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
“패트리샤, 나야. 모르간.”
생각보다 일찍 찾아온 모르간에 시간을 확인했다.
모르간도 간절하긴 했는지 제게 주어진 시간이 다 가기 전에 다시 날 찾아왔다.
“…들어가도 될까?”
모르간이 내 방을 찾아오며 노크를 할 줄이야. 내 방에 들어오기 전 허락을 구할 줄이야.
“…패트리샤?”
다시 한번 들려오는 애절한 모르간의 목소리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들어와.”
허락이 떨어졌음에도 방문은 한없이 느리게 열렸다.
모르간은 반쯤 문을 연 채 한껏 내 눈치를 살피며 슬금슬금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러다 내가 미간을 찌푸리자 놀란 듯 허둥거렸다.
탁.
드디어 문이 닫히고 모르간은 한참 동안 벽에 딱 붙어 머뭇거렸다.
무거운 침묵만이 방안을 가득 메우던 그때.
“패트리샤, 정말 미안해.”
모르간이 힘겹게 입을 열었다.
“그간 내가 네게 좋은 오라비가 아니었다는 거 알고 있어.”
평소와 달리 모르간의 목소리가 한껏 무거웠다.
“정말 미안해.”
“….”
“미안해.”
그러나 무거워진 목소리와 미안하다 말하는 그 사과 속에서도 진심은 느낄 수 없었다.
모르간이 내게 찾아와 사과하는 이유가 지금의 상황을 모면하기 위함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앞으로는?”
“응?”
그렇지만 이쯤하고 용서해 주기로 했다.
어쨌거나 헤라르일라 공작이 가장 좋아하는 자식은 모르간이니.
모르간은 무서워하고 있었지만, 그가 두려워하는 대로 후계자라는 제 자리를 빼앗길 일은 없을 듯했다.
게다가 정말 헤라르일라 공작에게 모르간의 만행을 일러 그가 후계자 자리에서 밀려난다거나, 단순히 혼나는 거로 끝난다고 해도 그는 내게 앙심을 품을 것이다.
…어렵게 구축한 내 일상을 깨트릴 수는 없었다.
모르간 헤라르일라가 괜히 복수한답시고 설쳐 대는 것보다야.
제 잘못을 용서해 준 내게 고마워하는 편이 더 좋을 듯했다.
어쨌거나 통제 가능한 선 안에 모르간을 두는 편이 편했다.
“앞으로는 어떻게 할 거냐고.”
모르간이 빠르게 눈을 껌뻑거렸다.
“내가 조심할게. 네가 기분 나쁘지 않도록 말야. 내가, 내가 잘할게.”
“흐음, 그래. 그렇게 하자.”
모르간의 뺨을 따라 다시 한번 눈물이 흘러내렸다.
“전처럼 행동하지만 않는다면 이번 일은 그냥 넘어가 줄게.”
“흑, 흐윽. 고마워.”
“오라버니. 뭘 또 울어. 가족끼리 용서해 줄 수도 있는 거지, 뭐.”
자리에서 일어나 모르간을 향해 걸어간 나는 가볍게 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나보다 키가 큰 모르간이 어깨를 한껏 웅크린 채 눈물을 닦아 냈다.
“이제 그만 울고.”
모르간이 멍청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끼익.
“나가.”
“…어?”
“할 일도 많고 바쁠 텐데 그만 나가 보라고.”
“아….”
내가 반쯤 연 문을 턱짓하자 그제야 고개를 끄덕인 모르간이 문을 잡았다.
“고마워, 패트리샤.”
그는 문을 닫기 전 다시 한번 고마움을 전했다.
* * *
모르간과의 그러한 일이 있은 지 삼 일쯤 지났을까?
그 주 금요일. 티파티에서 돌아오니 예상치 못한 손님이 기다리고 있었다.
저벅저벅.
헤라르일라 공작을 만나러 왔다가 내게 할 말이 있다며 응접실에서 삼십 분째 기다리고 있다는 로렌스 게르하르트에 걸음을 재촉했다.
