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61화 (61/67)

61

“과거 어떤 백작가의 영식은 가문의 문서를 빼돌리다가 목이 잘렸다지?”

“…패트리샤.”

두려움이 모르간의 얼굴 위로 드리웠다.

“에이, 오라버니. 그래도 너무 걱정하지는 마.”

일부러 목소리의 톤을 반쯤 올리자 모르간이 기대에 찬 멍청한 낯을 하고 날 바라봤다.

그러나 이어지는 말에 모르간의 기대는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설마 아버지가 오라버니 목을 건드리시겠어?”

제 미래를 상상하기라도 했는지 모르간의 얼굴이 순식간에 창백해졌다.

가랑가랑 차 있던 모르간의 눈물이 기어코 주르륵 흘러내렸다.

“…울어?”

나 못지않게 모르간도 당황한 듯 그는 허둥거리며 제 얼굴을 닦아 냈다.

…뭐야.

절로 찌푸려지는 얼굴을 숨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나는 뒤로 물러났다.

“….”

아니, 뭘 울기까지 한단 말인가.

성격도 고약하고 제 이득밖에 모르면서 겁까지 많다니.

최악. 정말이지 이보다 최악일 수 없었다.

“잠, 잠깐만. 패트리샤, 아, 아버지께는 제발 말하지 말아 줘.”

“…내가 왜?”

“…뭐?”

“내가 왜 그래야 하냐고.”

사실 모르간을 협박해서 얻을 수 있는 건 크게 없었다.

친절해진 사용인들과 내가 원하는 것이라면 뭐든 들어주려는 공작.

이미 약속받은 내 소유의 저택도 있었고 자유가 보장된 미래도 있었다.

지금의 난 더 이상 갖고 싶은 것도 욕심이 날 것도 없었다.

다시 말해 모르간을 통해 얻고 싶은 게 없다는 말이었다.

되려 모르간의 만행을 공작에게 알려 그가 된통 깨지는 걸 보는 것이 나로서는 더 기대되는 일이었다.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아버지가 알면 날 가만두지 않으실 거야.”

“지금. 부탁하는 거야?”

그 물음에 뭔가 생각하는 듯 모르간의 젖은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다.

그러고는 이내 모르간의 무릎이 스르륵 내려가 땅에 닿았다.

“제발. 제발 부탁할게.”

“뭘 또 무릎까지 꿇어?”

무슨 대단한 결심이라도 한 듯 무릎을 꿇은 모르간이었지만 내겐 별로 와닿지 않는 행동이었다.

되려 부담스럽기만 할 뿐이었다.

“부담스럽게 하지 말고 일어나.”

“…알겠어.”

내 말이 끝나자마자 모르간이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간 내가 무슨 말을 해도 귓등으로도 듣지 않던 모르간이 이토록 상대의 말에 순종적일 수 있단 사실이 놀라웠다.

자리에서 일어난 모르간은 한껏 불안해 보이는 눈으로 날 살폈다.

혹 내가 금방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가 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운 듯.

“근데 오라버니. 아무리 생각해 봐도 맨입으로 부탁하는 건 아니지 않아?”

“…뭘 원하는데?”

자신감 없는 목소리였다.

하기야 그가 무릎을 꿇었던 이유도 이 때문이었을 테지.

그는 내가 원하는 걸 줄 수 없었다.

“나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있긴 하고? 오라버니가 구할 수 있는 건 나도 다 구할 수 있는 것일 텐데 말이야.”

내게는 헤라르일라 공작이 있었다.

어차피 모르간이 무엇을 주든 그건 결국 나도 공작을 통해 구할 수 있는 것들이었다.

“내가 굳이 오라버니를 통해 얻어야 하는 게 있어?”

“…아니.”

모르간이 순순히 고개를 저었다.

“그래도, 패트리샤. 내가, 내가 이렇게 부탁할게.”

“결국 내 아량을 바라는 거네?”

“제발 부탁할게.”

간절히 부탁하는 모르간에게선 오랜 시간 나를 향하고 있던 부정적인 감정이 사라진 채였다.

