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7화 (57/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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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읽어 보시고 공녀님께서 가고 싶으시면 제가 일정을 정리할게요.”

“응. 답장도 적어야 하는데 책상으로 가는 게 좋지 않아?”

“아직 열이 있으시잖아요. 공녀님께서 부르시는 대로 제가 받아 적을 테니 걱정 마세요.”

엠마는 분주히 종이와 깃펜, 티 테이블을 옮겨 왔다.

그렇게 삼십 분쯤 걸려 내게 온 초대장들을 다 정리했다.

“공녀님, 이게 일정표예요.”

“생각보다 많구나.”

열다섯 개의 티파티.

바로 다음 주부터. 매주 세 개씩은 나가는 꼴이었다.

“근데 아무래도….”

“응? 왜?”

“아마 이 파티들에선 로드리게즈 영애를 만나거나 그 영애에 관한 얘기를 듣긴 어려우실 거예요.”

“왜?”

“주최자가 그 영애는 초대하지 않았을 테니깐요.”

아르세르에 대해 알아보려 나가는 건데, 그럼 파티에 나가 봤자 소용없는 거 아닌가?

내 생각을 읽었는지 엠마가 다시금 입을 열었다.

“그래도 수도의 사교계에서 가장 귀가 많으신 분들이니 아르세르 영애와 관련해 큰일이 있었다면 바로 아실 수 있을 거예요.”

“그래. 아무것도 못 얻으면 다른 파티에도 나가 보면 되니깐.”

엠마는 시계를 흘긋 확인하더니 서둘러 내게 약을 건넸다.

나는 엠마에게 약을 받아먹고 멍하니 앉아 분주히 주변을 치우는 그녀를 바라봤다.

이상하게도 분주한 엠마에 눈꺼풀이 점차 내려갔다.

“한숨 자고 일어나시면 열이 완전히 내려갈 거예요.”

촤르륵.

엠마가 커튼을 쳤는지 햇볕이 희미해졌다.

분명 많이 잤는데 어쩐지 또 눈이 감겼다.

* * *

똑똑.

“공녀님, 편지 왔습니다.”

엠마가 편지를 건넸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뭐라고 쓰여 있나요?”

아르세르에게서 온 것이었다.

엠마는 편지를 뜯기도 전에 내용을 물으며 재촉했다.

툴툴거리는 말투를 보니 아르세르가 내게 편지를 보낸 상황 자체가 마음에 들지 않는 듯했다.

“공녀님이 그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 저택으로 돌아오게 해 놓고는 이제 와 대체 뭐라고 하나요?”

“으음, 그날 내가 아픈 게 자기 때문인 것 같다고 미안하다는데?”

아르세르의 편지에는 미안하다는 내용과 즐겁게 놀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해 많이 아쉽다는 내용이 적혀 있었다.

또한, 몸은 괜찮아졌냐는 걱정과 함께, 다음 주에 외국 유명 서커스단이 수도에 방문한다는데 괜찮으면 함께 가는 게 어떻겠냐고 적혀 있었다.

맨 마지막에 추신으로 공녀가 원한다면 소공작을 초대해도 괜찮다는 내용도 같이 쓰여있었다.

이렇게 보면 착한 것 같았는데.

“흥, 그리 걱정이 됐으면 바로 다음 날 편지를 부쳤어야죠. 벌써 오 일이나 지났다고요.”

엠마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흐음….”

또 엠마의 말을 들으면 참 이상했다.

“공녀님, 뭘 고민하시는 거예요? 설마 그 영애와 함께 서커스 구경을 가시려고요?”

“응. 그럴까 생각 중이야.”

엠마가 말도 안 된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대체 왜요? 공녀님도 이상하다면서요?”

“그러니까 더 가 봐야지. 우리끼리 가만히 앉아서 떠들어 봐야 알 수 있는 건 없으니까 부딪쳐 봐야지.”

“그냥 무시하시면 되잖아요.”

엠마가 한숨을 내쉬었다.

“어차피 공녀님께서 선을 그으시면 만날 수도. 만날 필요도 없는 영애예요.”

그러나 엠마의 말처럼 아르세르를 무시할 수는 없는 일이었다.

