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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6화 (56/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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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스럭부스럭.

조심스레 몸을 일으켰다.

밤새 잠을 못 잔 카를로스와 엠마는 그새 새근새근 잠에 들었다.

“…….”

아르세르로 머리가 복잡해 가만히 누워 있을 수가 없었다.

처음부터 이상한 점이 있었음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은 건 그녀가 소설의 여자 주인공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녀가 무슨 생각을 하든, 무슨 계획이든 그것에 악의가 있지 않을 거라 생각했고, 크게 문제 될 건 없으리라 생각했다.

아르세르는 내게 친해지자며 다가왔다.

그러나 정작 내게서 로렌스를 빼앗길 바라고 있는 거라면.

겉과 속이 다른 사람.

그렇다면 왜 이토록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집착하는 것일까?

“후우.”

물론 이 모든 건 그저 다 내 추측일 뿐이었다.

몇 번 보지 못했지만 내가 본 아르세르는 분명 착하고 순수해 보였으니.

어쩌면 몸이 편치 않아 한껏 예민해진 탓에 모든 걸 날 선 상태로 받아들이는 것일지도 몰랐다.

“…….”

그래, 어쩌면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모르간 헤라르일라에게 답장을 하지 않고 선을 긋는 이유는 그가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리려는 게 아니라 모르간의 행동이 부담스러워일지도 몰랐다.

모르간이 너무 들이대서 부담을 느끼는 것일지도 몰랐다.

“…그런가?”

하긴, 모르간이 들이대면 나라도 부담스러울 듯했다.

다시 생각해보니 모르간 같은 이가 매일같이 편지를 부쳐 대는 데 부담감을 느끼지 않고 배길 순 없을 듯했다.

또한 내가 로렌스의 파트너로 참여한 게 뭐 그리 큰일이라고 수도까지 올라온단 말인가?

만에 하나 아르세르가 그 정도로 로렌스를 신경 쓰고 있었더라면 진작에 수도로 올라와 그의 곁에 있어야 했다.

아르세르는 그냥 모르간이 부담스러웠을 뿐이었다.

“아, 그렇네.”

그렇게까지 생각을 마치자 모르간 때문에 마음고생 했을 아르세르의 심정이 차고 넘치게 이해되었다.

그제야 마음이 한결 편안해 진 나는 조심스레 침대에 다시 몸을 누였다.

“…….”

그러나 이러면 결국 다시 원점일 뿐이었다.

아르세르는 대체 왜 소설과 달리 하필 지금 수도로 올라왔느냐 하는 질문 말이다.

끝도 없이 이어지는 고민에 이제 머리까지 어지러웠다.

답답함에 짜증이 몰려들었다.

결국 아르세르에 대해 알아보는 수밖에 없을 듯했다.

그녀가 속으로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지 알아볼 필요가 있었다.

* * *

“딸아. 이제 좀 괜찮느냐?”

오후쯤 되었을 때 공작이 내 방에 찾아왔다.

“걱정되는 맘에 아침에도 왔었는데 네가 곤히 자고 있다는 말에 걸음을 돌렸단다.”

그는 걱정된다는 듯 조심스레 내 손을 움켜잡았다.

그의 눈이 찬찬히 내 얼굴을 훑었다.

“그래도 호전이 된 듯해 다행이구나. 식은땀도 멎고 열도 내린 듯하니 정말 다행이야.”

공작이 내 얼굴을 손으로 쓸어내렸다.

“아침까지 네가 나아지지 않으면 의원을 찾아가 호통을 치려 했는데 그러지 않아도 되겠구나.”

공작은 이제야 얼굴을 들이밀면서 나를 한껏 걱정한 체했다.

“…히이.”

공작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다 아무래도 이건 아닌 듯해 서둘러 고개를 숙였다.

아냐, 패트리샤! 넌 할 수 있어!

“힝, 그래도 아직 힘들어요.”

