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4
커다란 창을 통해 이른 아침의 햇살이 방 안으로 들어 왔다.
눈이 부셔 이리저리 뒤척이던 나는 얼마 못 가 잠을 포기했다.
토요일.
오늘은 아르세르와 서커스를 보러 가자 약속한 날이었다.
로렌스가 제 영지로 내려가는 날이기도 했고.
“벌써 출발했겠지?”
어쩐지 맘이 불편했다.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제 아버지를 좋아할까?
소설 속에서도 읽은 적 없고 그에게 직접 물은 적도 없지만.
아마 아니지 않을까?
그 때문에 힘겨운 유년 시절을 보냈으니 말이다.
그러니까 나라면 그런 아버지가 미울 듯했다.
하지만 소설 속 유년 시절의 로렌스 게르하르트는 제 아버지를 원망하기보다도 절 탓하는 걸 택했다.
제 능력을 미워했고 그게 제 탓이라 생각했으니.
그렇다면 지금은. 지금도 제 탓이라 생각할까?
아버지가 불편하지는 않을까?
“음? 근데 왜….”
순간적으로 든 의문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생각해 보니 소설이 시작하던 시점부터는 게르하르트 공작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부터는 로렌스가 차기 공작이었는데.
그럼 로렌스의 아버지는 어떻게 된 거지?
똑똑.
“공녀님, 엠마입니다.”
이윽고 방문이 열리고 엠마가 들어왔다.
“어머, 벌써 일어나 계셨네요? 어쩐 일이세요?”
“아, 햇살이 밝아서.”
“햇살은 평소랑 똑같은 것 같은데. 잠 많은 우리 공녀님이 제가 깨우러 오기도 전에 일어나다니 놀라운 날이네요.”
어쩐지 놀리는 듯한 엠마에 나는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아침 식사하러 가셔야죠. 준비를 도울까요?”
“아냐, 괜찮아.”
작게 고개를 내저은 나는 머리를 빗어 내려갔다.
“오늘 오후에 아르세르 영애를 만나러 가시죠?”
“응.”
“에휴. 공녀님께서 그러시겠다면 하는 수 없죠.”
아직도 아르세르를 경계하는 듯한 엠마였다.
“처음엔 공녀님께서 아르세르 영애를 무작정 믿는 듯하셔서 걱정됐는데.”
“그런데?”
“이제 그건 아니잖아요.”
엠마가 작게 어깨를 으쓱이었다.
“저보다 그 영애를 더 가까이 보신 공녀님께서 친해지고 싶다면 뭐, 나름 괜찮은 사람인 거겠죠.”
엠마가 다가와 옷매무새를 다듬어 줬다.
그러다 책상 위에 놓인 편지를 발견하고는 그걸 집어 들었다.
“소공작님께 쓰신 편지네요? 오늘 부칠까요?”
“응. 편할 때 부쳐 줘.”
“이제 내려가실까요?”
“그래.”
엠마를 따라 계단을 내려가며 잠시 아르세르를 떠올렸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아직도 내게 아르세르는 너무 어려웠다.
어쨌거나 이해가 안 되는 부분이 있는 것도 사실이었으나 내가 아르세르의 뒷조사를 했던 이유가 그게 전부는 아닌 듯했다.
아르세르가 울던 그 날.
내가 그녀를 괴롭히는 것만 같아 마음이 무거웠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으나 그녀를 떠올릴 때면 마음이 복잡해지곤 했다.
“공녀님, 맛있게 드세요.”
어느새 다이닝룸 앞에 다 도착했는지 엠마가 문을 열어 주며 작게 웃었다.
“엠마, 너도.”
다이닝룸 안으로 들어서자 이미 앉아 있는 오라버니들이 보였다.
“패, 패트리샤. 잘 잤니?”
“응. ”
모르간이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인사를 건넸다.
“그거참 다행이구나.”
모르간이 밀럼과 바버를 돌아보자 그들도 아침 인사를 건넸다.
