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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
“아무리 소공작님이 편의를 봐주신다고 해도요. 선생님이 그러는데 그곳의 훈련은 가문의 기사만 받을 수 있는 거랬어요. 혹시나 그곳에서 훈련을 받다가 그곳의 기사로….”
“카를로스. 그게 무슨 말이야?”
순간 예상치 못한 말에 인상을 찌푸렸다.
“네가 왜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기사가 돼?”
“네? 그야 공녀님이 여기 계시니깐요.”
“아니, 아니. 카를로스.”
서둘러 손을 들어 카를로스의 입을 막았다.
“대체 지금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카를로스가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기사가 되는 것.
내가 가장 우려했던 상황이었다.
“…공녀님. 왜요?”
“헤라르일라 가문의 기사는 그리 명예롭지 못해.”
“전 상관없어요.”
“하아, 그게 왜 괜찮아.”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카를로스에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제대로 된 훈련도 받지 못할 거야. 네가 되고 싶은 기사가 그런 건 아닐 거 아냐.”
“여기가 공녀님의 가문이잖아요. 전 그거면 돼요.”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단.
모든 기사들이 마음속에 품고 사는 꿈이었다.
누구보다 실력 있고 용감한 기사들만 들어갈 수 있는 곳.
소설 속 카를로스는 제가 게르하르트 가의 기사라는 사실에 대단한 자부심을 가졌다.
“제게 검술을 가르쳐 주신 것도 공녀님이고, 아무도 관심 갖지 않은 절 봐주신 것도 공녀님이잖아요. 전 공녀님을 위해 검을 잡고 싶은 거예요. 그러니 공녀님 곁에 있을 수 있다면 전 만족해요.”
“카를로스. 난 싫어.”
마음이 착잡해졌다.
“넌 분명 제국 최고의 기사가 될 거야. 그런 네가 나 때문에 우리 가문에 소속되는 건 정말 싫어.”
나도 모르는 사이 카를로스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을 줄이야.
“이런 걸 바라고 네게 검을 가르친 것도 아니야. 나는 그저 네가 검을 배우는 데에 있어서. 기사가 되는 데 있어서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고 싶었던 거야.”
은혜 갚는 카를로스를 바란 적도 있었지만, 결코 이런 식은 아니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야. 게르하르트의 합숙 훈련이 장차 네게 도움이 될 테니 물어본 거야.”
“…….”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네가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되는 건 정말 싫어.”
카를로스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우물거리다 이내 고개를 숙였다.
“그냥 합숙 훈련 가는 걸로 하자. 그게 네게 도움이 될 거야.”
“…근데 저희 선생님은 게르하르트 가문의 기사로 소속되기 전 훈련만 3년이었대요.”
꼭 움켜 쥔 카를로스의 주먹이 작게 떨렸다.
“게르하르트 영지는 수도에서도 많이 멀잖아요.”
“그런데?”
“저도 알아요. 흔치 않은 귀한 기회라는 것도 알고 그곳에서 훈련을 받으면 이곳에서 연습하는 것보다야 훨씬 실력이 늘 거라는 것도 알아요.”
“카를로스?”
이어질 말은 어렵지 않게 예상할 수 있었다.
분명 거절이겠지.
“근데 싫어요. 저 진짜 가기 싫어요.”
“…이유가 뭔데?”
“전 소공작님이 싫어요. 그날 보셨잖아요. 소공작님도 절 싫어하시잖아요. 분명 절 괴롭히실 거예요.”
처음 봤을 때보다 카를로스는 키가 많이 컸다. 그 짧은 새에 말이다.
그러나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리는 지금의 카를로스는 처음 만났던 그때보다 더 어려 보였다.
“그럴 리가. 혹시라도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네게 그런 일이 일어난다면 당장 데리러 갈게.”
“멀잖아요. 아무리 당장 오신다고 해도 너무 멀어서….”
“카를로스.”
단호하게 그의 이름을 부르자 그제야 그가 시선을 떨궜다.
추욱 처지는 카를로스의 어깨에서 시선을 떼어 낼 수 없었다.
“카를로스.”
“네.”
“합숙 훈련은 가고 싶지 않은 거지?”
“…네.”
카를로스가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나는 진짜 이유를 알고 싶어. 그곳에 가고 싶지 않은 진짜 이유 말이야.”
풀이 죽은 듯 한껏 고개를 숙인 아이가 눈만 굴려 나를 올려다보았다.
시선이 마주치니 이내 다시 떨어져 버렸지만.
“무서워요.”
“뭐가?”
“공녀님과 떨어지는 거요. 전 이곳이 좋아요. 공녀님도 좋고 엠마 님도 좋고요. 엄마가 절 버리고 가신 후 처음으로, 정말 처음으로 행복했어요.”
카를로스의 목소리에 설핏 물기가 어렸다.
“근데 또 헤어져야 하는 건 싫어요.”
“헤어지다니. 또 만나면 되잖아.”
“…모르겠어요. 거기에 가 있으면 공녀님과는 멀어질 것 같아요.”
카를로스가 작게 한숨을 흘렸다.
두 달 동안 저택의 일과 검술 훈련을 동시에 하면서 자는 시간도 쉬는 시간도 부족했을 테지만 단 한 번도 이렇게까지 힘들어하는 모습을 보인 적 없는 그였다.
