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
맨 처음에는 가족들을 피해 도망가려는 것이었고.
지금은 아르세르와 로렌스를 피해 도망가는 것이었으니.
어쩐지 대답을 듣고 나서야 보내 줄 듯한 아르세르에 대충 말을 지어냈다.
“흐음, 제가 시골을 좋아해서요?”
그러나 내 대답을 듣고도 충분한 답이 되지 않았던지 아르세르가 다시 고개를 갸웃거렸다.
“시골을 좋아하신다고요?”
“으음, 조용한 게 좋달까요?”
아르세르는 여전히 이해 못 하겠다는 듯한 얼굴이었지만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언제 올라오시는 거예요?”
“아직 정확한 날을 정하지는 않아서요.”
아르세르는 그제야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날 놓아주었다.
“패트리샤와 더 친해지고 싶었는데. 아쉽네요.”
“이제 다른 영애들과도 많이 친해지셨잖아요.”
아르세르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다시 밝게 웃었다.
“혹시 어떤 영지로 가세요? 패트리샤만 괜찮다면 제가 놀러 가면 되잖아요!”
아르세르가 놀러 온다는 게 어쩐지 지금은 그리 반갑지 않았다.
“어떤 영지로 가세요?”
“게르하르트로 갈 것 같아요.”
“…게르하르트요?”
나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게르하르트면 소공작님 가문의 영지 맞죠?”
“아, 네.”
어쩐지 마음이 또다시 불편해졌다.
괜히 아르세르를 신경 쓰게 만든 건 아닐까?
게르하르트 영지에 저택을 얻지 말 것을 하는 후회도 들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이 있으니까 외롭지는 않으시겠네요.”
“아마, 소공작님과는 거의 못 만날 거예요. 게르하르트 공작 성과 제가 지낼 저택도 꽤나 거리가 있을 테고요.”
“으음, 그런가요?”
아르세르는 뭔가 생각하는 듯 느리게 눈을 깜빡거렸다.
그러다 헤라르일라 공작가의 마차를 발견했는지 손을 들어 가리켰다.
“패트리샤, 저 마차죠?”
“아, 네.”
아르세르는 친히 내 마차 문까지 열어 주었다.
“그럼 조심히 가세요. 편히 쉬세요.”
“고마워요. 영애.”
* * *
똑똑.
“아버지, 저 패트리샤입니다.”
아르세르와 헤어져 집으로 돌아온 나는 곧장 헤라르일라 공작의 집무실을 찾았다.
“패트리샤? 들어오거라.”
공작의 허락에 조심스레 문을 여니 그 방의 한쪽에는 모르간이 앉아 있었다.
“오늘 로드리게즈 영애와 약속이 있다고 들었는데? 다녀온 것이냐?”
나는 모르간을 흘긋 바라보다 고개를 끄덕였다.
모르간은 공작과 내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더니 조심스레 제 자리에서 일어났다.
“아버지. 잠시 나가 있을까요?”
“흐음, 그래.”
어차피 모르간이 듣는다 하여 문제 될 내용은 아니기에 굳이 모르간이 나갈 필요는 없었지만, 공작은 구태여 나가는 모르간을 잡지 않았다.
“제가 언제쯤 영지로 내려갈 수 있는지 궁금해서요.”
탁.
모르간이 나간 것인지 방문이 닫히고 공작이 말을 이었다.
“게르하르트 영지 내의 저택 말이냐?”
“네. 언제쯤 준비가 끝날까요?”
“패트리샤, 준비는 다 됐단다. 네가 원한다면 당장 내일이라도 마차를 준비시켜 주마.”
어쩐지 공작은 내가 수도를 떠난다는 사실을 반가워하는 듯했다.
그간 내 비위를 맞추던 게 이제 귀찮아진 걸까?
“이게 그 저택의 문서란다. 사용인도 다 준비됐단다.”
공작이 제 서랍을 뒤적거리더니 문서 하나를 내게 넘겼다.
“그래. 언제가 좋겠니?”
“봄이 오면요.”
“뭐?”
나는 공작에게서 넘겨받은 집문서를 훑었다.
뭐, 훑어본다고 내가 뭔가 알아내거나 이해할 수 있는 건 없었지만.
“봄이 오면 간다고요.”
“흐음, 패트리샤. 미리 가서 적응하는 게 좋지 않겠니? 어쨌거나 그곳에서 살 거라면 말이다.”
원래라면 저택을 얻기 위해 내 몫의 품위유지비를 몇 년간 모아야 했겠지.
그렇게 몇 년을 모아도 공작이 내어 준 이 저택만큼 좋은 집은 구할 수 없었을 테고.
