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5화 (55/67)

55

“어차피 우리밖에 없는걸? 뭐 어때?”

“공녀님!”

다시 한번 엠마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럼 카를로스는 어떻게 해. 지금 숙소로 가 봤자 다들 일어나서 준비하느라 시끄러워서 잠도 못 잘걸? 이 어린 카를로스를 한숨도 못 재우면 내 마음이 편하겠어?”

그제야 엠마도 카를로스가 걱정되는지 입을 다물었다.

“저는 괜찮아요. 그다지 피곤하지도 않고요.”

카를로스는 자신은 아무렇지 않다며 웃었지만 그렇다고 마음이 놓이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내가 미안해서 그래. 나 때문에 밤새 고생했으니 이제라도 편히 재우고 싶어서.”

솔직히 말해, 눈을 떴을 때 곁에서 카를로스의 목소리가 들려와 마음이 놓였다.

혼자도 괜찮으니 그만 가 보라 말했지만 내심 곁에 있어 주길 바랐다.

오라버니도 아버지도 들여다보지 않는 날 밤새 간호해 준 이들이었다.

정말이지 몸만 괜찮으면 카를로스에게 침대를 내어 주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래도 공녀님과 나란히 눕는 건 안 돼요.”

“그래. 카를로스 엠마 옆으로 와서 누워.”

결국 엠마가 자리를 내줬고 카를로스는 눈치를 보다 엠마 곁에 누웠다.

결국 우리 셋은 나란히 한 침대에 누웠다.

절대 안 된다고 소리치던 엠마의 그 기준이 참 애매하고 엉성해 웃음이 났다.

“푸흡! 엠마, 그래서 이건 괜찮아?”

“어떻게 눕든 공작님께 들키면 경을 치실걸요?”

엠마는 그렇게 툴툴대면서도 카를로스에게 이불을 덮어 주었다.

“살면서 공자님도 아닌 공녀님과 같은 침대에 눕게 될 줄이야.”

엠마가 다시금 툴툴거렸다.

“엠마. 아이 앞에서 못 하는 말이 없지, 아주?”

“…아, 죄송해요. 카를로스, 별말 아니니 신경 쓰지 마.”

엠마는 카를로스를 흘긋 바라보더니 이내 고개를 깊이 숙였다.

“가끔 보면 공녀님은 이상하리만치 격이 없으세요.”

“그런가?”

엠마는 다른 이들 앞에서는 조심하시라며 잔소리를 시작했다.

그게 누군가에겐 고마운 일이 아니라 공녀님을 욕보일 기회일 수도 있다면서.

“고마움을 모르는 이에게는 우스워 보이기 딱이에요.”

“그래, 그래.”

“제 말 또 대충 들으시는 거죠? 전 남들이 공녀님 쉽게 보는 거 싫단 말이에요.”

그 잔소리 속에 섞인 엠마의 애정에 순간 웃음이 흘러나왔다.

“엠마, 나 명색이 공녀야. 웬만해선 쉽게 보이지 않는다는 말이야.”

“치, 그럼 그 로드리게즈 영애가 왜 공녀님을 혼자 보냈겠어요.”

“뭐?”

“그렇잖아요. 공녀님께서 그렇게 아파하시는데 당연히 집까지 모셔다 줬어야죠. 안 그래, 카를로스?”

엠마는 갑작스레 가만히 누워 있는 카를로스의 동의를 구했다.

“카를로스, 만약 너였다면 공녀님이 아프신데 그냥 혼자 보낼 거야?”

“아뇨. 절대요.”

“그럼 너도 로드리게즈 영애가 마음에 안 드는 거지?”

“네. 저도 공녀님을 이용하기만 하는 사람은 싫어요.”

카를로스가 꽤나 단호히 말을 끝맺었다.

아무래도 내가 잘 때 엠마가 카를로스에게 아르세르에 대해 뭔가 말을 해 놓은 모양이었다.

“아냐. 오늘은 일이 있었어.”

“전 어떤 일이 있더라도 공녀님을 혼자 보내지는 않을 거예요.”

카를로스가 다시 한번 아르세르를 향한 부정적인 감정을 드러냈다.

엠마는 그런 카를로스가 마음에 드는 듯 그와 작게 손바닥을 맞췄다.

이제 보니 피곤하지 않다던 말이 아주 거짓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게 아니라. 로드리게즈 영애는 뒤늦게 합류하신 소공작님과 함께 있어야 하는 상황이었어.”

그 순간 엠마가 벌떡 일어났다.

“소공작님이요? 그곳에 소공작님과 함께 계셨어요? 그럼 그 로드리게즈 영애와 소공작님이 함께 계신 거예요?”

엠마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깜짝 놀라 눈을 동그랗게 뜬 채 고개를 끄덕이자 엠마가 헛웃음을 흘렸다.

“이거 완전 여우 같은 계집이….”

엠마는 아르세르를 향한 비난을 차마 끝맺지 못하고 천천히 입을 닫았다.

“엠마.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어. 게다가 무엇보다 내가 아무렇지 않아.”

“…혹시 그 영애가 공녀님께 친한 척 들러붙었던 이유가 소공작님과 엮여 보고 싶어서 아니에요?”

밑도 끝도 없는 의심과 증오에 나는 눈을 감았다.

“엠마, 넌 그 영애를 너무 미워하는 것 같아.”

“흥, 처음부터 마음에 안 들었어요.”

“그래. 그만 누워.”

엠마는 피곤한 날 배려하듯 조심스레 제 몸을 눕혔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근데 정말 이상한 게 뭔지 아세요? 그 영애가 더 이상 모르간 공자님과 아무런 연락을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속삭이며 내 동의를 구하던 엠마는 내가 아무런 말이 없자 다시 입을 열었다.

