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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59화 (59/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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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머리를 묶어 드릴까요?”

“아니. 오늘은 그냥 갈게.”

“아, 잠시만요. 그럼 머리띠라도 해 드릴게요.”

엠마가 서둘러 머리띠를 얹어 주었다.

“부디 잘 다녀오세요.”

“무슨, 그냥 차만 마시고 올 텐데 왜 이렇게 긴장했어?”

“후우. 공녀님이 그런 자리에 나가시는 건 처음이니까요.”

엠마가 제 가슴께에 손을 올리며 호흡을 가다듬었다.

“영애들이 공녀님께 그럴 리는 없지만, 만에 하나 괴롭히기라도 하면 어떻게 해요.”

말도 안 되는 걱정에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엠마, 그만 따라 나와.”

“마차가 출발하는 것까지만 볼게요.”

마치 다섯 살 난 아이를 챙기는 듯 구는 엠마였다.

“나 가 볼게.”

그런 엠마를 뒤로하고 마차에 올라타자 이윽고 말 울음소리와 함께 마차가 출발했다.

고개를 돌리자 창밖으로 손을 흔드는 엠마가 보였다.

그녀의 과한 걱정에 헛웃음이 나오려 했지만, 한껏 진지한 엠마에 입을 굳게 다물고 그녀를 향해 손을 흔들었다.

* * *

히이잉.

“공녀님, 도착했습니다.”

마부가 저택의 문을 열고 뭐라 말하자 사람들이 분주히 움직였고 곧 집사가 걸어 나왔다.

“공녀님, 티파티 장소로 모시겠습니다.”

클리네 백작가.

비옥한 영지를 소유한 가문답게 저택 곳곳에서 화려함이 엿보였다.

집사를 따라 몇 번 계단을 올랐을 때.

똑똑.

“아가씨, 헤라르일라 공녀님께서 오셨습니다.”

이윽고 굳게 닫힌 문이 열리고 길게 자리한 티테이블과 이미 자리에 착석해 있는 영애들이 눈에 들어왔다.

“헤라르일라 공녀님, 이렇게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클리네 영애. 저야말로 초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로드리게즈 영애가 공녀님께서는 못 오신다고 하셔서 단념하고 있었는데. 마음이 바뀌신 건가요?”

“네?”

갑작스러운 아르세르의 이름에 무슨 뜻이냐는 듯 클리네 영애를 바라보았다.

그리고 그 순간 먼 곳에 앉아 있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눈에 들어왔다.

“아….”

아르세르의 얼굴에서 당혹감이 엿보였다.

클리네 백작 영애는 제 티파티에 아무나 초대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엠마는 타운하우스를 소유한 귀족가의 자제들 중에서도 클리네 영애의 티파티에 초대되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고 말했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여기서 볼 줄이야.

아르세르는 나와 엠마의 예상보다도 훨씬 빠르고 수월히 수도의 사교계에 적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아르세르에 대한 의심에서 비롯된 반감에 마냥 그녀가 반갑지는 않았다.

“공녀님, 이쪽으로 와서 앉으세요.”

클리네 영애를 따라 자리에 앉으면서도 아르세르의 얼굴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여기서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만나리라고는 생각지 못한 이유도 있었지만, 그녀가 이상하리만치 당황했기 때문이었다.

뭐야? 왜 저래?

뭐 때문에 저렇게까지 놀란단 말인가.

한번 박힌 의심에 그조차 좋게 보이지 않았다.

“패트리샤. 아, 공녀님. 여기서 뵈니 더 반갑네요.”

이내 표정을 갈무리 지은 아르세르가 생긋 웃었다.

“그보다 정말 몸은 괜찮으세요? 그날 저도 그렇지만 소공작님께서도 많이 걱정하셨어요.”

“덕분에 괜찮아요.”

“저희 안 그래도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말하고 있었거든요.”

눈치를 살피던 클리네 영애가 입을 열었다.

“그보다 공녀님과 로드리게즈 영애는 어떻게 그리 친해지신 건가요?”

“그러게요. 두 분이서 전시회도 다니시고 함께 거리 축제도 다니셨다면서요?”

“아니, 소공작님도 함께 하셨다면서요?”

영애들은 뭐가 그리 궁금한지 답할 시간도 주지 않고 계속해서 질문을 퍼부었다.

“요새 세분이 사교계의 가장 뜨거운 관심사잖아요.”

뜨거운 관심사.

그간 영애들의 최대 관심사는 누가 뭐래도 로렌스 게르하르트였다.

누가 그의 마음에 들 수 있을지.

어떤 영애가 마침내 소공작을 사로잡게 될지에 관한 것들 말이다.

그런 로렌스 게르하르트와 엮인 영애들이니 관심을 갖는 건가?

그렇다면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클리네 영애의 티파티에 초대된 이유도 어느 정도 납득이 됐다.

우리 세 사람 사이에 있었던 일을 가장 세세히 말해 줄 수 있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당사자들일 테니 말이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이목을 끌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내 예상보다 영애들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 더 많은 관심을 보이는 듯했다.

“근데 로드리게즈 영애와 몇 번 만나보니 공녀님과 소공작님이 왜 영애를 좋아하는지 알 듯해요.”

“그러게요. 로드리게즈 영애처럼 착한 분이 있을 줄이야.”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는 영애들의 칭찬이 부끄러운 듯 입을 가리며 고개를 숙이면서도 흘긋 날 바라봤다.

