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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63화 (63/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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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 전까지만 해도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그저 귀찮고 찌증 나는 여자일 뿐이었다.

제 아비와 형제들에게 조금이라도 애정을 받고 싶어 이리저리 눈치를 보며 헤실헤실 웃어 보이는 패트리샤.

거지처럼 애정을 구걸하는, 주인만 바라보는 개처럼 공작의 손만 바라보며 언젠가는 절 향한 애정이 떨어질 거라 기대하며 스스로 꼬리를 흔드는 개가 되길 택한 패트리샤.

그런 패트리샤가 참을 수 없이 한심하고 멍청해 짜증이 났다.

그딴 사랑이 뭐라고. 왜 그깟 사랑 때문에.

로렌스는 한낱 애정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없는 사람처럼 보이는 패트리샤가 한심했다.

패트리샤의 그러한 행동이 그토록 싫고 짜증 났던 건 아마 그녀가 저와 비슷한 처지였기 때문인 듯했다.

마치 사랑이 전부인 듯 행동하는 패트리샤가 제 자존심까지 건드린 모양이었다.

로렌스는 그런 패트리샤가 거북했지만, 그랬음에도 그날 제 생일파티에서 패트리샤를 도운 건 순전히 동정심 때문이었다.

패트리샤가 멍청하고 짜증 나긴 했지만.

그 어린것에게 모두가 너무하는 듯해서 대신 복수해준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날의 일 때문이었을까?

언제부터인가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제게 집착하기 시작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더니 어느 순간부터는 좋아한다며 사람을 귀찮게 했다.

로렌스를 바라보는 패트리샤의 그 보랏빛 눈동자는 항상 반쯤 정신이 나간 듯 보였다.

짙은 집착과 기분 나쁜 불안을 미처 다 숨기지 못했으니.

이번에도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그토록 귀찮게 구는 패트리샤를 문제 삼지 않고 그냥 내버려 둔 것은 그녀가 불쌍했기 때문이었다.

패트리샤가 미처 숨기지 못한 감정. 그 불안과 집착이 왜 생긴 것인지 알 것도 같았으니 말이다.

그저 제 가족에게 받지 못한 무언가를 제게 갈구하는 것이었다.

사랑, 안정, 인정 뭐 그 비슷한 것들일 테지.

그것도 아니면 저와 이어진다면 헤라르일라 공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거나.

분명 값싼 동정에서 시작된 관계였다.

매일같이 쫓아내도 지치지 않고 찾아오는 패트리샤와 그런 패트리샤를 그냥 내버려 둔 것은 분명 동정에서 시작된 관계였는데.

어느순간 로렌스도 패트리샤에게 집착하게 되었다.

우습고 쪽팔린 일이었다.

제가 언제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건지, 정확히 그 처음을 집어낼 수는 없었다.

제가 이런 마음을 갖고 있었다는 걸 깨달은 지도 얼마 되지 않았으니.

매일같이 쫓아내도 지치지 않고 찾아오는 패트리샤 헤라르일라.

저도 모르는 사이 언제부턴가 그런 패트리샤에게서 안정을 느끼고 있었다.

몇 시간을 기다리려도 얼굴 한번 보지 못하고 돌아가는 날이 대다수였음에도 패트리샤는 그다음 날 또다시 찾아왔다.

귀찮지도 않은지 그렇게 매일을 찾아왔다.

…부모에게 사랑받지 못한 아이들에게 공통적으로 심어지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아주 어린 시절 그런 생각을 했다.

아버지가 절 사랑하지 않는 건 제가 못났기 때문이라고.

꽤나 오랜 시간 그런 의심을 했다.

이젠 그게 제 잘못이 아니라는 걸 알았지만 때때로 이유를 알 수 없는 순간에 그런 의심이 툭툭 올라오곤 했다.

나는 사랑받을 자격이 없는 건 아닐까?

사랑받지 못할 사람인 건 아닐까?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저도 모르는 새 자리한 그 멍청한 의심과 의문의 반증이었다.

나도 사랑받을 수 있다는 증거.

밀어내도 밀어내도 다시 찾아오는 패트리샤의 일련의 행동들이 사랑 같았다.

아주 큰.

그래서 갑작스레 패트리샤가 게르하르트 공자저에 발길을 끊었을 때. 그녀가 한 달 동안이나 찾아 오지 않았던 그때 불안했던 건 그 때문이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한 달 만에 찾아왔던 날 햇빛 한가운데에 앉혀 놓았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더는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절 사랑하지 않는다고 말하던 하먼드에게 그 오랜 시간 더위를 참으며 절 기다리는 패트리샤를 보여 주고 싶었고, 그렇게 불안을 잠재우고 싶었다.

그러나 로렌스의 바람과 달리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변했고 더는 자신을 찾아오지 않았다.

그렇게 로렌스는 제가 뭘 원하는지도 모른 채 패트리샤 헤라르일라의 곁을 맴돌았다.

* * *

헤라르일라 공작저에서 나와 마차를 올라 탄 로렌스는 갑자기 떠오른 패트리샤의 얼굴에 웃음이 났다.

“아쉽다고요. 소공작님이 다시 올라오실 때쯤 전 영지로 내려가니 이제 못 보잖아요. 아쉬워요.”