어쨌거나 그녀는 소설 속 여주인공이었고 로렌스와 이어질 사람이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필요한 사람이었고.

그녀가 수도로 올라온 이상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

근데 아르세르는 왜 단둘이서만 만나는 약속을 잡는 걸까?

그녀는 내게 사교계에 적응하고 싶다고 말했다.

그럼 나를 영애들의 티파티로 초대하는 게 더 좋은 방법 아닌가?

나와 단둘이 놀러 다니는 건 사교계 적응과 아무런 상관도 없지 않은가.

아르세르는 대체 어떤 사람일까?

그녀의 목적이 정말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라면 어떻게 그리 자신할 수 있는 걸까?

어떤 방법으로 그를 사로잡을 수 있다는 거지?

로렌스를 빼앗을 생각인 거라면 그녀는 내게 부정적인 감정을 느끼고 있다는 걸까?

똑똑.

아르세르의 편지에 생각에 잠긴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렸다.

“공녀님. 집사입니다.”

“네.”

이윽고 문을 연 집사가 말을 이었다.

“공작님께서 찾으십니다.”

“아버지가요?”

“공녀님께서 부탁하신 일에 관한 거라고 하셨습니다.”

부탁이라면 아르세르에 관해 알아봐 달라 했던 일을 말하는 듯했다.

나는 서둘러 자리에서 일어나 집사를 따라나섰다.

똑똑.

“공작님, 공녀님 오셨습니다.”

“그래, 들어오게.”

집무실로 들어서자 공작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패트리샤, 거기 앉거라.”

소파에 앉자 공작이 서류뭉치를 하나 건넸다.

“그게 로드리게즈 가문의 재정 상태란다. 보기 어렵겠지만 대충 무리한 사업으로 빚이 많은 상태란 뜻이란다. 지금은 이곳저곳에서 어음을 가져와 막고 있지만 얼마나 더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겠구나.”

나는 공작의 설명에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르세르도 내게 수도로 올라 올 때 가문의 도움을 크게 받지 못했었다고 그리 말했었다.

가문의 일은 소설에서 읽었던 것과 비슷하게 흘러가고 있는 듯했다.

“그리고 그 지역에서 로드리게즈 영애의 평판과 관련해서는 같은 영지 사람을 통해 들으면 될 듯하구나.”

“같은 영지 사람이요?”

“황성 재무부와 법무부 말단 중 그 지역 사람이 둘 있더구나. 네가 원하는 날 그들과 자리를 만들어 주마.”

“네. 근데 한 명씩 만나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한 명씩?”

공작이 고개를 살짝 기울였다.

“아르세르 영애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소문이 돌면 이상해지잖아요. 그들을 불러 주실 때 제 선생을 구하는 것처럼 약속을 잡아 주세요.”

“흐음, 그래. 알았다.”

공작이 고개를 끄덕였다.

“날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겠구나. 그럼 이번 주 주말 약속을 잡아 주마.”

“네.”

“그래서, 게르하르트 소공작이 로드리게즈 영애에게 마음이 생긴 것 같더냐?”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공작이 이렇게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 대해 알아봐 주는 이유는, 그녀에게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빼앗길까 봐. 그 이유였다.

아직 로렌스 게르하르트에 욕심을 버리지 못한 것일 테지.

어쨌거나 그 이유가 뭐가 됐든 그 때문에 공작의 도움을 받을 수 있었으니 내게는 좋은 일이었지만.

“…패트리샤, 네가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마음이 있는 거라면 약혼을 맺는 건 어떻겠니? 이 아비가 보기에 소공작도 네게 마음이 있는 듯하던데.”

공작이 조심스레 제 뜻을 전했다.

날 위하는 듯 말하고 있었지만 속내는 그게 아니라는 걸 내가 제일 잘 알았다.

나는 별로 공작의 뜻대로 움직이고 싶지는 않아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아, 아버지. 제 집 말인데요. 어느 쪽으로 알아보고 계세요?”

“아, 저택이라면 게르하르트 영지에 꽤 좋은 저택이 하나 나왔더구나. 크기도 좋고 정원도 크다더구나. 다른 영지도 알아보긴 했지만 그곳만큼 좋은 저택은 안타깝게도 없더구나.”

