹거렸다.

“그러면 여기는 어떻게 해요? 전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사용인이잖아요.”

“당연히 그만둬야지. 금전적인 문제는 내가 도와줄게. 걱정할 거 없어.”

“그, 그러면 얼마나 그곳에 있어야 하는 거예요?”

“그건 나도 잘….”

카를로스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 전 그냥 여기 있을래요.”

“응?”

“지금 선생님도 과분할 만큼 잘 가르쳐 주세요. 실력도 계속 늘고 있고요. 기사가 되는 것쯤이야 여기서도 할 수 있잖아요.”

“하지만 매일 공작저를 나갔다 돌아오는 것도 그렇고. 아침에는 공작저의 일을 해야 하는 것도 너무 힘들잖아. 그곳에 가면 하루 종일 네가 좋아하는 검을 잡을 수 있어.”

“아니요. 조금도 힘들지 않아요.”

카를로스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저는 여기가 좋아요. 공녀님 옆이요.”

카를로스는 내가 그를 게르하르트의 영지로 보낼까 겁이 났는지 서둘러 말을 이었다.

“게다가 전 게르하르트의 기사가 아니라 헤라르일라의 기사가 될 거잖아요. 그러니까 그곳에 가는 건 안 좋을 것 같아요.”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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