나는 이불 속으로 두 손을 맞잡고 바람 빠지는 소리를 냈다.

생전 처음 내보는 기괴한 소리에 삐질 땀이 흐르는 듯도 했지만 서둘러 말을 이었다.

“몸을 움직일 힘도 없는걸요? 게다가 어제는 가슴이 콱 눌린 듯 숨까지 쉬어지지 않았어요.”

“…많이 힘들었겠구나.”

“정말이지, 이렇게 딱 죽는 건가 싶었다니깐요?”

길어지는 투정에 공작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뭘 더 어찌해 줘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이런. 패트리샤를 그리 아프게 만들다니! 노점의 상인들을 잡아 아비가 혼을 내주랴?”

그러다 버럭 공작이 성을 냈다.

“아니요.”

“그럼 당장에라도 의원을 잡아 와 무릎을 꿇리랴?”

“아니요.”

“그, 그럼 이 아비가 뭘 해 주길 원하는 게냐?”

드디어 공작의 입에서 원하는 말이 나왔다.

“어제 제가 아르세르 영애와 함께 축제 구경을 했잖아요.”

“알다마다.”

“전 그 영애가 가져다준 음식만 먹었거든요?”

“그래, 그래.”

“아무래도 그 영애가 제 음식에 뭔 짓을 한 것 같아요.”

다시 한번 우는소리를 하자 공작이 위로하듯 내 손을 톡톡 두드렸다.

공작의 얼굴 위로 조금 난처한 기색이 떠올랐다.

분명 내가 쓸데없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이런. 뭔가를 본 게냐?”

“그날 소공작님이 뒤늦게 합류하기로 했는데, 갑자기 탈이 나 제가 집에 오는 바람에 그 둘이 함께했지 뭐예요?”

“뭐? 소공작과 아르세르 영애가 단둘이 말이냐?”

소공작의 얘기에 그제야 공작이 반응을 보였다.

나는 크게 고개를 끄덕이었다.

“제가 갑자기 체한 게 말이 안 되잖아요.”

사실 내가 체한 이유가 정말 아르세르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었다.

단지 아르세르에 대해 자세히 알아보기 위함이었다.

공작에게 그녀의 뒷조사를 부탁하기 위한 명분 정도?

“흐음, 이상하긴 하구나.”

“아버지가 느끼시기에도 그렇죠? 그 영애 뭔가 수상해요. 좀 알아봐 주세요.”

“…그래, 뭘 알아봐 주면 되겠느냐?”

헤라르일라 공작.

그가 아무리 공작이라지만 뒷조사까지 맡길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무래도 헤라르일라 가문은 학식으로 이름을 알리고 있었다.

뒷조사와는 조금 거리가 먼듯했는데.

어째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떠올랐지만 이 일을 그에게 부탁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아르세르 영애가 수도로 올라오기 전의 그곳에서 영애의 평판 같은 걸 알아봐 주셨으면 좋겠어요. 영애 가문의 재정상황도요.”

“그래. 알았다.”

공작이 뭔가 다짐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련의 행동이 별로 믿음직스럽지는 않았지만, 지금 그 영애에 대해 알아볼 수 있는 건 헤라르일라 공작, 그뿐이었다.

아무래도 나는 이 세상에 대해 잘 알지 못했고 누군가를 조사할 능력도 없었으니.

공작은 걱정하지 말라고 호언장담하며 방을 빠져나갔다.

* * *

“엠마.”

“네, 물 좀 드릴까요?”

“아니. 나한테 온 초대장 좀 가져다줄래?”

엠마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초대장이요?”

“응. 아르세르 영애 말이야. 네 말대로 조금 이상한 것도 같아서 알아보려고.”

“어머, 역시 공녀님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그럼 영애들의 파티에 나가시려고요?”

“응. 아르세르 영애는 종종 나가는 듯하더라고.”

엠마가 잘됐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네! 금방 가지고 올게요!”

