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60화 (60/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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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녀님, 잘 다녀오셨어요?”

클리네 영애의 저택에서 돌아오자마자 엠마가 나를 반겼다.

“영애들과 티파티는 재밌으셨나요?”

“응.”

“대화는 잘하셨어요? 마음에 안 드시는 건 없었고요?”

그녀는 뭐가 그리 궁금한지 쉬지 않고 질문을 해 댔다.

“잘 다녀왔어. 대화도 재미있었고.”

“로드리게즈 영애와 관련된 얘기는 좀 들으셨어요?”

“…티파티에서 만났어.”

순간 엠마가 미간을 찌푸렸다.

“클리네 영애의 티파티에 로드리게즈 영애가 왔다고요?”

“응. 반갑게 인사하더라.”

“클리네 영애가 로드리게즈 영애를 왜 초대한 거죠?”

나는 별 관심 없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근데 엠마, 그간 내가 너무 예민했던 것 같아.”

“네? 그게 무슨?”

“로드리게즈 영애가 나 덕분에 잘 적응할 수 있었다면서 고맙다고 울더라고. 생각해 보니까 그 영애가 내게 피해를 준 일도 없는데 괜히 혼자 예민했던 것 같아.”

엠마는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끝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게다가 내 앞에서 보였던 모습과 사교계에서 보이는 모습도 하나 다를바 없고. 평판도 좋아.”

“그럼 이제 어떻게 하실 생각이세요?”

“그냥 지내던 대로 지내야지.”

“그럼 티파티는 더 이상 안 나가실 건가요?”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입을 열었다.

“우선 약속 잡은 데까지만.”

그 말에 엠마가 안심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공자님의 편지를 확인하는 것도 그만두실 건가요? 공녀님이 티파티에 가셨던 동안 공자님이 로드리게즈 영애에게 보내려던 편지가 있긴 한데, 어떻게….”

“뭐? 그건 당연히 확인해야지.”

나는 고개를 세차게 저으며 엠마의 말을 끊었다.

아르세르는 아르세르였고 모르간은 모르간이었다.

모르간은 정말이지 내가 양심의 가책 없이 미워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어디 있다고?”

“지금 가져다드릴게요.”

엠마가 내 책상 가장 밑에 자리한 서랍 안에서 하얀 봉투를 꺼내왔다.

“공녀님, 여기요.”

“모르간이 이렇게 부지런할 줄이야.”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일주일만 일해 본 사람이라면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얼마나 게으른지 알 수 있었다.

게으름 피우느라 목욕도 일주일에 한 번씩 하는 모르간이.

헤라르일라 공작의 명도 제시간에 마치는 법이 없는 그가 아르세르와 관련된 일에는 놀라울 만큼 열심이었다.

“하?”

봉투를 찢어 그 안의 내용물을 확인 한 나는 기가 차 헛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편지지 안에 쌓여 있는 두 장의 종이는 공작이 내게 보여 주었던 로드리게즈 가문의 재정 상황을 나타낸 문서였다.

모르간이 아르세르에게 보내려던 편지에는 제가 공작의 집무실에서 어렵게 발견한 것이라는 말과 함께 아르세르를 향한 걱정의 말이 쓰여 있었다.

[아버지와 패트리샤가 영애의 가문에 대해서 어디까지 알아보려는 건지, 무슨 연유에서 조사하는 건지 알아내는 대로 바로 연락을 할 테니 영애는 아무 걱정할 것 없습니다.]

“얘가 진짜 어쩌려고 이래?”

“왜요? 공녀님, 이게 뭔데요?”

“모르간이 미쳐도 단단히 미쳤다는 증거.”

공작의 집무실에서 어렵게 발견했다며 애써 포장하고 있었지만, 결국은 공작의 집무실을 뒤져 공작의 문서에까지 손을 댄 것이었다.

모르간이 어디까지 할까 싶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까지 나올 줄이야.

기껏해야 사용인들에게 물어 말을 전할 줄 알았더니.

가주의 집무실을 뒤진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 모르간이라고 모르지 않을 테지.

그의 증상이 이 정도로 심각할 줄은 몰랐는데.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게 빠져도 아주 단단히 빠진 모양이었다.

“아주 혼자 세기의 사랑이지.”

나는 지난번에 챙겨 두었던 편지까지 집어 들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공녀님? 어디 가시는 거예요?”

“모르간한테.”

편지를 살짝 들어 보이자 엠마가 와락 미간을 찌푸리며 내 손을 잡았다.

“이걸 들고 공자님께 가신다고요?”

“응. 걘 죽었어.”

“말도 안 돼요. 공자님이 몰래 자신의 편지를 빼돌렸다는 걸 알게 되시면 경을 치실 거예요!”

엠마가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엠마. 대체 뭘 걱정하는 거야?”

지금 이 순간을 위해 모르간의 편지를 빼돌렸던 건데.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어 눈살을 찌푸렸다.

“공자님이 가만히 계실 리가 없잖아요.”

“엠마, 내가 지켜보고 있는 한 모르간은 이 일과 관련된 그 누구도 못 건드려. 잠깐만 기다리고 있어. 금방 끝날 테니까.”

이미 모르간의 목줄을 손에 쥔 것과 다름없는 상황에서 대체 무슨 걱정이 그리도 많은 건지 모를 엠마였다.

