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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2화 (52/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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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흐음.”

덜컹, 덜컹.

마차의 벽에 머리를 기댄 탓에 마차가 흔들릴 때마다 머리가 작게 벽에 부딪혔다.

“흐음.”

요즘 카를로스 때문에 고민이 많았다.

10대.

아직 어린 나이였다.

어릴 때부터 혼자 모든 걸 해내야 했던 카를로스가 두렵다고 말했다.

그의 걱정과 두려움이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다만 로렌스가 제안했던 훈련이 카를로스에게 도움이 될 내용이었기에 과연 이대로 카를로스를 내버려 두어도 되는 것일지가 고민이었다.

사실 카를로스의 걱정을 없애면서도 훈련에 참여시킬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긴 했다.

그건 내가 게르하르트 영지에 저택을 구하는 것이었다.

로렌스도 내가 그의 영지에서 지내는 게 싫지는 않은 듯했고 카를로스와도 떨어지지 않을 수 있으니 그의 훈련 진행도 문제는 없을 듯했는데.

게르하르트의 영지로 내려간다는 것이 조금 걸렸다.

그곳으로 저택을 구한다면 꽤나 종종 로렌스와 마주칠 듯했다.

마주쳐도 상관없으려나?

“이제 다 괜찮을 듯한데.”

사실 이제 카를로스의 손에 죽을 일은 없었다.

내가 질투에 눈이 멀어 아르세르를 괴롭힐 일도 없었고, 그 때문에 로렌스의 화를 자극할 일도 없었다.

나는 패트리샤가 아니었고, 결국 정해진 소설의 내용은 변했다.

카를로스와도 로렌스와도 이젠 아르세르까지 나름 친분을 쌓았으니 말이다.

그러니 상식적으로 생각했을 때 시간이 흘러 소설의 도입부가 다가온다 해도 더 이상 큰 문제는 없을 듯했다.

그 얘기는 주인공들의 곁에서 머물러도 큰 문제는 없을 거라는 뜻이었다.

과거가 변했고 내가 죽을 리는 없다. 이게 당연한 사실이었다.

그래, 나도 이성적으로는 누구보다 잘 알았다.

그러나 아주 가끔씩, 가슴 속 어딘가 자리 잡고 있던 불안이 몸집을 키우곤 했다.

혹시 모르는 일이니 거리를 두는 게 가장 안전하다고.

그래서 그간 더욱 로렌스에게 선을 그었던 것이고.

나를 도와주고 걱정해 준 건 카를로스처럼 로렌스도 마찬가지였는데.

그와 엮이는 게 두려워 더욱 선을 그었다.

멀어져도 아무렇지 않을 줄 알았는데.

막상 그 상황이 오니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이 세계에 정말 몇 안 되는 내 걱정을 해 주는 사람이었다.

카를로스, 로렌스. 그리고 엠마.

사실 엠마를 이곳에 끼우는 게 맞나 싶기도 했지만.

셋 정도는 돼야 비참해 보이지 않을 테니.

어쨌든 고맙고 소중한 이들이었다.

솔직한 마음으로 나는 이들과 멀어지고 싶지 않았다.

그래, 이들을 떠나면 나 혼자 외로울 듯했다.

“그래. 뭐 어때?”

게르하르트 영지에서 생활한다 해도 크게 문제 될 건 없을 듯했다.

우선 카를로스에게 물어보고 로렌스에게 답을 해 주면 될 듯했다.

히이잉.

오랜 고민이 끝날 때쯤 마차가 움직임을 멈췄다.

귀족들의 후원으로 개최된 전시회장 앞이었다.

* * *

이제 몇 주 후면 겨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한낮의 햇살은 꽤나 강했다.

“공녀님!”

전시회장 앞 광장에서 로렌스와 아르세르를 기다리며 서 있을 때 누군가 반갑게 손을 들며 아는 체했다.

“공녀님, 먼저 오셨네요.”