설령 집을 얻는다 하더라도 내가 이 저택에서 나갈 수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어쨌거나 공작은 내 결혼을 통해 조금이라도 가문의 득을 보고 싶어 했으니.
그러니 난 무척이나 운이 좋은 편이었다.
그랬는데 어쩐지 서글퍼졌다.
“게르하르트 영지의 겨울은 수도와 달리 추울 거예요. 전 추운 게 싫어요.”
“패트리샤, 저택의 벽난로를 켤 텐데 뭐가 걱정이니.”
난 내가 원해서 내 발로 나가는 건데.
이러면 꼭 등 떠밀려 쫓겨나는 사람 같지 않은가.
“봄에 갈래요.”
“…하지만 소공자가 게르하르트 영지에 머물 때 내려가는 게 네게 더 좋을 거다. 그가 챙겨 줄 테니 말이야.”
그제야 나는 고개를 들어 공작을 바라봤다.
이제 보니 공작이 나를 당장에 보내고 싶어 하는 게 로렌스 게르하르트 때문인 듯했다.
그 영지에 로렌스가 있으니 말이다.
순간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
그리고 그 감정을 인지한 순간 기분은 더욱 바닥으로 고꾸라지고 말았다.
내가 어쩌다 헤라르일라 공작의 애정까지 바라게 됐는지 마음이 착잡했다.
“그런 거라면 저 혼자서도 잘 적응할 수 있어요. 걱정하지 마세요.”
나는 뭔가 더 할 말이 있는 듯한 공작을 뒤로하고 뛰다시피 집무실을 빠져나왔다.
소설 속 악녀 패트리샤와 난 다르다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똑같을지도 모르겠단 생각이 들었다.
결국 제 것도 아닌 걸 탐내고, 여주를 미워하고.
어째 시간이 갈수록 사람이 더 이상해지는 것 같았다.
…답답하고 갑갑한 마음을 털어놓고 싶었지만, 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누군가가 내겐 없었다.
결국 나는 가짜였으니.
기분이 참을 수 없이 우울해졌다.
공작의 말에 다시금 깨달은 것이다.
나는 가짜라는 것을.
내게 잘해 주는 헤라르일라 공작도, 내 눈치를 살피는 모르간도, 사용인들까지.
그들이 내게 보이는 친절은 모두 다 거짓이었다.
의미 없는 관계에 기대한 것도 없는데.
왜 때문인지 한도 끝도 없이 씁쓸해져 갔다.
지금쯤 모두 다 얼마나 들떠 있을지 보지 않아도 대충 짐작이 갔다.
내가 가면 더는 협박 당할 일도, 원치 않게 비위 맞출 일도 없을 테니 얼마나 기쁘겠는가.
결국 로렌스도 아르세르에게 가고 카를로스도 로렌스에게 가고 나면 내겐 아무것도 남는 게 없었다.
결국 누구에게도 환영받지 못하고 관심받지 못하는 혼자였다.
똑똑.
“공녀님, 오늘 저녁 식사하셔야죠.”
방문을 여는 소리에 덮고 있던 이불을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벌써 주무시게요?”
“응.”
“식사는 안 하시려고요?”
“응.”
“간단하게라도 챙겨 가지고 올까요?”
“괜찮아.”
이만하면 나갈 줄 알았는데 방문까지 닫은 엠마는 침대 곁으로 걸어와 다시 말을 걸었다.
“무슨 일 있으셨나요?”
“아냐. 조금 피곤해서 그래.”
“네. 그럼 혹시라도 배가 고프시면 말씀해 주세요.”
“응.”
그러고는 꽤나 긴 침묵이 이어졌다.
“엠마, 나 정말 괜찮아. 오늘만 좀 쉬고 나면 괜찮아질 것 같아.”
“공녀님, 그보다 게르하르트 영지로 가시기로 하셨다면서요.”
그냥 혼자 있을 수 있게 해 주면 좋을 텐데.
“왜 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성가시게 구는 엠마에 흘러나오려는 한숨을 애써 참아 가며 입을 열었다.
“그냥. 가고 싶어서.”
“정확히 언제 가는 건데요?”
“이번 봄이 오면.”
“그곳에 얼마나 계실 거예요?”
“가능한 한 오래.”
“그럼 옷은 얼마나 챙겨야 하는 거죠?”
엠마에게 성질을 부리지 않으려 애쓰며 다시 입을 열었다.
“내 옷은 내가 알아서 챙길게. 신경 쓰지 마.”
“공녀님 옷이 아니라 제 옷이요.”
순간 엠마의 말을 똑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미간을 찌푸렸다.
“엠마, 네 옷?”
“네. 오래 계실 거라고 하니까 아무래도 옷을 다 챙겨야겠어요.”
