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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65화 (65/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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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을 헤집는 이 불편한 감정이 대체 뭐지?

나는 분명 로렌스와 아르세르를 엮어 주려 애쓰고 있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두 사람의 관계가 발전됐다는 얘기에 누구보다 기뻐해야 할 사람이 바로 나였다.

그게 바로 내가 원했던 상황이었으니 말이다.

“….”

그러나 아무리 그렇게 생각하고 기뻐하려 해도 마음은 내 뜻대로 따라 주지 않았다.

불편.

서운.

원치 않은 순간 마주한 나도 몰랐던 내 감정에 황당할 뿐이었다.

“미쳤나 봐.”

“네?”

“아, 서커스단 규모가 굉장하다고요. 하하하.”

이게 대체 무슨 심보지?

“….”

내가 대체 왜 불편함을 느낀단 말인가.

게다가 서운함?

내가 왜 서운해? 내가 대체 뭐가 서운해?!

“후우.”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이 살면서 처음 겪는 종류의 것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이 느낌은 마치 그때의 그것과 닮았다.

우리 집 뽀삐가 제 변 치우고 때 빼고 광내 주고 매일 시간 내 동네 이곳저곳 산책시켜 주는 나를 두고 저 심심할 때 간식 한번 던져 주는 언니를 택했을 때.

언니에게 다가가는 뽀삐의 궁둥이를 마주했을 때.

…그게 아니면 소풍 가는 날 같이 앉자 말했던 친구가 내게 말도 없이 다른 친구와 앉을 때?

“….”

내가 로렌스에게 뭔가를 바랄 수 있을 만큼 그를 위한 희생을 한 적이 있던가?

로렌스가 내게 기대할 만한 어떤 약속을 한 적은?

결국 로렌스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은 나는 그에게 뭔가 바랄 이유가 없었고.

내가 기대할 만한 그 어떤 약속도 하지 않은 로렌스에게는 그가 책임져야 할 그 무엇도 없었다.

희생과 보상심리에서 비롯한 서운함도 아니고 기대가 실망으로 바뀌었을 때의 서운함도 아니었다.

…내가 서운해할 이유가 없는데.

이 혼란스러운 마음을 다 처리하지도 못했는데 아르세르가 다시 한번 로렌스의 얘기를 꺼냈다.

“소공작님도 함께 왔다면 좋았을 텐데. 그렇죠?”

“그러게요.”

곧 있으면 공연이 시작되려는지 북소리는 점점 빨라져 갔고 그에 따라 머리도 점점 복잡해졌다.

“이제 곧 시작될 건가 봐요. 너무 떨려요.”

아르세르가 내 손을 잡으며 작게 속삭였다.

손이 잡힌 나는 그녀의 따듯한 온기와 부드러운 손에 그대로 굳어 버렸다.

원래 스킨십이 많은 아르세르였다.

그녀의 스킨십이 낯설긴 했지만 이렇게 불편한 적은 없었는데.

무척이나 불편했다.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어렵게 삼켜 낸 그때, 드디어 천막 안을 밝게 비추던 횃불이 꺼지고 얼굴 위로 어둠이 드리웠다.

아르세르는 드디어 시작한다며 작게 발을 굴렀고.

“…..”

애당초 로렌스 게르하르트, 그가 내 것이었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랬는데.

그런데 왜 빼앗긴 것만 같은 마음이 드는 걸까?

“…..”

아르세르가 불편했다.

로렌스를 빼앗기는 게 싫었다.

그를 소유하고 싶은 마음. 그에게 특별한 무언가가 되고 싶었던 마음에서 비롯된 서운함.

“…..”

아무래도 단단히 미친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자신했는데.

우습게도 결국 로렌스가 좋아졌나 보다.

별빛 무도회 때 내게 선을 긋던 로렌스를 마주했을 때도.

로렌스가 제 영지로 내려간다는 말을 들은 어제도 무척이나 아쉽고 서운했다.

결국 그와 멀어져야만 한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그럴 기미가 보일 때마다 이렇게 아쉬움이 짙은 걸 보면.

아무래도 내가 로렌스를 좋아하는 듯했다.

대체 언제부터였는지는 몰라도 여기까지 온 이상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지금 내가 느끼는 이 감정들을 설명할 길이 없었으니.

어쩌면 무의식중에 이렇게 되리라는 걸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를로스와 달리 로렌스 게르하르트에게만은 그렇게 선을 그었는지도 모르겠다.

“…..”

이러지 않으려 그렇게 선을 그었는데, 결국.

결국 그가 좋았다.

“혹 내가 도울 게 있으면 말해. 너 하나 정도는 도울 수 있으니까 말하라고.”

나를 생각해 주는 것도.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위해 주는 것도 무척 좋았다.

누구도 내게 관심 가져 주지 않던 그때.

익숙지 않은 세상에서 모든 걸 혼자 해내야 할 것 같던 그때.

도와주겠다던 로렌스의 말이 내게 얼마나 큰 의지가 되었는지 모른다.

집에서 쫓겨나 게르하르트 공작저를 찾아 간 그 날.

아무 말 없이 받아 준 그가 고마웠다.

“….”

내가 로렌스를 좋아한다.

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좋아한다는 이 마음을 깨닫고 얼굴을 붉히며 수줍어할 수 있었을까?

그러나 나는 이 로맨스 소설의 주인공이 아니었고.

좋아하는 마음을 깨달은 이의 수줍음 같은 감정의 사치가 내겐 허락되지 않았다.