대체 뭘 말하려고 그 긴 시간을 기다렸단 말인가.
똑똑.
응접실의 문이 열리고 로렌스의 검은 머리칼이 눈에 들어왔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그가 문이 열리는 소리에 얼굴을 들었다.
문을 연 이가 나라는 것을 확인한 그가 다시금 고개를 돌렸다.
“저를 찾으셨다고요?”
“응. 전할 게 있어서.”
차를 마시는 로렌스는 어딘지 피곤해 보였다.
“피곤해 보이시네요?”
크게 체했던 그 날 이후로 이주일 만인가?
오랜만에 만난 로렌스의 눈 밑에는 짙은 다크서클이 자리했다.
내 걱정 섞인 물음이 의외였던지 로렌스가 오른쪽 눈썹을 살짝 들어 올렸다.
그러다 별일 아니라는 듯 어깨를 움직였다.
“일이 많았어.”
“잠도 못 주무시는 거예요? 눈 밑에….”
로렌스가 눈썹 부근을 가볍게 문지르더니 대화의 주제를 바꿨다.
“오늘은 카를로스 관련해서 할 말이 있어서.”
“아, 네.”
피곤해 보이는 로렌스에 어쩐지 이 시간을 길게 끌면 안 될 것만 같아 서둘러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 가문의 기사단은 매해 시험을 봐. 시험에서 통과한 이들은 12월쯤부터 합숙 훈련을 시작하지.”
11월. 얼마 남지 않은 시간이었다.
아무래도 로렌스는 전에 알려 주겠다던 카를로스가 택할 수 있는 몇몇 날들을 전해 주기 위해 날 기다렸던 듯했다.
“사실 언제 들어와도 큰 상관은 없어. 애초에 카를로스는 시험을 통해 가문의 기사로서 들어오는 게 아니니 말야.”
애초에 편지로 부쳐도 될 내용이었는데.
잠도 못 잘 정도로 바빴다면서 왜 굳이 찾아온 거지?
“하지만 내 생각엔 신입들과 함께 훈련을 받는 게 카를로스 그에게도 좋을 것 같아. 검술에 재능은 있다지만 아직 체력적으로는 부족할 테니 말야.”
로렌스가 피곤한 듯 고개를 돌렸다.
“만약 11월에 그 아이를 보낼 생각이라면 일주일 내로 저택으로 편지를 부쳐. 만약 그게 아니라도 원하는 날을 적어서 한 달 내로 부치고.”
“네.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해요.”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찻잔을 비웠다.
금방 일어날 것 같은 로렌스에 서둘러 입을 열었다.
“근데 카를로스에게 왜 이렇게 잘해 주세요?”
“뭐?”
“편의도 많이 봐주시고 신경 써 주시잖아요.”
로렌스는 느리게 눈을 깜빡이더니 이내 입을 열었다.
“인재 양성 차원에서지. 직접 본 건 아니지만 그 정도 재능은 흔치 않아. 게다가 본인도 열심인 듯하고 말야.”
로렌스의 말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재 양성.
어쩌면 카를로스를 제 기사단에 영입하기로 마음을 바꾼 것일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헤라르일라 공작이 게르하르트 영지 내에 저택을 구했다더군.”
“아, 벌써 구하셨나 보네요.”
공작에게 미처 전해 듣지 못한 얘기였다.
“영지로 내려가는 건 언제쯤으로 생각 중이지?”
“다음 봄쯤?”
그때가 되면 게르하르트 저택의 준비가 완전히 끝나지 않을까 싶었다.
로렌스는 뭔가 아쉬운 듯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 그날은 먼저 가 버려서 죄송해요. 폭죽은 보셨어요?”
“봤지.”
“맛있는 것도 드셨고요?”
로렌스는 살짝 눈살을 찌푸린 채 나를 가만히 바라보더니 입을 열었다.
“공녀만큼은 못 먹은 듯싶은데.”
