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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성은요. 되려 자기들은 그런 일이 없다며 억울해하더군요.”
하이즈는 황당하기 그지없다며 미간을 찌푸렸다.
억울.
“흐음. 목격자가 있었는데도 자기들은 안 했다고 말한다고요?”
“그러니까 뻔뻔함의 극치였죠. 영애는 그들의 괴롭힘에 극단적인 생각까지 했는데 말입니다.”
하이즈는 거기까지 말해 놓고 아차 싶은 듯 미간을 찌푸렸다.
“하하, 마음이 여린 영애가 수도로 올라온다 해 많이 걱정했는데 공녀님과 아는 사이라니. 이미 잘 적응한 듯해 마음이 놓입니다.”
“네. 그보다 하이즈는 영애와 따로 연락을 하나요?”
영지 내에서의 괴롭힘과 극단적인 생각.
소설에서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었다.
그 일에 대해 더 물어보고 싶었지만 이미 화제를 돌린 하이즈였다.
민감할 듯한 얘기에 나도 더는 묻지 않고 화제를 돌렸다.
“아니요. 연락을 하는 사이는 아닙니다.”
“그럼 로드리게즈 영애가 올라왔다는 건 어떻게 아셨죠?”
“다른 이에게 전해 들었습니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찻잔을 들었다.
아무래도 하이즈와 아르세르가 개인적인 친분이 있는 건 아닌 듯했다.
흘긋. 시간을 보니 곧 있으면 다른 이가 올 시간이었다.
공작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의 뒤를 조사하는 게 들키지 않으려면 선생을 구하는 것도 진짜 같아야 한다며 네 명이나 면접을 보러 오게 했다.
게다가 정말 그들 중 한 명을 골라 수업을 받아야 했고.
탁.
나는 그만 찻잔을 내려놓고 입을 열었다.
“그럼 하이즈, 오늘은 이만하는 게 좋겠네요. 제가 다음 일정이 있어서요.”
“아, 네.”
“시녀를 따라 집사에게 가면 오늘치 수업료를 지급할 겁니다. 수고했어요.”
* * *
“패트리샤, 그래서 뭘 좀 알아냈느냐?”
“흐음, 네. 감사해요.”
우선 하이즈는 아르세르에 대해 굉장히 긍정적인 분위기였지만 또 다른 몬드니 출신 데이빗은 아르세르에 관한 얘기를 꺼리는 느낌이었다.
아르세르와 같은 영지 출신이냐는 물음에 어색하게 고개를 끄덕였고, 친하냐는 물음에 순간 미간을 찌푸리더니 고개를 저으며 선을 그었다.
그저 같은 영지 출신일 뿐 친분은 없다면서.
확실히 데이빗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 관한 화제를 꺼려 하는 느낌이었다.
아니,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와 아예 엮이고 싶지 않은 듯 보였다.
“그럼 네 선생은 누구로 고르겠니?”
어쨌거나 오늘 만났던 이들 중 한 명을 선생으로 골라야 했다.
하이즈와 데이빗.
하이즈는 아르세르에 관한 얘기를 꺼내는 것에 대해 전혀 거리낌이 없었다.
아마 몇 번만 더 건드리면 그가 아는 아르세르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해 줄 듯했지만, 그는 아르세르를 좋아하고 있었다.
어차피 내게 해 주는 모든 얘기는 아르세르의 입장에서 본 것일 테지.
내가 알고 싶은 건 그녀가 얼마나 착한지에 관한 게 아니었다.
아르세르가 내게는 보여 주지 않는 모습을 알고 싶은 것이었다.
“데이빗으로 할게요.”
데이빗에게는 아르세르에 관한 그 무엇도 듣지 못했지만 어쨌거나 그가 그녀를 탐탁지 않아 한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그 이유를 알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래, 알겠다. 그럼 다음 주부터 수업을 시작하는 걸로 해 놓으마.”
“네. 감사해요.”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꾸벅 고개를 숙여 인사한 후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벌컥.
벌컥 문을 열자 집무실 밖에서 허둥대고 있는 모르간이 눈에 들어왔다.
“뭐야?”
“뭐, 뭐긴? 뭐가?”
“엿듣고 있었어?”
순간 모르간의 눈빛이 심하게 흔들렸다.
“하? 웃기지도 않는군. 아버지께 볼일이 있어서 기다리고 있던 참이야. 감히 날 욕보여?”
“밖에 무슨 소란이냐?”
공작의 목소리에 모르간은 서둘러 집무실의 문을 두드렸다.
“아버지, 저 모르간입니다.”
“그래. 들어오거라.”
그는 다시 한번 으르렁대며 날 노려보더니 방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들은 건가?”
어째 일이 조금 꼬인 것 같았다.
* * *
“엠마.”
“네?”
“잠시 따라 들어와 봐.”
엠마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방으로 따라 들어왔다.
드르륵.
방문을 닫는 엠마를 확인하고 나는 서랍 안에 깊숙이 넣어 놓은 보석함을 꺼냈다.
보석함의 뚜껑을 열자 별빛 무도회 이후로 한 아름 채워진 보석들이 날 반겼다.
보석함을 뒤적이니 작은 금 단추가 하나 눈에 들어왔다.
“자, 엠마.”