뒤집어쓰고 있던 이불을 그제야 끌어 내렸다.
“엠마 너도 가게?”
“제가 공녀님 담당 시녀인데 당연히 가야죠.”
“아버지가 명하신 거라면 그럴 필요 없어.”
그때 엠마가 설레설레 고개를 저었다.
“제가 직접 따라가겠다고 말했는걸요?”
“…왜?”
“그야 공녀님이 가시니깐요.”
엠마가 당연하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하지만 네 친구들도 다 여기 있잖아. 시녀야 게르하르트 영지에서 또 구하면 되는 일이야.”
“저처럼 비밀스러운 일까지 완벽하게 해낼 수 있는 시녀를 찾기란 어려울걸요?”
엠마가 장난스레 웃었다.
그녀가 함께 가겠다고 말할 줄은 몰랐는데.
“내가 가 버리면 좋아해야 하는 거 아니야?”
“제가 왜요?”
“나한테 몰래 돈 받고 그간 아버지 몰래 저택에서 나갈 수 있게 해 준 거 들킬 일 없으니 말야.”
눈을 한껏 동그랗게 뜨던 엠마가 내 말이 끝나자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하하하하.”
“왜 웃어?”
“어차피 공녀님은 그걸 진짜 공작님께 말할 생각도 없으셨잖아요.”
자신만만하게 말하는 엠마에 내가 틀렸다는 듯 작게 어깨를 으쓱였다.
“저 이젠 하나도 안 무서워요. 그보다 들어 보니까 카를로스도 함께 가는 것 같던데. 맞나요?”
엠마는 그렇게 또 한참을 떠들고 나서야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간단히 드실 만한 걸 가져다드릴까요?”
“응. 배고파.”
“하하, 네. 금방 가져올게요.”
엠마는 침상에 놓인 램프에 불을 켜 주고는 방을 나갔다.
“저 이젠 하나도 안 무서워요.”
이젠 무섭지 않다던 엠마의 말에 온종일 복잡했던 마음이 아주 조금은 가라앉았다.
* * *
똑똑.
“도련님. 수도의 게르하르트 공작저에서 편지가 왔습니다.”
로렌스의 방문을 두드린 시종은 아무런 대답이 없는 로렌스에 다시금 입을 열었다.
“헤라르일라 공녀가 보낸 편지인 듯합니다.”
“들어와.”
로렌스의 허락에 방문을 연 시종은 잠시 문턱에서 멈칫했다.
이미 해가 중천에 떠 있는데 로렌스의 방만은 빛 한 점 없는 어둠이었다.
문을 반쯤 열어 둔 채 방 안으로 들어온 시종은 희미한 빛에 의지하며 책상으로 다가섰다.
그때 침대 곁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더니 이내 커튼이 걷혔다.
갑작스레 들어온 밝은 빛에 로렌스는 눈이 부신 듯 미간을 와락 찌푸렸다.
“이리 줘.”
“아, 네.”
반쯤 벌어진 셔츠 사이로 보이는 엉망으로 상처 난 살점.
로렌스에게 편지를 건네던 시종은 와락 인상을 찌푸렸다.
“도, 도련님. 그 상처는….”
시종의 시선을 느낀 로렌스가 제 앞섬을 세차게 움켜쥐었다.
“나빈 박사님을 불러올까요?”
“됐어.”
반쯤 풀어져 있던 로렌스의 분위기가 한순간에 싸늘하게 변했다.
“하, 하지만 상처가 심하신….”
“내가 필요 없다고 분명 말하지 않았나? 신경 쓰지 마.”
그제야 시종이 알았다는 듯 깊이 고개를 숙였다.
하지만 로렌스의 명처럼 그 상처에 대한 신경까지 끊어 낼 수는 없었다.
마치 채찍에 살이 찢어진 듯한 상처였다.
길거리를 떠돌아다니는 부랑자에게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을 듯한 상처가 왜.
왜 게르하르트 소공작에게 있는 것인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저런 상처가 생기는 건지.
도련님은 왜 상처를 치료도 하지 않으시고 방치하시는 건지.
시종이 그러한 사념에 빠져 있을 때 로렌스는 제게 온 편지를 읽어 내려갔다.
그러더니 제 책상으로 다가가 종이에 뭔가를 적었다.
“이걸 기사단장에게 전해.”
“네. 알겠습니다.”
“신입 기사들 숙소 층에 방 하나 더 준비해 두고.”
“네, 도련님. 알겠습니다.”
시종의 시선이 아주 잠시 로렌스의 가슴팍에 머물렀다.
셔츠에 가려져 더는 보이지 않았지만, 그 소름 끼치던 상처가 아직도 시종의 뇌리에 선명했다.
악녀에게는 이유가 있다