“흐음, 근데 오라버니는 나 싫어하잖아. 아니야?”

모르간은 한참 동안 입을 움찔거리더니 결국 아무런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떨궜다.

그래도 일말의 양심은 있는지 공작처럼 거짓을 뱉지는 않는 모르간을 잠시 바라보다 입을 열었다.

“그간 오라버니가 날 어떻게 대했는지 잊은 건 아니지? 무시는 기본에, 조금이라도 성질을 건드리면 윽박질렀잖아. 게다가 전에는 날 때리려고까지 했어. 아마 집사가 끼어들지 않았다면 정말 맞았겠지?”

“….”

“그런데 이제 와서 상황을 헤아려 달라고 부탁하는 게 가당키나 해?”

가족, 남매라는 관계로 묶여 있었지만, 모르간은 날 증오했다.

그래, 원치 않았던 배다른 동생. 그런 내가 싫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모르간의 행동은 도가 지나쳤다.

그에게 난 화풀이 대상일 뿐이었으니.

모르간이 그처럼 내게 막 대할 수 있었던 이유는 내가 전혀 두렵지 않아서겠지.

내겐 그에게 대들 힘도 없었으니 말이다.

“오라버니.”

숙이고 있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린 모르간과 눈이 마주쳤다.

차라리 모르간의 눈빛에 한결같은 증오가 담겨 있었다면 난 그를 이해해 보려 노력했을지도 모른다.

패트리샤가 공작저에 들어오고 얼마 못 가 생을 마감한 공작 부인.

제 엄마를 잃었다는 슬픔에 패트리샤를 미워하고 그간 못되게 군 것이라면.

나는 아직 어린 모르간을 이해해 보려 애썼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모르간은 협박 한 번에 순한 양이 되었다.

결국 모르간이 내게 모질 게 군건 내가 만만했기 때문이었다.

모르간이 그런 사람이라면 나도 그에 맞게 움직이면 될 일이었다.

괴롭힘당하지 않는 법. 만만해 보이지 않는 법.

결국 당한 대로 갚아 주면 될 일이었다.

다시는 만만하게 보지 못하도록.

“나 그렇게까지 착하게 굴 생각은 없어.”

“…패트리샤. 제발, 이렇게 부탁할게.”

서늘한 음성에 모르간은 참지 못하고 다시 눈물을 흘렸다.

어느새 모르간의 얼굴은 눈물범벅이 되어 있었다.

“아버지가 알게 되면 정말 날 쫓아내실 거야.”

“난 이미 한번 쫓겨나 봤잖아.”

별일 아니라는 듯 내가 작게 어깨를 으쓱이자 모르간이 당황한 듯 다시금 입을 열었다.

“흐윽, 흐극. 작위도 내가 아닌 동생들에게 넘기실 거야.”

그래서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 있는지 묻고 싶었지만 하도 서럽게 우는 모르간에 그냥 입을 다물었다.

“내가 잠도 안 자 가며 아버지께 인정받으려고 열심인 거 너도 알지?”

대충 고개를 끄덕이니 모르간이 제게 드리울 앞날을 꺼내 놓았다.

아무래도 동정이라도 얻고 싶은 모양이었다.

“아버지가 얼마나 매정한 분이신지 너도 잘 알잖아. 아버지께 버림받으면 결국 밀럼과 바버도 날 무시할 거야.”

하지만 두려운 듯한 모르간의 애원에도 동정심은 생기지 않았다.

모르간이 원하는 대로 동정해 줄 수는 없었지만, 큰맘 먹고 그에게 현실을 알려,주기로 했다.

먼저 그 길을 걸어 본 선배로서 베푸는 정 같은 거랄까?

“그래서 그게 끝일 것 같아?”

“뭐?”

모르간이 눈을 끔뻑거릴 때마다 가득 고인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결국 사용인들에게까지 무시 받을걸? 이 저택에서 그 누구도 오라버니의 말을 들어 주지 않을 테고, 아무도 말을 걸지 않을 테지. 그간 내가 당했던 것처럼 말이야.”