로렌스를 좋아한다.

그 사실을 인정한 순간부터 기분이 바닥을 치기 시작했다.

깨달음과 동시에 접어야 할 무의미한 마음.

결국 로렌스의 모든 다정한 행동들과 배려가 내 것이 아니라는 걸 안다.

결국 그 모든 게 아르세르의 것임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아르세르가 수도로 올라온 이상 더는 내가 설 자리가 없다는 것도 알았다.

“….”

그래서 아르세르의 일에 더 예민하게 반응한 건 아닐까?

내게 아르세르 로드리게즈는 처음부터 불편한 사람이었다.

어쩌면.

그러니까 어쩌면, 나는 아르세르 로드리게즈가 나쁜 사람이길 바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녀가 나쁜 사람이라면 나도 마음껏 욕심내 볼 수 있을 테니.

아르세르의 뒷조사를 하며 어쩌면 바라고 있었던 건 아닐까?

그래서 그렇게 열심을 냈는지도 모르겠다.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의 사소한 행동들까지 다 의심해 가며.

그래서 그날.

티파티에서 아르세르가 울던 그 날.

그렇게 마음이 불편했는지도 모르겠다.

“우와! 원숭이가 어쩜 저렇게!”

옆자리에 앉은 아르세르가 세상 순수하게 감탄하며 날 바라봤다.

신기하지 않냐며 웃으며 바라보는 아르세르에도 더 이상 나는 거짓 웃음 지을 수 없었다.

결코 피우지 못할 마음.

그래, 어쩌면 다행인 일이었다.

아직 마음이 그리 크지 않으니 지금이라면 힘들이지 않고 포기할 수 있었다.

“마음고생할까 봐 알려 주는 거야.”

왜 때문인지 오늘 아침 모르간에게 했던 말이 떠올랐다.

내가 남 걱정할 처지가 아니었다.

대체 누가 누구에게 충고하는 건지.

어처구니없는 내 처지에 절로 웃음이 나왔다.

결국 겉과 속이 다른 사람도.

이룰 수 없는 마음을 품은 사람도.

나였으니.

* * *

“우와!”

어느새 공연이 끝났는지 곁에 앉은 아르세르가 박수를 쳤다.

“진짜 신기하지 않아요?”

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동의를 구하는 아르세르에 나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무대 위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 무엇도 보지도 못했으면서.

“신기하네요.”

혹 마음을 들킬까 싶어 그녀처럼 활짝 웃어 보였다.

결국 내가 겉과는 다른 마음으로 아르세르를 속이고 있었다는 사실에 입 안이 쓰라렸다.

그런 주제에 누가 누굴 의심한단 말인가.

“영애.”

“네?”

아르세르가 눈을 동그랗게 뜨고 날 바라봤다.

그녀가 내게 피해를 준 적이 있던가?

단 한 번도 없었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여자.

사랑스러운 사람이었다.

내 이기적인 바람과 달리.

좋아한다.

로렌스를 포기해야 해서 이렇게 답답한 마음인 건 아닌 듯했다.

마음이 이토록 답답하고 무거운 건 아르세르 로드리게즈에게 품고 있었던 마음을 그 진실을 깨달아서인 듯했다.

스스로가 무척 못나 보이는 순간이었다.

“영애. 오늘은 저 먼저 가 볼게요.”

“혹시 몸이 안 좋으세요? 표정이 많이 불편해 보이세요.”

“네. 먼저 가 볼게요.”

아르세르와 함께 있다간 괜히 쓸데없는 말이 튀어나올 것만 같아 서둘러 자리를 파했다.

이제 나는 뭘 어찌해야 하는 걸까?

그 무엇 하나 알 수 없었다.

아마 떠날 때가 온 것이겠지.

나는 혹시나 아르세르가 따라올까 싶어 걸음을 재촉했다.

“패트리샤, 아무래도 안 되겠어요.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그러나 내 바람과 달리 아르세르는 뛰어와 나를 잡았다.

“원래도 몸이 안 좋으세요?”

“그런 건 아니고….”

“아, 그럼 저희 다음 만남에는 제가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찾아갈까요?”

“네?”

순간 아르세르가 아차 싶은 듯 작게 미간을 찌푸렸다.

“전 공녀님과 또 만나고 싶은데. 공녀님이 자주 아프시니까….”

아르세르가 부끄러운 듯 얼굴을 붉혔다.

“다음번에는 헤라르일라 공작저로 찾아가면 어떨까 해서요. 혹시 불편하세요?”

“아….”

다음이란 게 언제를 말하는 걸까?

“아뇨! 신경 쓰실 거 없으세요. 제가 너무 들떴나 봐요.”

내가 망설이자 아르세르가 아무것도 아니라며 손을 내저었다.

무안해하는 아르세르 때문이었을까?

내 입에서는 그녀를 만날 수 없는 변명이 흘러나왔다.

“그게 아니라. 아마 곧 수도를 떠날 것 같아서요.”

아마 로렌스가 다시 수도로 올라오면 그때를 맞춰 영지로 내려갈 듯했다.

그러니 원한다면 아르세르와 얼마든지 더 만날 수도 있었지만, 나는 변명을 늘어놓았다.

“네? 수도를 떠나신다고요?”

아르세르가 깜짝 놀란 듯 눈을 크게 떴다.

“왜요? 왜 수도를 떠나시는 거예요?”

왜 수도를 떠나냐는 물음에 딱히 마땅한 답이 떠오르지 않았다.

결국 도망이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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