매번 뭐가 그리 즐거운지 생글생글 웃던 그가 이렇게 힘들어하는 걸 보니 그가 얼마나 진심인지 알 듯했다.
“아마 그곳에서 전 적응도 못 할 거예요.”
“그래. 그럼 우선 가지 않는 걸로 하자.”
아마 힘겹게 제 속내를 털어놓은 것일 테지.
카를로스가 이렇게 힘들어하는데 밀어붙이고 싶지는 않았다.
“…정말 그래도 돼요?”
카를로스가 믿기지 않는다는 듯 되물었다.
“그래. 네가 싫어하잖아.”
“…공녀님.”
“응. 말해.”
“…저한테 실망하셨어요?”
카를로스가 조심스러운 눈으로 내 눈치를 살폈다.
“…저 그냥 합숙 훈련 갈게요.”
“아냐. 내가 무슨 실망을 해? 그러니까 억지로 말할 필요 없어.”
그의 눈에 자리한 걱정에 방긋 웃어 보였다.
“넌 이미 충분히 열심인걸. 합숙 훈련 관련해서는 네가 싫어하지 않을 만한 더 좋은 방법이 있나 내가 알아봐 볼게.”
가볍게 카를로스의 머리칼을 쓰다듬자 그가 반걸음 뒤로 물러났다.
“저 안 씻어서….”
딱히 상관은 없었지만 싫어하는 듯한 카를로스에 손을 거뒀다.
“카를로스. 그 대신 너도 하나 약속해야 해.”
“뭘요?”
“넌 절대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되면 안 돼. 그건 절대 날 위한 일이 아니야. 모르간을 위한 일이라고.”
‘죽 쒀서 개 준다.’는 바로 이런 상황을 가리키는 것이었다.
차라리 개였으면 얘기가 달라졌을지도 모르지만, 모르간은 절대 안 됐다.
“나는 모르간도 아버지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 그러니 우리 가문의 기사가 될 거라는 생각은 하지 마.”
“…네. 알겠어요.”
“응. 그럼 됐어.”
카를로스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도 늦었는데 어서 가 봐. 씻고 자려면 지금 가야겠다.”
“네. 그럼 가 볼게요.”
카를로스가 꾸벅 고개를 숙였다.
“공녀님.”
“응?”
“좋은 꿈 꾸세요.”
카를로스가 문을 닫기 전 작게 속삭이었다.
* * *
“소공작님. 여기 노후 된 성벽 보수 예산안입니다.”
“그래. 거기 둬.”
“네. 그리고 헤라르일라 공녀님으로부터 편지가 왔습니다.”
샌드위치를 먹으며 서류를 보던 로렌스가 고개를 들었다.
손을 뻗는 로렌스에 시몬이 서둘러 편지를 넘겼다.
“…헤라르일라 공녀님은 그 아이를 어떻게 하시겠다 하셨나요?”
시몬이 조심스레 패트리샤를 입에 올렸다.
언젠가 로렌스가 으름장을 놓은 까닭이었다.
그러나 며칠간 로렌스를 살펴본 바에 따르면 무도회에서 또 화해를 하신 것 같았다.
이상한 일이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에 관해서는 이상하리만치 감정을 드러내시곤 했으니.
이제 보면 공녀의 행동 하나하나에 다 반응하고 계신 듯했다.
그렇다고 소공작께서 공녀를 좋아하시는 건 아닌 듯했는데.
아닌가? 좋아하시는 건가?
어쨌건 로렌스가 패트리샤에게만 크게 반응하는 건 누가 뭐래도 사실이었다.
“합숙 훈련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이었던 것 같군.”
“근데 대체 공녀와 그 아이는 무슨 사이인 겁니까?”
“글쎄.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건 아닌 듯했는데.”
로렌스가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카를로스를 이성적으로 좋아하는 것이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서야 그녀가 그에게 관심을 보일 리가 없었으니.
카를로스에게 검술을 가르치는 이유도 신분이 낮은 그와 연을 맺을 방법을 고른 것이라 생각했다.
그가 기사가 된다면 헤라르일라 공작이 허락할지도 모르는 일이었으니.
제게 관심을 끈 이유도 새로운 상대가 생겨서라 생각했다.
하지만 그날 보니 그런 건 아닌 듯했다.
“사람으로서 좋아하는 것 같긴 했어.”
“사람으로서요?”
“친구라든가.”
로렌스의 말에 시몬이 인상을 찌푸렸다.
공녀와 공작가의 사용인이 친구라니.
우스운 말이었다.
로렌스의 입에서 나오기에는 더욱 이상한 말이었고.
“그보다 그 아이가 검술에 재능이 있을 줄이야. 공녀는 어떻게 그 아이의 재능을 알고 후원한 걸까요?”
“글쎄.”
로렌스는 그다지 궁금하지 않은 듯 시몬의 물음에 반응하지 않았다.
우연이라기엔 아이의 재능이 너무 뛰어났다.
공녀가 그저 관심을 준 아이에게 우연히 검술을 가르쳤는데, 알고 보니 그 아이가 검술에 천부적인 재능을 갖고 있었다고?
원래라면 로렌스가 가장 먼저 의심하고 의아해했을 사실이었건만.
로렌스는 별 상관없다는 듯 공녀의 편지를 읽어 갔다.
“흐음. 이번 주 금요일 날 오후 일정 좀 비워 줘.”
한참 편지지를 바라보던 로렌스가 끝내 입을 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