모르간은 당황한 듯 입을 움찔거렸으나 끝내 지금 해야 할 마땅한 말을 찾지 못한 듯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모르간 헤라르일라. 내게 도움을 바란다는 것 자체가 우스운 일이지만, 정말 내 도움을 받고 싶다면 진심 어린 사과가 먼저야.”

“…..”

“오래 기다릴 생각은 없어. 빈말뿐인 사과도 필요 없고.”

내가 벽시계를 가리키자 모르간의 고개가 내 손끝을 따라 움직였다.

“딱 삼십 분까지 기다릴 거야. 쫓겨나기 싫다면 내 마음을 돌릴 만한 사과를 준비해 와.”

“…응, 알았어.”

모르간이 성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괜히 이번 일로 사용인을 잡을 생각은 하지는 않는 게 좋을 거야. 그냥 조용히 넘어가.”

모르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축 처진 모르간을 가만히 바라보다 그의 방에서 나왔다.

* * *

저벅저벅.

모르간의 방에서 나와 복도를 걸으며 나는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앞으로도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저렇게만 군다면 굳이 그의 만행을 공작에게까지 알릴 이유는 없었다.

딱히 모르간이 내게 도움이 되는 일 따위는 없을 것 같지만, 어쨌거나 그에게 미움을 사서 좋을 일도 없을 테니 말이다.

게다가 모르간의 약점을 손에 쥐고 있어야 그를 통제하기도 쉬웠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의 뒷조사를 한 게 그녀의 귀에 들어가면 좋을 일이 없었기에.

“…공녀님, 모르간 공자님께 갔다 오신 거예요?”

“응.”

“도련님이 뭐라고 하셨나요? 화가 많이 나셨을까요?”

“괜찮아. 그냥 조용히 넘어가기로 했거든.”

여전히 불안해 보이는 엠마에 서둘러 설명을 덧붙였다.

“아버지께 이르겠다고 협박했거든. 그랬더니 화를 내지는 못하더라고.”

“…다행이네요.”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엠마, 혹 모르간이 너나 제 담당 시녀를 건드리면 바로 말해 줘. 알았지?”

“네.”

엠마는 그렇게까지 확인을 받고 나서야 마음이 놓이는 듯 한껏 걱정을 담고 있던 목소리가 다시 평상시로 돌아왔다.

“그러면 도련님은 이제….”

엠마가 잠시 눈을 도르륵 굴렸다.

“로드리게즈 영애와 연락하지 않으신다고 하시던가요? 혹시 말만 그렇게 하시는 건 아닐까요?”

엠마의 걱정 섞인 물음에 나는 눈만 깜빡이며 그녀를 바라보았다.

이제 보니 엠마는 지금의 상황이 어떻게 흘러가는 것인지 조금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듯했다.

모든 상황을 다 지켜보았으면서 왜 엉뚱한 소리를 하는 건지 이해할 수 없었지만, 나는 설명을 포기한 채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엠마, 곧 있으면 모르간이 찾아올 거야.”

“모르간 도련님이요?”

순간 엠마가 화들짝 놀라며 문을 바라보았다.

“그, 그럼 저는….”

“나가 있을래? 편할 대로 해.”

아무래도 모르간의 눈에 띄는 게 두려운 듯한 엠마에 다시 입을 열자 엠마가 세차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저는 나가 있을게요. 도련님은 언제까지 이 방에 계시는 거예요?”

“잠깐일 것 같기는 한데. 저녁 식사 전까지는 돌아올 필요 없어.”

엠마는 불안한 듯 여러 번 시계를 흘긋거렸다.

“어서 나가 봐.”

그렇게 허락이 떨어지고 나서야 호다닥 방을 나서는 엠마였다.

혼자 남은 나는 엠마가 나간 문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아니, 엠마는 왜 저러지?

신분 차이 때문인지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 건지 잘 모르겠지만 엠마에게 모르간은 아직도 어렵고 무서운 존재인 듯했다.

겁이 많은 성격인 건가?

왜 때문인지 아직도 모르간을 무서워하는 엠마에 미간을 찌푸린 채 생각에 잠겼을 무렵.

똑똑.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