밀럼과 바버는 여전히 내게 말을 건네는 게 내키지 않은 듯했지만, 모르간의 명에 하는 수 없이 따랐다.
모르간은 그날 이후 한층 다정히 굴려 애썼다.
“오늘은 다른 약속은 없고?”
그 다정함이 애석게도 내게 약점이 잡혔기 때문인 듯했지만.
“아니. 오늘 아르세르 영애와 서커스를 보기로 했어.”
“아, 아르세르 영애와?”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간은 뭔가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했지만 이내 입을 꾸욱 다물었다.
아마 내가 아르세르에게 무슨 짓을 벌일까 걱정이 든 모양이었다.
그렇다고 내게 무슨 말을 할 처지도 못 되고.
“왜? 뭐 할 말 있어?”
“아, 아니야. 할 말은 무슨.”
모르간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냥 재밌게 놀다 오라고.”
“오라버니. 어차피 표정으로 다 보여. 할 말 있으면 그냥 해.”
어쭙잖게 속이려 드는 모르간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당황한 듯 허둥대더니 이내 고개를 숙였다.
모르간이 다시금 입을 열려던 그때, 다시 다이닝룸의 문이 열렸고 이내 공작이 들어왔다.
“밥 먹고 봐.”
나를 흘긋거리며 바라보는 모르간에게 짧게 속삭였다.
정말이지 그럴 의도는 아니었는데.
협박으로 들렸는지 그의 얼굴에서 식은땀이 삐질삐질 흘러내렸다.
* * *
똑똑.
“패, 패트리샤. 나야 모르간.”
나를 따라 다이닝룸에서 나온 건지 모르간이 방문을 두드렸다.
“지금 들어갈까? 아니면 좀 있다가 다시 찾아올까?”
“들어와.”
허락이 떨어지자 문이 조심스레 열렸다.
“왜 왔는데?”
“그, 네가 보자고 했잖아.”
“아, 할 말 있었잖아. 그거 하라고.”
“어? 어? 나 할 말 없는데?”
모르간이 세차게 고개를 저었다.
“내가 로드리게즈 영애 만난다니까 할 말 있었잖아.”
괜히 말을 늘이는 모르간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입을 열었다.
“그게. 그러니깐.”
그렇게 한참을 뜸 들이던 모르간의 입이 힘겹게 다음 말을 뱉어 냈다.
“너는 아르세르 영애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뭐?”
“아니, 아니. 내가 뭐라 하는 건 절대 아니야. 나는 그냥 궁금해서.”
이제 보니 모르간도 아르세르에게 어지간히 진심인 듯했다.
“…내가 그 영애를 뭘 어떻게 해. 그냥 친해져도 되는지 알아보는 거야.”
“친해져도 되는지?”
나는 별거 없다는 듯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간이 괜히 아르세르가 걱정된다 치고 괜한 짓 하면 곤란해지니 말이다.
“그보다, 오라버니는 아르세르 영애 좋아하지?”
“뭐?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뭘 그렇게까지 반응해?”
갑자기 큰소리치는 모르간에 미간을 찌푸리자 그가 서둘러 고개를 저었다.
“좋아하는 거 다 티 나.”
“…정말?”
내가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는 입을 열었다.
“근데 아마 포기하는 게 좋을 거야.”
“뭐? 왜?”
“영애는 이미 다른 사람을 좋아해.”
“뭐? 그게 누군데? 너한테 영애가 그렇게 말했어? 좋아하는 사람이 있다고?”
당황하던 모르간의 얼굴 위로 점차 기대감이 드리웠다.
아니, 어떤 부분에서 기대를 하는 거지?
“응. 근데 오라버니는 아니야.”
순간 들떠 있던 모르간의 얼굴이 처참히 무너졌다.
“마음고생할까 봐 알려 주는 거야.”
물론 거짓말이었다.
괜히 모르간이 아르세르에게 접근해 봐야 내게 좋은 일은 하나도 없었으니 진실을 알려 줄 뿐이었다.