일그러지던 눈가와 꾹 다문 입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 만날 수 있었음에도 마치 영영 못 만나는 사람처럼 아쉬워했다.

“푸흡.”

기어코 굳게 닫힌 입술을 비집고 나온 웃음에 로렌스는 서둘러 입을 막았다.

지금 이 순간 혼자있었기에 다행이지.

“크흠.”

이 모습을 다른 이들이 봤다면.

생각만 해도 최악이었다.

“후우….”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쓸데없는 생각을 털어 내기 위해 창밖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겹도록 봐 온 거리의 풍경들과 관심 없는 행인들.

결국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패트리샤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흘겨보던 것도, 마지막엔 톡 쏘아붙이던 것까지.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는 제가 떠나지 않길 바라는 걸까?

“아쉽다고요.”

패트리샤 헤라르일라가 내뱉은 그 말은 로렌스로서는 예상치 못한 말이었다. 제겐 연락도 하지 않던 그녀가 아쉬워하리라고는 생각지도 못했으니.

패트리샤는 종종 이런 식으로 로렌스를 놀라게 했다.

“저 때문에 화나셨어요?”

“저는 이런식으로 소공작님과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별빛 무도회에서도 그렇고, 오늘도 그렇고.

“저 많이 먹어서 체했나 봐요.”

…식은땀을 뻘뻘 흘리던 축제에서도 그랬고.

패트리샤는 항상 예상치 못한 상황에서 솔직히 다가왔다.

가식이나 자존심 같은 건 없는 사람처럼.

로렌스는 그런 패트리샤가 신기했다.

어쨌거나 로렌스는 패트리샤같은 사람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녀처럼 제 감정에 솔직하던 사람도, 자존심 세우지 않고 먼저 손을 내민 사람도 본 기억이 없었다.

제 감정을 드러내는 것은 뭣모르는 아주 어린 아이일 때이거나, 그게 아니면 멍청하고 어리석은 이들만 그렇게 하는 줄 알았다.

그러나 솔직하게 다가오던 패트리샤는 저보다 어른스러운 것도 같았고.

그런 패트리샤의 모습이 멍청하거나 어리석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 오히려 좋아 보였다.

“…아쉽다, 라.”

다른 사람들도 다 그렇게 제 마음에 솔직할까?

“…아쉽다고.”

자신은 결코 생각지도 못한 감정들을.

표현할 생각도 못 했던 감정들을.

저라면 결코 하지 못할 말.

패트리샤는 별거 아니라는 듯 솔직히 입 밖으로 내놓았다.

그럴 때면 로렌스는 깜짝 놀라 작은 탄식을 흘렸다.

결국 제 감정이었고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었기 때문이었다.

“역시 아쉽네.”

오늘도, 별빛 무도회에서도.

결국 제가 하고 싶었던 말이 그거였으니.

생각해 보니 영지로 내려갈 준비로 한창 바쁜 이때 굳이 시간을 내 찾아와 카를로스와 관련된 이야기를 전한 이유가.

아쉬워서였던 듯했다.

몇 달 동안 못 본다는 게 아쉬워서 찾아온 거구나.

“…흐음, 바본가?”

로렌스는 뒤늦게 깨달은 제 감정에 헛웃음을 흘렸다.

아쉬워서 여기까지 보러 와 놓고는 스스로 왜 온 지도 모르고 있었지 않았는가.

전 항상 이런 식이었다.

이런 식으로 뒤늦게 제 마음을 깨닫고는 했다.

패트리샤 헤라르일라를 통해 뒤늦게 말이다.

별빛 무도회에서도 패트리샤에게 필요 이상으로 화가 났다.

그냥 끊어 내면 그만이니 제가 그녀를 신경 쓸 이유도 화낼 필요도 없었는데 왜 때문인지 주체할 수 없이 짜증이 치솟고 화가 났다.

“저는 이런 식으로 소공작님과 멀어지고 싶지 않아요.”

우습게도 패트리샤가 그렇게 말하고 나서야 로렌스는 제가 왜 그렇게 짜증이 났던 건지 그제야 조금 감이 왔었고.

감정이 사그라들었다.

오늘도 왠지 마음이 이상하고 기분이 나빴는데 결국 그 이유가 아쉬워서였던 듯했다.

“푸흡, 진짜 이상하다니까.”

로렌스는 패트리샤가 이렇게 솔직하게 나올 때가 좋았다.

결코 꺼질 것 같지 않았던 짜증도 사그라들었고 거센 바람 부는 듯 어지러웠던 마음도 잠잠해지곤 했으니.

이럴 때면 기분이 좋았다.

원인 모를 기분의 이유를 찾아서였을까?

패트리샤가 저와 같은 마음이어서였을까?

제겐 감도 오지 않는 일이 패트리샤에겐 아무것도 아닌 듯했고 로렌스는 그런 패트리샤가 좋았다.

전에는 상상조차 할 수 없었건만 로렌스는 패트리샤와 보내는 시간이 꽤나 즐거웠다.

“…가지 말까?”

입가에 남은 미소 때문인지 잎사귀가 다 떨어지고 앙상한 가지만 남은 겨울의 날은 춥기만 했는데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분위기는 화창한 봄날, 흐드러지게 핀 봄꽃처럼 한껏 부드럽게 풀어졌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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