“그보다 공녀님과 로드리게즈 영애는 서로 이름을 부르는 건가요?”

“아까 로드리게즈 영애가 그렇게 불렀잖아요.”

아르세르가 깜짝 놀란 듯 서둘러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공녀님, 혹시 기분 나쁘셨다면 죄송해요. 거리 축제에서 이름을 허락하시긴 했지만 아무래도 계속 공녀님의 이름을 부르는 건 아닌 것 같아요.”

“에이, 영애. 이미 허락하셨는데 뭘 그리 어려워하세요?”

“그러게요. 로드리게즈 영애는 배려심이 참 깊다니깐요.”

영애들의 말을 가만히 듣던 아르세르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녀님. 그래도 괜찮을까요?”

어쩐지 내키진 않았지만 내 눈치를 살피는 아르세르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감사해요.”

아르세르가 그제야 마음이 놓인다는 듯 환히 웃었다.

“…….”

사교계에 적응하기가 힘들다던 그녀의 말이 무색하리만치 아르세르는 이미 영애들과 친분을 쌓은 듯 보였다.

게다가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녀에게 호의적이었고.

사교계에선 어떻게 행동할지 궁금했는데 내 앞에서 보이는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여전히 잘 웃었고 내게 친근하게 다가왔다.

“패트리샤. 저희 영지에서 유명한 소화에 좋은 약이 있는데 괜찮으시다면 전해 드려도 될까요?”

“…네. 그럼 저야 고맙죠.”

그때 다른 영애가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공녀님, 소화가 잘 안 되세요?”

“축제 날 배탈 나신 것 같더라고요. 그래서 패트리샤는 중간에 돌아가셨어요. 같이 불꽃 축제도 보고 뱃놀이도 하고 싶었는데 아쉬웠죠.”

순간 영애들이 안타깝다는 듯 날 바라봤다.

“원래는 그러지 않는데 그날은 몸이 좀 안 좋았나 봐요.”

영애들은 저마다 속에 좋은 차를 이것저것 알려 주었다.

“그럼 원래 오늘 오지 않으시려던 이유도 몸이 안 좋으셔서인가요?”

“네? 그게 무슨….”

클리네 영애에게 무슨 말이냐 되물었지만, 대답은 엉뚱하게도 아르세르에게서 나왔다.

“아무래도 몸이 좋지 않을 때는 조심하는 편이 좋잖아요. 혹시나 또 패트리샤의 건강이 악화되면 안 되니깐요.”

“하긴, 그건 그래요. 무엇보다 건강이 우선이니깐요.”

그 둘의 대화는 마치 내가 클리네 영애의 티파티에 오지 않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던 것처럼 흘러가고 있었다.

나는 대체 두 사람의 대화를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내가 미처 입을 열기도 전에 아르세르가 입을 열었다.

“오늘 패트리샤가 티파티에 나와 너무 기뻐요. 정말이지 수도에 올라와 패트리샤와 영애들처럼 좋은 분을 만나 얼마나 기쁜지 몰라요.”

아르세르는 잠시 머뭇거리다 입을 열었다.

“영애들과 쉽게 친해지지 못할까 봐 걱정을 많이 했거든요. 다 패트리샤 덕분인 것 같아요. 먼저 다가와 챙겨 주셔서 감사해요.”

그 순수한 감사 인사에 나는 순간 할 말을 잃고 말았다.

아르세르가 언젠가 내게 털어놨던 고민이었다.

사람들 앞에서 제 약점을 말하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음에도, 아르세르는 또다시 진실되게 말하고 있었다.

아르세르가 다른 영애들 앞에서는 뭔가 다를 거라 생각했던 것과 달리 결국 아르세르는 내 앞에서도, 영애들 앞에서도 진실됐다.

아르세르의 눈물 때문일까?

순간 가슴 안쪽이 콕콕 따끔거렸다.

“어머, 영애 울어요?”

“아니, 죄송해요. 그간 마음고생이 조금 심했었나 봐요.”

무안한 듯 서둘러 웃음 짓는 아르세르에 어쩌면 내가 너무 예민한 거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는 지금껏 단 한 번도 내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준 적이 없었다.

그녀에 관한 모든 의심들은 그저 증거 없는 내 추측일 뿐이었고.

안 그래도 익숙지 않은 상황에서 힘겹게 적응하고 있는 사람을 괜히 내가 들쑤시는 건가?

심란해진 탓에 내 앞에 놓인 찻잔을 집어 들었다.

아르세르의 목적이 정말 로렌스 게르하르트를 내게서 빼앗는 것이었을까?

그 과정에서 내게 해를 가하려 했을까?

내게 보여 줬던 모습과 아르세르의 속내가 정말 다를까?

어쩌면 그냥 보이는 대로만 보면 되는 거 아닐까?

막상 고맙다며 우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마주하니 그간 해 왔던 일들이 모두 부질없이 느껴졌다.

“정말 감사해요.”

이렇게 고맙다는 사람을.

몰래 조사하고, 의심하고.

결국 그녀는 내게 아무런 해도 미치지 않았고 결국 그녀를 향한 모든 의심도 내 추측일 뿐이었다.

손수건으로 가볍게 눈물을 훔치는 아르세르에 나는 의미 없이 찻잔만 기울일 뿐이었다.

그녀의 눈물에 그간 괜히 의심했던 게, 오늘 만나 반갑게 인사하지 않고 밉게만 봤던 게 미안해질 뿐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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