아르세르가 반가운 듯 가까이 다가와 팔을 잡았다.

“빨리 온다고 왔는데 많이 기다리셨을까요?”

“아뇨. 저도 금방 왔어요.”

“모자를 쓰고 계셔서 공녀님이 맞으신지 잠깐 고민했어요.”

아르세르가 흘긋 내 모자를 올려다보았다.

“모자도 정말 잘 어울리세요. 수도에선 이렇게 챙이 넓은 모자가 유행인가요?”

마치 오래전부터 알고 있던 사람을 대하듯 스스럼없이 몸을 붙이는 아르세르였다.

티 없이 맑고 밝은 미워할 수 없는 사람.

“모자 때문인가요? 오늘은 특히 우아해 보이세요. 저도 모자 좀 하나 사야 할 것 같아요. 공녀님, 괜찮으시면 저도 한번 써 봐도 될까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모자를 벗어 넘겼다.

“어때요? 저도 잘 어울리나요?”

“영애 것처럼 잘 어울리네요.”

그 칭찬에 아르세르가 만족한 듯 활짝 웃었다.

“아, 공녀께 드리려고 쿠키도 구워 왔어요! 쿠키는 지금 드릴까요? 아니면 전시회가 끝나고 드릴까요?”

“저도 작은 선물 하나 준비했는데 지금 드릴까요?”

“어머, 제 선물이요?”

아르세르가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오는 길에 하나 골라 봤어요.”

하얀 레이스가 달린 장갑. 요즘 수도의 영애들이 많이 가지고 다니는 것이었다.

“우와. 공녀께서 직접 고르신 건가요?”

“영애에게 어울릴 듯해서요.”

“이런 건 바라지도 못했는데, 너무 감사해요.”

아르세르는 한참 동안 장갑을 바라보다 서둘러 쿠키를 꺼냈다.

커다란 리본이 달린 상자.

“가장 예쁜 걸로 골라 담았는데 마음에 드셨으면 좋겠어요. 근데 공녀님께서는 워낙 좋은 다과들을 접하셔서 마음에 차실지 모르겠네요.”

“포장까지 너무 예쁜걸요? 고마워요.”

“별말씀을요.”

아르세르가 조금 부끄러운 듯 고개를 살짝 숙였다.

“소공자님 것도 준비했는데 마음에 들어 하실까요?”

“마음에 들어 하셨으면 좋겠네요.”

그때 언제 온 것인지 등 뒤에 선 로렌스가 입을 열었다.

“공녀. 많이 기다렸나?”

“아, 소공작님. 아뇨 저희도 금방 왔습니다.”

로렌스의 시선이 천천히 아르세르에게로 옮겨갔다.

“안녕하세요, 소공작님.”

“로드리게즈 영애. 이렇게 또 뵙네요.”

“전에 무도회에서 인사드렸었는데 기억하시는군요.”

아르세르는 로렌스가 절 기억하는 게 좋은 듯 작게 박수를 쳤다.

로렌스는 나를 흘긋 바라보다 천천히 입을 열었다.

“로드리게즈 영애. 그날 무도회에서 혹 제 언사에 속이 상하셨다면 사과드리겠습니다.”

“아, 아. 아니요.”

아르세르가 당황한 듯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저는 괜찮아요. 신경 쓰실 필요 없으세요.”

“넓은 마음으로 이해해 주신다니 감사하군요.”

아르세르는 예상치 못한 사과에 괜찮다며 고개를 숙였다.

흘긋 본 아르세르의 얼굴이 조금 붉어진 듯도 했다.

“아, 공녀님께 드릴 선물을 만들면서 소공작님것도 준비했는데….”

아르세르가 로렌스를 훑어보다 입을 열었다.

“가방이 없으시니 헤어질 때쯤 드릴까요?”

아르세르의 말에 로렌스가 나를 흘긋 바라봤다.

그의 시선이 내 손에 들린 작은 상자에 닿았다.

