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3화 (5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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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소공작님은 그날 바쁘실까요?”

“아마도.”

이게 아닌데.

물론 아르세르와 보내는 시간도 재미있겠지만 내가 아르세르와 야시장에 나가는 건 재미 때문은 아니었다.

로렌스와 아르세르를 이어 주기 위함인데, 정작 가장 중요한 로렌스가 불참하겠다니.

아르세르는 단호한 로렌스에 단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이대로 그를 놓칠 수 없던 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불꽃놀이를 매일 볼 수 있는 것도 아닌데. 정말 안 되세요?”

“그다지 불꽃놀이에 흥미가 없어서.”

“그렇지만 맛있는 길거리 음식도 있는걸요?”

로렌스는 관심 없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런 로렌스를 바라보던 아르세르가 아쉬운 듯 입을 비죽이며 말했다.

“소공작님도 함께 가셨으면 했는데. 아쉽네요.”

“…그러게요.”

작게 한숨을 내쉬자 로렌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영애들끼리 노시는 데 제가 끼면 불편하지 않으시겠습니까?”

로렌스의 물음에 아르세르가 작게 고개를 저었다.

“전혀요. 공녀님께서도 바라시는 것 같고요.”

“소공작님께서 와 주시면 더 좋을 것 같아요.”

로렌스는 의외라는 듯 잠시 날 바라보았다.

“그럼 일정 좀 확인해 보고 이번 주말이 가기 전까지 연락하겠습니다. 그보다 공녀, 카를로스는 어떻게 하기로 했습니까?”

“카를로스요?”

아르세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날 바라봤다.

“공녀님, 카를로스가 누군가요?”

“아, 저희 가문의 아이예요.”

나는 아르세르에게 간단하게 설명을 하고 로렌스를 바라봤다.

“제안 주신 대로 했으면 좋겠는데, 주에 한 번 정도는 외출할 수 있을까요?”

“…외출?”

“네. 안 될까요?”

“안 될 것 없지.”

로렌스가 알았다는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정확한 날은 아이와 한 번만 더 상의해 볼게요.”

“그래, 그럼.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나는 이만 가 볼게.”

로렌스가 아르세르를 향해 시선을 돌렸다.

“영애,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아, 네. 오늘 즐거웠어요.”

아르세르는 순간 빨리 떠나는 로렌스에 아쉬운 듯 했으나 이내 환하게 웃으며 말을 이었다.

“다음 주에 또 뵐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그럼, 소공작님. 조심히 들어가세요.”

로렌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이내 걸음을 옮겼다.

아르세르는 멀어져가는 로렌스를 바라보다 이내 입을 열었다.

“공녀님, 정말 죄송한데 제가 속이 안 좋아서요. 오늘은 이만 들어가 봐도 될까요?”

“아, 네.”

“정말 죄송해요. 저희 차는 다음에 꼭 마셔요.”

아르세르가 미안한 듯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내 손을 잡았다.

“원하신다면 제 마차로 데려다 드릴까요?”

“아, 아뇨. 불편하시게 그러실 필요까진 없으세요.”

아르세르는 괜찮다며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공녀님, 그럼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조심히 들어가시고 다음주 토요일날에 봬요.”

아르세르는 꾸벅 인사를 하더니 서둘러 자리를 떠났다.

* * *

똑똑.

“공녀님, 편지가 왔습니다.”

“응. 들어와.”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정말 주말이 다 가기 전에 편지를 주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건네 받은 편지지에는 로렌스의 글씨가 쓰여 있었다.

유난히 일정한 크기의 필기체.

로렌스의 것이었다.

[토요일에 시간을 내 보려 했는데 쉽지 않더군. 아마 9시쯤이 되어야지 괜찮을 듯해. 만약 공녀와 로드리게즈 영애가 괜찮다면 그때쯤이라도 한번 들르지.

그보다 언제 그렇게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영애와 친해진 거지? 분명 그 무도회에서 처음 본 것 같았는데 말이야.

뭐 때문에 둘이 그렇게 빨리 친해질 수 있었던 건지는 몰라도, 너무 한 영애와만 친분을 쌓는 건 좋지 않아. 물론 공녀가 알아서 잘하겠지만 친구의 걱정 어린 충고쯤으로 여겨 줘.]

“음?”

아르세르와만 붙어 다니지 말란 얘기인가?

“왜지?”

로렌스가 왜 이런 말을 하는 것인지 쉽게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그가 보내온 편지에는 자세한 이유는 쓰여 있지 않았다.

이어지는 내용에는 택할 수 있는 카를로스의 합숙 훈련 시기가 몇 가지 적혀 있었다.

“…….”

로렌스는 왜 여주인공을 상대로 이런 말을 하는 걸까.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경계하고 있는 건가?

분명 전시회 날 봤을 때는 두 사람이 꽤 친해진 듯 보였는데.

“엠마,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말이야.”

“네. 그 영애는 왜요?”

“그러니까 내가 그 영애와만 다니는 것 같아?”

엠마가 잠시 고민하듯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입을 열었다.