나는 깊은 한숨을 내뱉는 엠마를 뒤로 하고 모르간의 방을 향해 나섰다.

벌컥!

쾅!

얼마나 세차게 문을 열었던지 벽에 부딪힌 문이 만들어 낸 소음에 작게 어깨를 떨었다.

“악! 깜짝이야!”

모르간이 화들짝 놀라 파드득 손을 떨더니 나를 확인하고 얼굴을 있는 대로 와락 찌푸렸다.

“뭐야?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이게 대체 무슨 일이지?”

“뭐가?”

나도 놀랐으면서 애써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넌 예의도 없니? 노크도 없이 이게 무슨 무례야!”

“아, 매번 내 방에 들어올 때마다 이렇게 들어오길래. 나름 배려해 준 건데, 난 또 오라버니가 이런 방문을 선호하는 줄 알았지.”

한껏 비아냥대자 모르간의 얼굴이 점점 붉어졌다.

“하! 쓸데없이 시비 걸러 온 거면 당장 꺼져.”

모르간은 나와는 더 이상 대화하기도 싫다는 듯 휙 하고 고개를 돌렸다.

“너같이 뒤가 구린 계집과는 더 이상 한 곳에 있기도 싫으니 당장 나가.”

어째 평소보다 더 사나운 게 내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를 건드려 심기가 불편한 모양이었다.

“정말 나가도 되겠어?”

“뭐?”

“나 아버지께 가던 길이었거든.”

살랑.

손에 들고 있던 편지지를 가볍게 흔들자 모르간이 고개를 내뺀 채 미간을 찌푸렸다.

“어쩌라는 거지?”

“어머, 이게 뭔지 모르는 모양이구나. 오라버니가 로드리게즈 영애한테 보내려던 편지잖아.”

그 순간 모르간이 허둥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서둘러 내게 다가오려는 듯한 모르간에 손을 들어 그를 제지했다.

“앉아.”

“자, 잠깐. 네가 그걸 왜 갖고 있는 거지?”

모르간은 당황한 듯 말을 더듬으면서도 엉거주춤 자리에 앉았다.

“아니. 오라버니, 아버지 집무실을 뒤졌더라? 내가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무, 무슨 소리야!”

“이거 봐봐. 그리고 편지에 친절히 쓰여 있던데?”

그가 정성스레 접어 봉투에 넣었던 문서를 발견했는지 모르간의 눈빛이 잘게 흔들렸다.

“나도 이렇게 놀랐는데 아버지는 얼마나 충격적이실까? 영애 하나 때문에 말을 옮기는 것도 모자라 집무실을 뒤져 문서까지 손대다니.”

한심하다는 듯 고개를 절레절레 젓자 모르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네가 왜 그걸 갖고 있는 거냐고!”

“후우. 딱 보면 몰라? 내가 중간에서 가로챈 거잖아.”

답답하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채 고개를 내젓자 모르간이 멍하니 입을 벌렸다.

“지, 지금 내 편지를 훔쳤다는 거야?”

“야. 지금 그게 중요해?”

“뭐, 뭐? 남의 걸 훔쳐보고 뭘 그리 당당한….”

모르간은 당당하게 나오는 내가 황당한 듯했으나 나는 그런 그의 행동이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아직도 상황 파악이 안 되나?

아직 내게 큰소리칠 수 있다는 게 놀라울 뿐이었다.

“만난 지 한 달도 안 된 영애 때문에 아버지와 동생을 배신한다? 오라버니 때문에 내가 얼마나 상처받았는지 알아?”

나는 크게 한숨을 내쉬고는 마른 눈 밑을 쓸어내렸다.

“나는 그렇다고 쳐. 근데 아버지는 정말 가만히 계시지 않을걸?”

“…자, 잠깐. 패트리샤. 뭔가 오해를 한 모양이구나.”

잠시 고민하는 듯하던 모르간이 서둘러 제 손바닥을 내보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 그 편지는 말이지. 그게, 그러니까….”

모르간은 아르세르에게 보내려던 편지를 어떻게든 무마하고 싶은지 이런저런 변명을 떠올리려 애를 썼다.

“내가 무슨 오해를 했단 말이야?”

“…그게.”

“오라버니가 나와 아버지를 배신했다는 거?”

“배신이라니! 말도 안 돼. 그래, 사실 나도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이상하다고 생각했어. 나는 이중 첩자 역할을 하려 했던 거야! 그래, 배신이라니 말도 안 돼.”

모르간의 새하얗게 질린 얼굴 위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리고 있었다.

금방이라도 눈물을 흘릴 듯 울먹이는 그 모습이 불쌍해 보일 만도 했건만 모르간은 내게서 어떤 동정심도 끌어내지 못했다.

그간 그에게 받아 왔던 수모와 비난이 떠오를 뿐이었다.

“이중 첩자? 누굴 바보로 아는 거야?”

그러게 가만히 있을 때 건드리지 말았어야지.

“후우. 너는 진짜 안 되겠다. 잘못을 시인할 마지막 기회를 줬는데도 이렇게 차 버리는구나?”

내 입술이 비뚜름하게 올라갈수록 모르간의 얼굴은 생기 하나 없이 더욱 창백해져 갈 뿐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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