서둘러 방을 빠져나가는 엠마를 바라보다 이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사실 티파티에 나간다 해도 딱히 뭔가를 알아낼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은 없었다.

아직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온 지 이 주쯤 지났을 뿐이었으니.

다른 영애들과 아르세르가 친해지면 얼마나 친해졌겠는가.

영애들이 아르세르에 대해 알면 얼마나 알 테고.

그래도 다른 영애들 앞에서는 어떻게 행동하는지 궁금할 뿐이었다.

그녀는 분명 내게 다른 영애들과 친분을 쌓는 게 어렵다고 했었다.

모두들 제게 말을 걸지 않는다고 말이다.

…그 말은 진짜일까?

아르세르의 목표가 로렌스 게르하르트라면 그를 얻기 위한 방법이 있을 터였다.

수도에 올라와 아르세르가 가장 먼저 열을 올린 일.

그건 아마 사교계에 자리 잡기인 듯했다.

하는 말을 들어 보면 대부분의 시간을 파티에 참석며 보내는 듯했으니 말이다.

어쨌거나 사교계에서 좋은 평판이 난다면 영식들에게도 좋은 이미지를 남길 수 있을 테고, 영애들의 파티에 참석하다 보면 로렌스를 만날 기회도 많아질 수 있을 테니.

그렇긴 한데…

“…이게 방법이라기엔 너무 약하지 않나?”

사교계에서 좋은 평판을 유지하는 것.

그건 모든 영애들이 열심인 일이었다.

다른 영애들과 비교했을 때 색다른 점이 하나도 없지 않은가.

물론 그녀의 얼굴이 색다르게 아름답긴 하지만.

그렇다고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만날 수 있을까?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있을까?

하지만 아르세르가 아무런 득도 없는데 이리 열심을 낼 리가 없었다.

“으음….”

대체 뭐 때문에 열심을 내는 거지?

똑똑.

“공녀님! 가져왔어요!”

문을 열고 들어온 엠마의 손에 한 뭉치의 종이가 들려 있었다.

“그게 다 나한테 온 거야?”

“네네! 역시 우리 공녀님, 인기가 많으시다니깐요.”

왜인지 뿌듯해하는 엠마는 몸을 일으키려는 날 다시 뉘며 의자를 옮겨 왔다.

“공녀님께 온 초대장은 너무 많지만, 공녀님이 가실 만한 파티는 그리 많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

엠마는 내가 어떤 파티를 고를지 궁금한 듯 한껏 상체를 기울였다.

“으음, 너무 많다. 네가 한번 골라 줄래?”

“어머, 그럴까요?”

편지를 도로 가져간 엠마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편지를 나누기 시작했다.

“근데 엠마.”

“네?”

“아르세르 영애는 왜 사교 활동에 열심인 걸까?”

엠마는 잠시 고민하는 듯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러는 와중에도 편지를 나누는 손은 조금도 쉼이 없었다.

“그다지 가문이 좋지 못한 영애들은 자신이 속한 그룹을 바꾸고 싶어서죠. 그렇게 인맥을 만들어 놓으면 무도회에 자신도 초대해 주니깐요. 그리고 그 무도회에서 신분 높은 사내를 만나길 원하는 거죠.”

“그럼 나는? 나는 이미 가문이 좋으니 사교에 열심을 내지 않아도 되는 거야?”

“그렇기는 하지만 공녀님도 평판을 항상 생각하셔야 해요.”

엠마가 내 손에 편지를 쥐여 주었다.

“좋은 평판을 위해선 영애들과 약간의 친목을 다지는 게 좋고요.”

평판이라.

엠마의 말이 완전히 이해되지는 않았지만 어쨌거나 약간의 친목은 내게도 필요할 듯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는 이곳에서 친한 이가 몇 없었다.

기껏 해 봐야 헤라르일라 공작저의 사람들과 로렌스 게르하르트뿐이었으니.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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