괜히 걸리적거리지 않도록.
모르간은 상처받은 듯 눈을 축 내려뜨렸다.
“…응. 고마워.”
그렇게 고개를 몇 번 더 주억거리던 모르간은 이제 가 보겠다며 방을 나섰다,
* * *
서커스단 앞.
이제 곧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사람들이 북적이며 천막 안으로 자리를 옮겼다.
입구에서 떨어져 나와 주변을 두리번거릴 때.
“패트리샤!”
“아, 영애.”
머리를 하나로 올려 묶은 아르세르가 반가운 듯 웃으며 다가왔다.
곱게 접힌 눈과 봉긋하게 솟아오른 광대.
보기 좋게 벌어진 붉은 입술까지 어디 하나 예쁘지 않은 곳이 없었다.
“오늘도 먼저 오셨네요? 그보다 너무 기대되지 않아요? 재미있을 것 같아요!”
아르세르가 팔짱을 끼며 가볍게 붙어 왔다.
활짝 웃는 것도 그렇고 거리낌 없이 행동하는 것이 순진무구한 어린아이 같았다.
“무슨 생각 중이셨어요? 꽤나 집중하시던 것 같아서 아는 체해도 되나 잠깐 고민했어요.”
고민.
요새 내게 고민이 있다 하면 그건 바로 아르세르에 관한 것이었다.
물론 그녀의 행동들 중 의아한 부분들도 있었지만, 그건 그 무엇도 확신할 수 없는 의심일 뿐이었고.
눈앞의 아르세르는 언제나 친절했다.
“무슨 일 있으신 건 아니죠?”
아르세르가 걱정된다는 듯 고개를 모로 기울였다.
걱정을 닮은 눈빛.
“아무 일 없어요.”
나는 별일 아니라는 듯 고개를 내저었다.
대체 난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게 무얼 바라는 걸까?
“너는 아르세르 영애를 어떻게 할 생각이야?”
대체 왜 이 상황에서 그 멍청한 낯짝이 떠오르는지 답답할 뿐이었다.
마치 내가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게 못된 짓을 할 거라 이미 단정 지은 물음.
어이가 없었다.
대체 날 뭘로 보고.
나는 쓸데없는 사념을 떨쳐 내려 서둘러 화제를 돌렸다.
“영애, 머리핀이 잘 어울리네요.”
잔머리가 흘러내리지 않도록 고정한 핀을 가리키며 말하자 아르세르가 작게 웃었다.
“이거 소공작님께서 선물로 주신 건데. 잘 어울린다니 다행이네요.”
아르세르가 수줍음을 숨기려는 듯 작게 웃었다.
아르세르의 말에 나는 다시 그녀의 핀을 눈에 담았다.
“소공작님은 역시 보는 눈이 있으신 것 같아요.”
로렌스 게르하르트가 선물한 핀.
어쩐지 그 핀에서 쉽사리 시선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희 그만 들어갈까요?”
“네. 좋아요.”
“그보다 게르하르트 소공작님이 영지로 내려가셨다는 거 알고 계셨나요?”
아르세르를 따라 천막 안으로 들어서면서 착실히 고개를 끄덕였다.
곳곳에서 길을 밝히는 횃불과 한껏 흥을 돋우는 노랫소리.
쉽게 볼 수 없는 동물들이 코앞에 있었음에도 어쩐지 눈앞의 것들에 집중할 수 없었다.
아르세르의 입에서 나온 로렌스 게르하르트의 얘기에 기분이 이상했다.
두 사람은 벌써 개인적인 연락을 주고받는 사이가 된 걸까?
선물까지 주고받을 정도로 가까워진 걸까?
분명 내가 바라던 상황이 이거였을 텐데.
막상 로렌스와 아르세르 사이에 내가 모르는 얘기가 있다는 사실이 불편했다.
“…?”
아니, 이게 대체 무슨 개 같은 심보란 말인가.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