“아, 제 선물도 준비해 주셨단 말씀인가요?”

“네. 제가 쿠키를 구웠거든요.”

“제 것까지 챙겨 주실 필요는 없었는데. 영애, 감사합니다. 주시면 들고 다니겠습니다.”

아르세르로부터 상자를 전해 받은 로렌스는 잠시 상자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그만 들어가실까요?”

“네. 가요, 공녀님.”

아르세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내게 가까이 붙어 왔다.

* * *

“그보다 소공작님과 공녀님은 많이 친하신 것 같아요.”

“어렸을 적부터 종종 봐 와서요.”

로렌스는 계속해서 이어지는 아르세르의 질문에도 나름 성실히 답해 주었다.

“이번에 개최되었던 검술대회에서 소공작님이 승리하셨다고 들었는데 5년 연속 승리라니 너무 대단하신 것 같아요. 저도 참관하고 싶었는데, 수도로 올라오는 일정이 미뤄져서요.”

아르세르는 검술대회를 보지 못한 게 아쉬운 듯 눈꼬리를 늘어뜨렸다.

“검술은 몇 살 때부터 배우신 거예요?”

“으음. 정확히 검을 잡은 건 여섯 정도인 것 같군요.”

“그때부터 뛰어나셨을 것 같아요.”

“딱히 그렇지도 않았습니다.”

로렌스가 아르세르의 감탄 섞인 칭찬에 불편한 듯 고개를 돌렸다.

“공녀님은 검술대회에 가셨나요?”

“아, 저는 잠시 보다 나왔어요.”

반 발자국 뒤에서 걷던 나는 갑작스러운 아르세르의 물음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왜요?”

검술 대회.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공자들은 그 대회에 나가지 않기 위해 서로 신경전을 펼쳤다.

대회에 나가 봤자 창피와 수모만 겪을 거라는 걸 그들이 가장 잘 알았기에.

원래 바버가 출전하기로 했지만 대회의 전날 갑자기 열병에 걸린 바버에 출전권은 밀럼에게로 밀렸다.

그러나 밀럼도 대회의 시작 한 시간 전 손을 다치는 바람에 결국 대회에는 모르간이 출전하게 되었다.

결국 그들의 걱정처럼 모르간은 상대에게 철저히 농락당한 뒤 패배를 맛봐야 했다.

허둥지둥 대회장을 빠져나가던 모습이 얼마나 우습던지.

검술대회를 끝까지 참관하지 않은 이유를 아르세르에게 설명하기가 어려워 어색하게 웃자 아르세르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아, 그보다 공녀님, 다음 주 토요일날 혹시 시간 괜찮으세요?”

전시장을 나오는 길 아르세르가 물었다.

“그날 불꽃 축제를 한다더라고요. 괜찮으시다면 함께 야시장도 가 보고 불꽃놀이도 구경하고 싶어서요.”

야시장.

야시장이라는 말에 눈이 번쩍 뜨였다.

수도의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운하.

그곳에서의 뱃놀이.

로렌스와 아르세르가 서로에게 호감을 가지기 시작한 곳이었다.

“전 너무 좋아요!”

생각보다도 일이 너무 순조롭게 흘러갔다.

그곳에 로렌스와 아르세르를 데리고 간다면 소설에서처럼 일이 흘러갈 것만 같았다.

놓칠 수 없는 기회에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이다. 공녀님과 꼭 같이 가고 싶었거든요! 혹시 길거리 음식은 싫어하시나요?”

“아뇨. 전 다 잘 먹어요.”

“그럼 저희 그날 맛있는 거 많이 먹어요!”

아르세르는 그날의 약속에 들뜬 듯 종알거리며 여러 계획을 세웠다.

그러다 아차 싶은 듯 로렌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소공작님도 함께 가시면 좋을 텐데.”

“저는 아마 시간이 안 될 듯하군요.”

조심스러운 아르세르의 물음에 돌아 온 건 정중한 거절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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