“그날 저 진짜 죽을 뻔했잖아요.”
로렌스가 황당하다는 듯 비웃더니 슬쩍 시선을 돌렸다.
“또 뭐 하셨어요?”
“배를 탔어.”
“나룻배요?”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중요한 걸 해내다니. 이제 보니 둘이 잘 놀았던 모양이었다.
이대로 몇 번만 더 만나면 아무런 문제 없이 두 사람의 연이 시작될 것 같았다.
“내일 아르세르 영애와 서커스를 보러 가기로 했는데.”
아르세르도 로렌스와 함께하고 싶은 눈치였었는데, 그럼 로렌스도 그날 같이 가는 건가?
“소공작님도 같이 가시는 건가요?”
“아니. 내일 영지로 내려가야 해서 시간이 없을 것 같군.”
“게르하르트 영지에 가신다고요?”
로렌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꽤 오래 있다가 올라오시겠네요?”
게르하르트 영지까지 마차를 타고 쉬지 않고 간다 해도 나흘은 걸릴 일이었다.
말을 타고 달린다면야 조금 덜 걸리겠지만 오가는 시간만 거의 일주일이었다.
“3월까지는 그곳에 있을 것 같아.”
“아, 오래 머무시네요.”
로렌스는 작게 고개를 끄덕이더니 아차 싶은 듯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카를로스에 대한 편지는 그냥 수도의 공작저로 넣으면 돼. 그럼 집사가 영지로 붙일 테니 말야.”
나는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3월. 아마 그가 다시 수도로 올라올 때쯤이면 나는 게르하르트 공작저로 떠나겠지.
그렇게 되면 아마 한참 후에야 로렌스를 다시 만날 수 있을 테지.
어쩌면 오늘이 끝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다.
친구가 됐다지만 결국 변한 건 아무것도 없었다.
내가 그에게 편지를 부칠 수도, 그를 만나러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으니 말이다.
어쩐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친구가 아무런 소용이 없네요.”
“음?”
“아마 내년 별빛 무도회에서나 다시 만나게 될 것 같다고요. 물론 저희 둘 다 참석한다는 가정하에요.”
내가 게르하르트 영지로 내려간다면 수도의 사교계에 얼굴을 비출 일은 거의 없었다.
나는 아마 내년의 별빛 무도회에 참석하지 않을 테고.
“아쉽다고요.”
무슨 말을 하는지 모르겠다는 듯 미간을 찌푸린 로렌스에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며 말했다.
“소공작님이 다시 올라오실 때쯤 전 영지로 내려가니 이제 못 보잖아요.”
“수도에 있다고 우리가 퍽 자주 보지도 않았잖아.”
“그야 그렇지만….”
아쉬운 마음이 쉽게 사라지지 않았다.
그와 이렇게 멀어질 것만 같아 아쉬웠다. 이곳에 와 가장 의지한 로렌스와 멀어져야 한다니.
어미를 잃은 새가 된 기분이었다.
“아쉬워요.”
그때 로렌스가 웃음을 터뜨렸다.
“왜 웃으세요?”
“누가 보면 영영 못 만나는 줄 알겠어.”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우스운 고민이라는 듯 그렇게 한참을 웃다 시간을 확인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만 가 봐야겠어. 영지에 내려가기 전 마무리해야 할 일들이 있어서 말이야.”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였다.
“뭐, 그러시겠죠.”
나름 진지한 마음을 그렇게까지 비웃을 건 또 뭐란 말인가?
저 때문에 내 기분이 상했다는 걸 아는지 모르는지 로렌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향해 걷던 그는 갑작스레 멈춰서 뒤를 쫓던 날 바라봤다.
“할 말이 있으면 수도의 공작저로 편지를 부쳐. 그럼 집사가 내게 전해 줄 거야.”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퍽 할 말도 없어요.”
“….”
“뭘 봐요?”
로렌스는 내가 그러했듯 작게 어깨를 으쓱이더니 이내 다시 등을 돌렸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