“분명 처음에는 모르간 공자님과 엄청난 친분을 쌓을 것처럼 굴었잖아요. 무도회에서 처음 만났으면서 바로 그다음 날 공작저까지 오고 말이에요. 근데 공녀님과 친해진 듯하니 모르간 공자님과는 바로 연락을 끊었어요. 이상하지 않으세요?”

“뭐, 그 영애가 오라버니를 이용하려다 나로 갈아탔다는 말이야?”

“당연하죠! 만약 그런 목적이 아니었다면 모르간 공자님과도 계속 연락을 이어 나갔어야죠.”

“흐음, 그렇긴 하네.”

엠마는 신이 난 듯 조금 목소리를 높였다.

“그것 봐요! 아주 여우라니깐요?”

“근데 뭐. 사교계에서 의지할 사람 하나 정도는 만들고 싶을 수도 있지. 안 그래?”

“으으.”

엠마는 분한 듯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래도, 그래도….”

그렇게 한참을 반박할 거리를 찾던 엠마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런 식으로 연락을 끊는 건 예의가 아니죠. 마치 이제 필요 없으니 버리는 것 같잖아요.”

“오라버니와 영애의 연락이 어떻게 끊어졌는데?”

“도련님은 매일같이 영애에게 편지를 부치시거든요. 그런데 영애로부터는 답장이 딱 한 번 오더니 그 뒤로부터는 깜깜무소식이에요. 아, 이번 주 목요일날 하나 왔었긴 했다.”

확실히 선을 긋는 태도였다.

그러나 내 입장에선 아르세르가 멍청한 모르간한테 괜히 잘해 주다 엉망으로 엮이게 될 바엔 선을 긋는 게 좋았다.

하지만 그것과는 별개로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는 확실히 계산적인 사람인 것 같기는 했다.

“흐음….”

그렇다는 건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수도로 올라 온 이유도 단순한 재미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그녀의 말대로 그저 사람이 많아서도 아니었고.

분명 좋은 남편감을 찾거나 인맥을 넓히려는 이유겠지.

이렇게 되면 처음 했던 고민으로 되돌아가는 꼴이었다.

사교계에서 자리를 잡아 이득을 얻으려던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왜 소설 속에선 빨리 올라오지 않았던 걸까?

내 무엇이 그녀를 수도로 올라오게 한 걸까?

그래,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수도로 올라와 얻고 싶었던 것이 인맥과 제 남편이라면 그에 가장 걸맞은 상대는 누가 뭐라 해도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일 것이다.

그럼 지금 아르세르는 로렌스를 원하고 있는 걸까?

그를 원하고 수도로 올라 온 것일까?

소설 속에서도 결국 아르세르는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이어졌다.

그러고 보면 소설 속에서 계약 결혼을 제안한 것도 다름 아닌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였다.

애초부터. 그러니까 소설에서부터 아르세르는 로렌스를 원하고 있던 걸까?

그렇다는 건 제 가문의 투자 이전에 로렌스를 원하고 있었다는 것일까?

하긴. 소설이라고 모든 걸 설명하고 있는 건 아닌 듯했다.

그러잖아도 소설 속에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사생아라는 사실은 어디에도 나와 있지 않았잖는가.

그러니까 투자처를 구하려던 게 아니라 로렌스를 얻기 위해 올라온 것이라면.

애당초 아르세르의 목표가 로렌스 게르하르트였다면 지금의 모든 상황이 이해가 됐다.

그제야 모든 상황이 말이 맞아떨어졌다.

왜 그녀가 지금 수도로 올라왔는지.

왜 소설 속 그녀가 그때 올라온 것인지.

그때도, 지금도 모두 로렌스 때문이었다.

이번에 그녀가 올라 온 이유는 내가 바뀌어서였다.

소설에선 일어나지 않았으면서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의 귀에까지 들어갔을 일은 한 가지밖에 없었다.

…내가 소설과 달리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파트너로 무도회에 참석한 것.

로렌스와 패트리샤.

내가 대충 알기로도 한바탕 소문이 난 것으로 알고 있었다.

두 사람이 서로 특별한 사이일 것이라는 그 소문이 아르세르에게까지 들어갔고 그래서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온 게 아닐까?

나와 로렌스의 관계를 제 눈으로 확인하려고.

더 늦기 전에 로렌스를 잡으려고.

내게서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빼앗으려고?

순간 소름이 돋았다.

로렌스는 분명 그날 별빛 무도회에서 아르세르를 처음 보는 것이었다.

그건 아르세르도 마찬가지일 텐데.

아무런 연도 없는 사람에게 이 정도의 집념을 보인다고?

로렌스를 사랑하는 건가?

하지만 본 적도 없으면서 왜.

그녀가 원하는 건 결국 로렌스 게르하르트였나?

엠마의 말이 맞았던 걸까?

만약 그렇다면.

별빛 무도회에서 모르간과 아르세르가 함께 춤을 춘 것부터.

내게 인사하고 싶다며 찾아왔던 것도.

뒤늦게 로렌스를 발견한 듯 죄송하다 말했던 것도.

모두 연기였겠지.

아르세르 그녀가 로렌스를 못 알아봤을 리 없었을 테니.

분명 그때 내게 인사하고 싶다고 모르간을 설득한 이유도 그곳에, 내 곁에 로렌스가 있기 때문이었을 테지.

오소소.

한순간에 몸을 감싸는 그 기묘한 기분에 질끈 눈을 감았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