“공녀님? 이게….”
금 단추를 전달받은 엠마가 이걸 왜 제게 주냐는 듯 미간을 찌푸렸다.
“모르간 오라버니가 우리가 아르세르의 뒷조사를 하고 있다는 걸 눈치챈 것 같아.”
“모르간 도련님이요?”
“응. 걔라면 옳다구나 하고 로드리게즈 영애한테 말을 전할 것 같아서.”
모르간 헤라르일라라면.
그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마음에 들어 했다.
아니, 반쯤 미쳐 있었다.
그런 모르간이었으니.
더는 자신을 상대해 주지 않는 아르세르의 관심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러고도 남았다.
엠마는 뭔가 생각하는 듯하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도련님이라면 그러실 수도 있겠어요.”
“응. 모르간 전담 시녀에게 이걸 줘.”
“뭐 원하시는 게 있으세요?”
“모르간의 편지를 우선 내게 갖고 오라고 해.”
엠마가 작게 박수 쳤다.
“우와, 그게 좋겠네요! 공녀님께서 먼저 편지의 내용을 확인하는 거군요.”
“응. 그렇지.”
“그런데 만약 도련님의 편지 중에서 로드리게즈 영애에게 비밀을 전하는 편지를 찾으시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나는 당연한 걸 왜 물어보냐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빼돌리시게요? 로드리게즈 영애로부터 답장이 오지 않으면 모르간 도련님이 알아차리지 않을까요?”
“모르간이 끄나풀이라는 것만 발견하면 그 후는 어떻게 되든 상관없어.”
“그게 무슨….”
엠마는 이해가 되지 않는 듯 미간을 찌푸렸지만 내가 재촉하는 바람에 더 묻지 못하였다.
“엠마, 오라버니가 지금쯤 제 방으로 돌아갔을 테니 서둘러야 할 거야.”
“아, 네! 그럼 서둘러 다녀올게요!”
엠마는 걱정하지 말고 편히 계시라며 나를 안심시키고는 서둘러 방을 나섰다.
여러 번 해 봐 이런 일에는 자신 있다며 주먹을 불끈 쥐는 엠마에 마음이 놓일 뿐이었다.
* * *
낚시는 9할이 기다림이라 했던가?
그러나 그 말도 모르간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우리 집 물고기는 뭐가 그리도 급했는지 미끼를 던지자마자 물어 버렸다.
“하?”
모르간의 시녀를 매수한 그날 밤.
엠마가 가져온 편지를 확인한 나는 흘러나오는 헛웃음을 막을 수 없었다.
“공녀님, 왜 그러세요? 뭐라고 쓰여 있나요?”
엠마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편지지를 곁눈질했다.
“자, 봐봐.”
편지를 넘기자 엠마가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모르간이라면 아르세르에게 말을 전할 거라 생각은 했었지만, 이렇게 아무런 고민도 없이 바로 전할 줄이야.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영애의 뒷조사를 하는 것 같더군요. 두 사람이 친한 줄만 알았는데 말이죠. 저희 가문의 아이지만 도통 속을 알 수 없는 아이입니다. 너무 그 아이를 믿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엠마가 날 흘긋거리며 눈치를 살폈다.
“정확히 영애의 뭘 알아보는 건지 제가 더 알아보고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너무 걱정하지 마십시오?”
끝내 엠마는 황당한 듯 말끝을 높였다.
“도련님도 참. 그 영애와 알면 얼마나 알았다고.”
엠마가 질린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만약 공녀님의 행동이 틀렸다고 생각되셨다면 먼저 타일러 보셔야 하는 거 아니에요? 어떻게 공녀님께는 말 한마디 없이 쏠랑 로드리게즈 영애께.”
엠마가 말을 하며 흘긋 내 눈치를 살폈다.
아무래도 가족에게 통수를 맞은 날 걱정하는 듯했다.
“흐음….”
“…공녀님, 그래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엠마의 목소리에 걱정이 묻어났다.
“…어디까지 하나 좀 더 봐 보자.”
모르간이 아르세르를 위해 어디까지 할지 봐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성싶었다.
“엠마, 대신 편지 좀 하나 써 줘.”
“…그래도 될까요?”
“모르간이 먼저 시작한 일인걸.”
엠마는 하는 수 없다는 듯 펜과 종이를 가져와 앉았다.
“도련님이 아시면 크게 화내실 것 같은데. 정말 괜찮으세요?”
“아버지가 있으니까 괜찮아.”
“아버지, 공작님이요?”
“모르간의 만행을 아버지가 알게 된다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어.”
아르세르의 뒷조사는 나 혼자 한 게 아니었다.
게다가 헤라르일라 공작이 날 도와 아르세르를 조사한 이유는 그녀에게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빼앗기게 될까 봐였다.
아마 요즘 공작이 가장 욕심내고 있는 게 있다면 그건 단연코 로렌스 게르하르트일 테지.
비밀리에 행한 제 일을 남에게 전한 것도 화가 날 텐데 모르간 때문에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놓칠 뻔했다?
공작이 가만히 있을 리가 없었다.
엠마가 그제야 작게 탄식을 흘렸다.
“그렇네요. 그럼 전 뭐라고 쓸까요?”
펜을 바로잡은 엠마의 눈빛이 반짝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