“흐음, 아직 그 영애를 아신 지 며칠 되지도 않았잖아요. 딱히 로드리게즈 영애하고만 다니신다고 보이지는 않는걸요?”

“그렇지?”

엠마의 말이 맞았다.

아직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알게 된 지 일주일쯤밖에 되지 않았을뿐더러 영애와 특별한 사이도 아니었다.

“근데 공녀님께선 그 영애가 마음에 드신 건가요?”

“응?”

엠마가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전 딱히 그 영애가 좋아 보이지 않아요.”

“…왜?”

“자꾸 공녀께 들러붙잖아요.”

엠마는 더 설명을 요하는 날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공녀를 통해 사교계에 적응하려는 게 딱 보이잖아요. 감히 공녀를 이용하려고.”

엠마의 말에 상관없다는 듯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그건 아르세르가 내게 직접 한 말이었다.

사교계에 의지할 이가 없어 힘들었는데 공녀를 만나 안심이 된다고.

헤라르일라 공녀인 나와 함께 다니다 보면 다른 영애들도 아르세르에게 관심을 가질 테고 그녀가 수도의 사교계에 적응하는 데 도움이 되겠지만, 그 정도야 아무렇지 않았다.

이용이라기보다도 도움을 받는다, 정도?

게다가 원래라면 등장과 동시에 많은 이들의 관심을 받아야 했을 그녀였다.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약혼자로 사교계에 등장한 것이니.

그러나 이번엔 아무런 관심도 받지 못한 채 사교계에 데뷔하게 되었다.

그게 완전한 내 탓은 아니었지만 조금은 미안한 마음도 있었다.

어쨌거나 나 때문에 소설이 바뀐 것이니.

“…….”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무슨 의미로 이 같은 말을 했는지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그가 아르세르를 경계한다는 게 좋은 징조는 아닐 듯했다.

* * *

“공녀님!”

광장의 시계 탑 앞.

멀리서부터 큰 소리로 날 부르며 손을 흔드는 아르세르에 주위 사람들의 이목이 내게 집중되었다.

흘긋거리며 날 구경하는 이들에 서둘러 모자를 눌러썼다.

이렇게 되면 이목을 끌지 않게끔 수수한 옷을 입고 온 이유가 없어졌다.

“공녀님, 오늘도 되게 빨리 나오셨네요?”

아르세르가 반갑게 팔짱을 껴 왔다.

“소공작님은 9시에나 오신다고요?”

“저, 영애.”

“네?”

“이곳에선 공녀라 부르지 말아 줘요.”

내 부탁에 아르세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네? 왜요?”

“오늘은 조용히 구경하고 싶어서요.”

그제야 아르세르가 작게 탄식하며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아, 어쩐지. 그래서 수수하게 입고 오신 거군요.”

빛나는 비단옷도, 그렇다고 화려한 레이스 장식도 하나 없는 하얀 와이셔츠에 긴 치마였다.

“역시 이 옷 되게 잘 어울리시네요.”

아르세르는 환하게 웃더니 이내 눈을 도르륵 굴렸다.

“그럼 제가 뭐라고 부를까요?”

“그냥 패트리샤라 불러 주세요.”

“…정말 그래도 될까요?”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세르가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그럼 공… 패트리샤도 절 셀리라 불러 주세요.”

내가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세르가 신이 난 듯 환하게 웃었다.

“저희 오늘 평민인 척하는 거군요. 너무 신나요.”

아르세르의 비단 드레스는 평민과는 조금 거리가 있는 듯했지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보다 패트리샤. 한 주 동안 잘 지내셨을까요?”

“저야, 뭐. 셀리는요?”

그 물음에 아르세르가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여러 티파티에 참석하긴 했는데 대부분 뻘쭘하게 앉아 있다 돌아왔어요. 패트리샤가 얼마나 보고 싶던지.”

아르세르가 작게 칭얼거리며 내 어깨에 고개를 기댔다.

“그보다 패트리샤는 왜 티파티 같은 곳에 참석하지 않으시는 거예요?”

“흐음, 외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아서요.”

“아….”

아르세르가 예상외라는 듯 작게 말을 늘였다.

“그래도 저와는 벌써 밖에서 두 번이나 함께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럼 전 특별한 거네요? 외출을 싫어하는 패트리샤와 두 번이나 만난 거니깐요!”

눈을 반짝이며 빛내는 아르세르에 작게 고개를 끄덕이자 아르세르가 환히 웃었다.

크리스마스 선물을 받은 아이처럼 티 없이 맑은 그 웃음에 절로 눈길이 갔다.

“아, 좋다. 저 패트리샤랑 친해진 것 같아서 정말 기뻐요.”

아이같이 순수하고 사랑스러운 사람.

“저, 기뻐해도 되는 거죠?”

여자 주인공에 딱 어울리는 사람이 아닐 수 없었다.

곱게 접힌 그 눈을 보니 왜 모두들 그녀에게 빠졌는지 알 듯했다.

내가 ‘그럼요’라며 작게 긍정하자 아르세르가 다시 한번 환히 웃어 보였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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