다른 영지에 좋은 저택이 없다니. 아마 거짓말일 테지.

게르하르트는 꽤 큰 항구 도시였다.

다른 영지에 비해 집값이 싼 편이 결코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이 게르하르트에 저택을 구하는 이유는 나와 로렌스를 어떻게든 가까이 붙여 놓고 싶어서겠지.

결혼을 억지로 진행 시키거나 날 팔아 버릴 수 없는 노릇이니 그렇게라도 하고 싶은 모양이었다.

“네. 좋아요. 아버지, 그럼 전 이만 가 볼게요.”

어쨌든 게르하르트에 저택을 얻길 바랐으니 문제 될 건 없었지만.

이제 보니 부탁을 하지 않아도 애초에 내 저택은 게르하르트로 정해진 모양이었다.

* * *

토요일 오후.

똑똑.

“공녀님, 손님이 도착했습니다.”

엠마가 기다리던 손님의 방문을 알렸다.

“응접실로 모실까요?”

“응, 내려갈게.”

엠마를 따라 응접실로 내려가자 소파에 앉아 있던 젊은 남자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헤라르일라 공녀님, 안녕하세요. 저는 하이즈라고 합니다.”

“네, 하이즈. 반가워요.”

구불거리는 갈색 머리칼과 옅게 자리한 주근깨.

눈이 마주치자 얼굴이 붉어진 남자가 시선을 돌렸다.

“저… 경제 선생님을 구하신다고 들었습니다.”

“네. 면접 보러 오신 거죠?”

“그럼, 그 선생님을 고르실 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건 뭘까요?”

“아무래도 잘 가르치는 지겠죠? 미리 수업을 받아 보고 싶다고 했는데, 전달받으셨을까요?”

남자가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서둘러 준비해 온 교재를 꺼냈다.

“그럼 시작해도 될까요?”

“네.”

고개를 끄덕이고 그로부터 한 시간.

남자가 준비해 온 수업을 끝마쳤다.

“공녀님, 수고하셨습니다.”

“수고하셨어요.”

“혹시 제게 더 궁금하신 건 없으실까요?”

“으음….”

기다려 왔던 물음이었다.

찻잔을 집어 든 난 잠시 고민하는 체 말끝을 늘였다.

“하이즈는 수도 사람은 아닌 거죠?”

“아, 네. 저는 몬드니 영지에서 왔습니다.”

“음? 몬드니 영지에서 오셨으면 로드리게즈 영애를 아시겠네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말씀이실까요?”

내가 고개를 끄덕이자 남자가 신기한 듯 눈을 크게 떴다.

“예. 알고 있습니다. 그보다 공녀님은 로드리게즈 영애를 어떻게 아세요?”

“종종 만나거든요. 그보다 신기하네요.”

“하하, 그러게요.”

하이즈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그의 반응에선 아르세르를 향한 부정적 감정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었다.

그저 내가 아르세르와 친하다는 사실이 신기하기만 한 듯 보였다.

“영지에선 로드리게즈 영애가 유명 인사였겠죠?”

“예. 저희 영지에서는 가장 인기가 많았습니다.”

“하긴, 예쁘고 착하니.”

“너무 착해 영지 내 다른 여자들이 괴롭히기도 했었습니다.”

남자의 목소리에 안타까움이 묻었다.

무슨 얘기냐는 듯 그를 바라보자 그가 말을 이었다.

“툭하면 로드리게즈 영애의 물건을 훔쳐 가거나 손찌검을 한다거나. 뭐 그런 일이 많아 영애가 아주 힘들어했습니다.”

“아….”

“그렇게 당해도 로드리게즈 영애는 끝내 다 용서해 주더라고요. 마음이 여간 넓은 게 아니신 모양입니다.”

아르세르의 얘기에 이리 말이 많아지는 걸 보면 아무래도 하이즈, 그가 그녀를 좋아했던 듯싶었다.

아니면 아직까지도 좋아하고 있거나.

하긴, 소설에서도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는 항상 인기가 많았다.

“용서라. 그럼 다른 영애들이 반성하고 사과를 한 건가요?”

“아니요.”

하이즈가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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